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5.조선역사문화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2024) - 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

동방박사님 2024. 7. 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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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당신들의 소현세자는 틀렸다
우리가 몰랐던 소현세자를 만나다

참신하고 다채로운 최신 연구 성과를 독자들과 널리 공유하기 위해 한국역사연구회가 새롭게 기획한 ‘금요일엔 역사책’이 열 번째 책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 출간을 통해 한 고개를 넘게 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금요일엔 역사책’을 마주하며 역사를 통해 보다 여유롭고 정의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_죽음으로 뿌려진 씨앗

01 세자가 되다

격변에 휩싸인 동아시아
외면받는 광해군의 외교
뒤바뀐 운명

02 인질이 되다

꺾여버린 배금의 꿈
마찰의 시작
위기 속에 치러진 데뷔전
끝나지 않는 갈등
운명의 순간
남한산성의 비극
패전의 대가

03 심양에서의 삶과 한양에서의 죽음

심양으로 향하는 길
심양에서의 생활
두 번의 귀국
관계 악화와 일탈의 시작
중국 정복과 영구 귀국
고생 끝에 찾아온 죽음

04 영웅이 되다

잊힌 존재
서양 문물 수용의 상징으로 거듭나다
죽음에 관하여
소현세자 서사의 완성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05 역사 속의 소현세자와 대면하기

소현세자의 삶은 어떻게 재구성되는가
소현세자는 외교관이었는가
포로 해방과 농장 경영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가
인식의 전환은 일어났는가
아담 샬의 기록은 믿을 수 있는가
독살인가 병사인가

에필로그_‘조선의 미래’는 오래 지속되었다

저자 소개 

저 : 이명제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사학과에서 〈17세기 청·조선 관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를 공부하다가 생각보다 소현세자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소현세자를 사랑한다. 현재 전남대학교 역사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외교문서를 통해 본 도르곤 섭정기 조·청 외교」(『동양사학연구』 164, 2023) 「소현세자의 2차 ..

책 속으로

미약한 소현세자와 강인한 소현세자, 왜 같은 존재를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소현세자의 모습을 발견한 것일까? 여기서부터 소현세자를 향한 저의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은 당대의 소현세자와 마주하기 위한 저의 몇 가지 연구 성과를 집약한 결과물입니다.
--- p.10

이 책을 통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소현세자가 아니라 소현세자가 관심을 받게 되는 과정에 개입되었던 다양한 욕망에 관한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1920~30년대부터입니다. 100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소현세자를 재조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소현세자라는 인물 자체의 삶이 아니라 소현세자를 통해 구현될 욕망이었습니다. 100년 전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실패를 설명할 존재로서, 100년 후 대한민국 국민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조선을 건국하여 근대화를 이룰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소현세자를 주목했던 것입니다. 욕망이 앞서면 눈은 가려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강인한 소현세자를 원했고, 역사 속 소현세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소현세자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라고 붙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p.12

1645년 4월 26일, 조선의 세자 이왕李이 창경궁 환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왕의 죽음 역시 병자호란이 초래한 비극의 연장선이었다. 조선의 차기 왕위 계승권자마저 잔혹한 운명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세자에게 ‘소현昭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소현세자다.
--- p.17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되지만, 막상 소현세자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에서는 비극으로 점철된 소현세자의 죽음보다는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나아가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그의 존재가 부각되는 과정과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온당한 것인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 p.19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소현세자의 삶에도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소현세자의 아버지였던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국왕 인조로 등극한 것이다. 반정 직후 반포된 교서에는 반정의 명분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교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내통했다는 취지였다. 다시 말해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 p.21~23

조선과 명이 일본의 도전에 직면한 사이 요동 지역에서는 한 명의 여진인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누르하치努爾哈赤로, 압록강 북쪽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건주여진 출신이었다. 1583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누르하치는 불과 5년 만에 건주여진 세계를 통일했다. 명은 여진 부족 간의 경쟁을 부추기며 분열시키는 정책으로 여진 사회를 통제해왔었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등장으로 인해 명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 p.24~27

후금에 대한 출병 여부를 두고 광해군과 신료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명의 요구를 거절하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신료들은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며 출병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점을 고수했다.
--- p.28

신료들은 조선이 파병을 거부하여 명과 관계가 틀어질 시, 후금의 목표가 명에서 조선으로 바뀔 수 있음을 지적했다. 후금이 조선을 건드리지 않는 근본적 이유가 명이 조선을 도와 후금의 후방을 공격할 것을 우려해서라는 주장이다.
--- p.30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안팎에서 도전에 직면했다. 우선 명 측에서 조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명 내부에서는 사르후 전투 패배 이후 여허가 정복된 데 이어 조선까지 후금에 넘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조선과 후금의 관계가 심상치 않자 우려의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 p.36

조선을 의심하는 명의 분위기를 감지하자 조선 내부에서도 광해군에게 외교 노선을 명확히 하라는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후금과의 확실한 단절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물론이고 외교를 담당하는 신료들 역시 무턱대고 후금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해답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후금보다 군사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굳이 심기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 p.37

광해군은 모문룡을 가도?島라는 섬으로 들어가도록 설득했다. 후금군이 조선 경내로 침입하는 사태를 막고자 함이었다.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광해군의 대응을 놓고 조선 내부에서 불만이 커져갔다. 광해군의 결정은 명에 대한 의리도 내팽개치고, 후금의 위협에 대한 자위마저 포기한 것으로 비쳐졌다. 조선 조정 내에서 광해군의 외교 전략을 옹호하는 사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 p.39

1623년 3월 13일 서인 세력이 능양군을 앞세워 무력을 동반한 정변을 시도했다. 그 결과 광해군이 폐위되고 능양군이 새로운 국왕 인조로 즉위하게 되니,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 부른다.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패륜과 더불어 무리한 궁궐공사로 인해 민심을 완전히 잃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1621년 이후 설득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결국 광해군은 고립된 상태로 자신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 p.40

인조반정이 성공한 요인 중 하나는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가 공감대를 잃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 대부분은 명과의 관계를 강화해 후금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합리적인 판단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 정권이 친명배금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45

이괄의 난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반란이 남긴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우선 조선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 민심의 분열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 조선의 대후금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 ‘친명배금’을 외치던 인조 정권의 자신만만한 행보에 제동이 걸려버렸다.
--- p.53~54

홍타이지가 온전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 상황에서 홍타이지가 찾은 돌파구가 바로 조선이었다. 홍타이지는 처음부터 조선에 대한 강경파 중 한 명이었다. 사르후 전투 이후에도 조선이 후금의 화친 요구에 응하지 않자 후금 내부에서는 조선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그 제안자 중 한 사람이 바로 홍타이지였다. 당시 홍타이지의 제안은 누르하치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이제 홍타이지의 의지를 정면에서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 p.58

흥미롭게도 정묘호란은 애초에 후금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아니었다.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바로 모문룡이었다. …… 후금군의 출병 목적은 일차적으로 모문룡을 사로잡기 위함이었다.
--- p.59

강화 협상이 타결된 것은 2월 15일이었다. 후금군이 임진강 방어선을 뚫지 못하면서 후금군 지도부 역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양국은 일정한 양보를 통해 합의점을 도출했다. 후금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인정했고, 조선은 후금에 인질과 세폐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3월 3일, 조선과 후금은 정식으로 맹약을 체결했고, 9월 후금군이 조선 영내에서 완전히 철병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종결되었다.
--- p.61

1월 24일 소현세자가 이끄는 분조가 한양을 떠나 2월 6일 최종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했다. 조선 왕조의 발상지였던 전주를 수호하는 동시에 곡창지대였던 전라도 일대의 미곡을 대조大朝에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전주에서의 분조 활동은 36일간 지속되었다. 다행히 전쟁이 비교적 빨리 종결되면서 소현세자는 3월 13일 전주를 떠날 수 있었다. 소현세자의 분조는 대조가 위치한 강화도에 도착한 3월 23일에 해체되었다.
--- p.63

소현세자가 존재감을 과시하는 장면도 있었다. 전주에 도착한 이후 무군사撫軍司에서 “국가가 위기에 처한 시기이므로 인심을 고무시키고 군사를 충원해야 한다”며 인조에게 보고하고 과거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소현세자는 자신의 직권으로 과거시험 개최를 결정하고 곧장 문무과를 실시했다.
--- p.64

과거와 관련한 일화는 소현세자의 아량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적 미숙함도 노출시켰다. 특히 “인조에게 먼저 보고한 후에 과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무군사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직권을 남용한 사실은 주목할 대목이다. 과거는 국왕을 위해 복무할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시험이다. 그런데 국왕을 거치지 않고 소현세자가 시험을 주관했다는 사실은 인조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소현세자가 주관하는 시험에서 합격한 인원들은 인조보다 소현세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고, 이는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 p.64

이렇게 소현세자의 데뷔전은 마무리되었다. 생각보다 짧은 기간이라 눈에 띄는 행적을 남길 수도 없었고, 경험 부족으로 인해 미숙한 부분도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당한 조선 왕실의 일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완수했다.
--- p.70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명’의 존재였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은 조선과 명의 단절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끝까지 저항하여 명과의 관계를 지켜냈다. 명과 후금이 전쟁을 벌인다면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킬 것이 분명했다. 후금의 입장에서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p.71

조선과 후금의 관계가 곧장 파국에 접어든 것은 아니었다. 후금 입장에서 조선은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과 관계를 단절하면 세폐나 무역을 통해 획득하던 경제적 이득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니 당장 적대적 감정을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실제로 양국은 형제관계를 전제로 절충점을 찾아가며 관계를 지속했다. 그사이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후금의 몽골 차하르 정복이었다.
--- p.74

차하르 정복은 몽골이라는 경쟁자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국옥새가 홍타이지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 또한 큰 의미를 가진다. 전국옥새는 몽골이 세운 원제국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몽골제국 대칸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홍타이지가 이 옥새를 차지하면서 초원의 지배자를 자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차하르를 정복하고 전국옥새를 손에 쥔 홍타이지는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여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만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것이다. 이는 후금의 성장 과정에서 복속된 수많은 이방인에게 소속감을 제공했다. 뒤이어 홍타이지는 1636년 만주와 몽골, 그리고 항복한 한인 무장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금국’에서 ‘대청국’으로 바꾸었다. 완벽한 진전을 단행한 것이다.
--- p.76

조선과 청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이 갈등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묘호란 당시 후금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인정했다. 하지만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에 동참하라는 요구는 명을 버리고 청의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는 정묘호란에서 도달했던 합의점을 청이 스스로 깨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조선의 선택이 유연하지 못했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17세기 동아시아의 격동이 청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시선일 뿐이다. 당대 조선인들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여전히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최선의 선택은 명일 수밖에 없었다.
--- p.82~83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이 열린 1636년 4월로부터 병자호란이 발발하는 12월까지 8개월의 시간 동안 양국은 철저히 전쟁 준비에 착수한다. 청의 경우 조선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사전 작업에 돌입했다. …… 조선 역시 청의 침략에 착실히 대비했다. 우선 외교적으로 계속해서 국서 전달을 시도하며 대화 창구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군사적으로도 청의 침공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책을 세웠다. 조선의 대응 방침은 평안도 주요 거점의 방어 병력을 산성으로 이동시켜 최대한 시간을 지연시키고 그 사이 인조 정권이 방어에 용이한 강화도로 대피하는 것이었다.
--- p.83

병자호란 당시 소현세자는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을까? ……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소현세자는 분조를 구성할 겨를도 없이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갇혔다.
--- p.87

홍타이지는 인조의 맏아들, 즉 소현세자와 다른 한 명의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명시했다. 또한 인조가 사망한다면 인질로 보내진 아들 중에서 임금을 세울 것이라 선언했다. …… 이 조항으로 인해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세자의 동생이었던 봉림대군까지 인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었다.
--- p.91~92

소현세자는 졸지에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향하게 되었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항복 의례를 마친 후 인조를 비롯한 조선 측 인사들의 한양 복귀가 허락되었지만 세자는 그대로 청 진영에 남았다. 잠시 집으로 돌아가 한숨 돌릴 여유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며칠 동안 후속 작업이 이어진 후 2월 8일 마침내 심양으로 출발했다.
--- p.94

인질 하면 밧줄에 꽁꽁 묶여 삼엄한 감시에 시달리는 모습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인질 생활은 그런 모습과 달랐다. 우선 소현세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 처음 심양에 도착했을 때 세자 일행은 500여 명에 달했다. …… 소현세자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기에는 충분한 인원이었다.
--- p.97~98

소현세자 일행에 대한 대우는 어떠했을까? 우선 잠자리를 알아보자. 처음 소현세자가 도착했을 때는 원래 조선 사신들이 이용하던 동관東館이라는 곳을 숙소로 사용했다. 하지만 사신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보니 규모도 작고 시설도 불편했다. …… 이 문제는 황제 홍타이지가 새로운 관소인 심양관을 지어줌으로써 해결되었다. 심양관은 1644년 소현세자가 북경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관사로 이용되었다.
--- p.98~100

세자 일행의 식사 문제에 대해 확인해보자. …… 처음 1년간은 청에서 현물로 제공해주다가 이후에는 은을 지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 1642년부터는 심양관이 자급자족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 p.100

문안과 공부가 세자로서의 업무였다면 인질로서의 업무도 존재했다. 우선 매달 5, 15, 25일에 열리는 청나라의 조참朝參에 참여해야 했다. 조참은 신하들이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는 동시에 황제가 신하들에게 주요 사안을 공지하는 모임으로, 조선이 청의 제후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현세자 역시 참석의 의무가 있었다.
--- p.101

조참 외에 황제가 주최하는 연회, 황실의 혼인이나 제사와 같은 주요 행사에도 참석해야 했다. …… 세자가 참석해야 하는 행사 중에는 사냥도 있었다. 사냥은 청이라는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의식 중 하나였다. …… 황제 홍타이지는 곧잘 소현세자를 비롯한 조선 왕족에게도 사냥 동참을 명했다. 자신들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궁궐 바깥을 나갈 일이 없던 소현세자에게 사냥 참여는 무척이나 고역이었다.
--- p.101~102

사냥도 고됐지만 인질로서의 의무 중 소현세자를 가장 괴롭힌 것은 전쟁이었던 듯하다.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쟁에 몇 차례 소현세자를 동참시켰다. 이 역시 사냥과 마찬가지로 청의 군세를 과시하여 명의 승리를 믿는 조선의 희망을 꺾어버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 p.102

소현세자는 심양에서만 인질 생활을 수행했을까. 그렇지 않다. 앞에서 본 것처럼 소현세자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교외로 사냥을 나가거나 명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1644년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된 이후에는 북경에서 두 달여를 생활하기도 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소현세자가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다고 알려진 것 역시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현세자는 조선도 두 차례 방문했다.
--- p.103

일시적이나마 소현세자가 조선을 방문함으로써 자유로운 왕래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3년여 동안 조선은 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지 않았다. ……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크게 두 가지 사정 때문으로 추정된다. 첫째, 세자의 귀국을 요청할 명분이 없었다. …… 둘째,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 p.101

소현세자의 2차 귀국은 조선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인질 문제가 정치적으로 오염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도르곤은 인질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 조선 내에 ‘친도르곤’ 세력을 조성하려 했고,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현세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 p.108

아마도 소현세자는 자신이 귀국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사랑과 고국의 정취를 느끼며 일종의 힐링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인조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아버지 인조의 기대감, 세자로서의 책임감이 소현세자가 고달픈 인질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준 힘의 원천이었겠지만 한양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 p.113

2차 귀국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 진짜 문제는 귀국 길에 발생했다.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양에서 유생들과 무인들을 모아놓고 과거를 실시한 것이다. …… 소현세자가 시행한 과거는 인조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 소현세자는 무슨 생각으로 과거를 연 것일까? 과거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이를 통해 한양의 궁궐에서 느꼈던 소외감 내지 박탈감을 치유하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승정원의 지적처럼 소현세자의 행동은 월권에 해당했고, 인조와 소현세자의 거리를 조금 더 멀어지게 했을 것이다. 청의 정치적 압박이 국왕과 세자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어색한 관계가 정치적 실책으로 이어지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 p.116~8

도르곤은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정복으로 조선과 청 관계를 악화시키는 주요 변수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한다고 밝혔다. 결국 이 조치로 인해 11월 20일 소현세자는 북경을 떠나 꿈에 그리던 조선으로 향했고, 1645년 2월 18일 한양에 도착했다. 마침내 인질 생활이 종료되었다.
--- p.122~123

한 나라의 세자가 인질 신세에서 벗어나 무사히 귀국했으니 이를 기념하는 연회가 매일 열려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병환에 시달렸다. 가장 축하받아야 할 시기에 병마와 싸워야 했다.
--- p.124

4월 26일 소현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향년 34세였다. 조선 왕족의 일원이었던 소현세자는 1625년 조선, 1634년 명, 1639년 청에 의해 세 차례나 세자 책봉을 공인받으면서 훗날 조선의 왕위에 오를 것이라 기대되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끝내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 p.125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많은 문제가 파생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되고 해결되는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소현세자의 존재는 희미해져갔다. 역사적 격변기를 힘겹게 살아갔던 소현세자의 일생보다 소현세자를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가 상황을 장악한 것이다. 그렇게 소현세자의 죽음은 비교적 건조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 p.130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외받던 소현세자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정교봉포正敎奉褒》라는 자료를 입수하여 소개했다. 《정교봉포》는 19세기 후반 강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부 황백록黃伯祿이 중국 천주교 역사를 정리한 서적이다. 이 책에는 놀랍게도 소현세자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의 교유가 기록되어 있었다.
--- p.130

소현세자와 아담 샬의 교유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였다. …… 야마구치의 연구를 통해 소현세자는 역사의 조연에서 벗어나 서양문화 수용의 상징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심지어 조선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꿀 가능성을 가졌던 존재로 부각되었다. 부활의 서막이 열렸다.
--- p.132~135

독살설은 소현세자의 죽음에서 발생하는 원초적인 의문들, 예컨대 세자는 왜 요절했을까, 세자는 왜 조선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했을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공한다. 더구나 《인조실록》에 수록된 증언은 독살설에 객관성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의 사인死因은 병사에서 계획된 타살로 바뀌었고, 조선은 세자 한 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상실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 p.137

소현세자 서사는 ‘인질 소현세자’의 모습을 첨단의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이자 정체된 조선을 깨울 현실주의자, 전쟁 포로들을 구출한 노예 해방가, 농장 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영가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는 소현세자가 패전에 대한 대가로 인질 생활을 수행하면서도 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또 다른 피해자, 즉 조선인 전쟁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구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모습은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쓴 인조와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구출한 전쟁 포로를 활용하여 농장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거나 명·청 교체를 바라보면서 현실주의적 안목을 갖게 되는 모습도 중요한 포인트다. 심양에서의 인질 생활은 차기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준비하는 수련의 장으로 탈바꿈했고, 소현세자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제 소현세자는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나갈 리더십을 갖춘 인재로 변모했다.
--- p.139

소현세자 콘텐츠를 통해 소현세자 서사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지고, 소현세자는 조선을 바꿀 수 있었던 인물로서 평가가 격상되었다. 그렇게 소현세자는 우리 안의 작은 영웅이 되어갔다.
--- p.141~143

비록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소현세자는 다시 호출되었다. 심지어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인물로 재평가되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망각의 늪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이다. …… 그런데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 재구성되고 있는 소현세자의 모습은 정말 실제와 부합한 것일까
--- p.145

세자는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서 매우 높은 신분에 해당하는데 《인조실록》에서는 왜 소현세자를 비판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일까? 정답은 바로 봉림대군에 있다. ……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 이상, 원손은 봉림대군의 잠재적 위협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봉림대군, 훗날의 효종이 정치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현세자와 그의 아들이 세자의 지위에 적합하지 않음을 입증해야 했다.
--- p.148

청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팔기八旗’이다. 청은 과거 누르하치 시절부터 복속된 여러 부족을 ‘구사g?sa’라는 8개의 조직 아래 배치했는데, 각각의 구사가 서로 다른 깃발을 썼기 때문에 팔기라고 불렸다. 각각의 구사는 관할하는 주인이 달랐다. …… 황족들은 구사에 대한 지분을 토대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종친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관념은 청 사회에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현세자에게 상당한 정치적 역할을 기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p.154

인조가 기대한 소현세자의 역할은 조선과 청의 관계를 매끄럽게 만드는 외교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고초를 겪더라도 절개를 지키며 청의 요구에 맞서는 모습을 연출하길 내심 바랐을 것이다.
--- p.157

인조의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자신의 발언력을 키우는 것은 또 다른 의심을 불러올 수 있었다. 적극적인 활동을 촉구하는 청의 요구에 대해 매번 “세자의 직무는 문안을 여쭙고 수라를 돌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회피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현세자는 외교관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선보일 환경이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p.158

포로 속환과 농장 경영 과정에서 심양관 측의 자발적인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심양관은 일꾼 문제로 농장 경영을 회피하려고만 했고, 포로 속환을 통해 일꾼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은 소현세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홍타이지의 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 p.160~161

소현세자는 농장 경영에 얼마나 참여했을까? 현재의 소현세자 서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을까? 우선 기록상으로 소현세자가 적극적으로 농장 경영에 개입한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 p.161

조선의 세자인 동시에 청의 인질이라는 소현세자의 복합적인 신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외교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소현세자도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소현세자가 조선의 대다수 사람이 표방하던 ‘숭명반청’의 태도와 다른 심성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다는 말이다.
--- p.167

아담 샬은 허구의 내용을 회고록에 삽입한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 아담 샬은 1648년 이후에 일어난 일을 1644년 소현세자와의 만남에 끼워 넣은 것이다.
--- p.173

소현세자 서사는 역설적이게도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완성된다. …… ‘현실을 직시한 소현세자가 명분에 사로잡힌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그림 말이다. 그런데 ‘독살설’에서 언급하지 않는 또 다른 진실이 하나 있다. 소현세자가 심각할 정도로 병약했다는 사실이다.
--- p.175

소현세자의 독살을 지지하는 《인조실록》의 기사가 인조의 무고함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현세자 염습에 참여했던 이세완은 독살의 흔적이 보인다고 주장하면서도 인조 역시 세자의 중독 사실을 몰랐다고 증언했다. 물론 이는 인조를 자식 살해범으로 지목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된 증언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인조가 정말 소현세자 독살을 지시했다면, 독살의 증거인 소현세자의 시체를 무방비 상태로 방치했을까?.
--- p.184

소현세자는 오래전부터 지병을 앓아왔고, 인조와의 관계로 인해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가 직접 소현세자의 독살을 사주하고 이형익이 독살을 수행했다는 기존의 독살설은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새로운 사료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 p.185

소현세자의 죽음은 비극적인 사건이다. 많은 이들이 이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 좌절되었고, 궁극적으로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소현세자에게서 근대화의 씨앗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였다는 사실이다.
--- p.187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 학자들은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를 찾아 나섰다.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이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찾기 위해서, 조선인 학자들은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원대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재조명된 것이 바로 광해군이나 소현세자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즉 조선에도 나라를 근대화로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물들이 존재했지만, 이들이 그러한 가능성을 펼쳐 보기도 전에 사라지면서 암울한 미래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 p.187~188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별개로 조선의 역사가 생동감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흔히 소현세자를 서양 문물 수용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하고 있지만, 소현세자의 존재와 별개로 서양 문물은 지속적으로 조선 사회에 유입되었다.
--- p.188

근대화 실패의 책임을 너무 쉽게 조선의 폐쇄성에 돌리고 있다. 조선은 생각만큼 폐쇄적이지 않았고, 소현세자라는 존재와 무관하게 서양 문물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현세자 서사’는 소현세자에게 조선의 미래를 위임하고,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선의 좌절과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은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로도 250년 이상 존속했다. ‘조선의 미래’는 오래 지속되었다.
--- p.189

혹시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미리 풀어두고자 한다. 이 책은 소현세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병자호란 패배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했던 인조와 그동안 근대화의 열망에 대한 기대를 감당해야만 했던 소현세자라는 구도 속에서 소모되고 있는 ‘영웅’ 소현세자를 구출하고, 역사적 격변기를 살아왔던 당대의 ‘인간’ 소현세자를 마주보기 위한 시도였다.
--- p.189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하지만 그 열망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놓여야만 한다. 현재의 과도한 열망으로 시계추가 기울어졌다면 돌려놓아야 한다. 소현세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21세기의 ‘영웅’ 소현세자가 아니라 17세기 격변기의 ‘인간’ 소현세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 p.192~193
 
출판사 리뷰
소현세자가 살았다면 정말 조선이 달라졌을까

“두 대한의 역사는 소현세자부터 달라졌더군. 자네의 세계에서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내 세계에서는 영종으로 역사에 남으셨어. 호란을 막아냈거든. 그 이후부터 두 세계의 역사는 조금씩 다르게 흘러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2020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의 주인공 이곤은 현대 한국의 평행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이다. 이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조선은 근대화에 성공했다. 우연히 현대 한국의 세계로 넘어온 이곤은 어디서부터 조선의 역사가 달라지게 되었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 결과 소현세자로부터 양국의 역사가 차이가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 조선의 차기 왕위 계승권자였지만 인질이 되어 타국에 머물러야 했던 태자. 인질에서 벗어나 그리던 고국으로 귀국했지만 병환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동궁. 최근 이 비운의 인물 소현세자가 새로운 서사를 통해 ‘영웅’으로 각광받고 있다. 첨단의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이자 정체된 조선을 깨울 현실주의자, 전쟁 포로들을 구출한 노예 해방가, 농장 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영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만큼 무의미한 것이 없다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소현세자가 살아서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진정 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린 ‘영종’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한 가정의 토대로 기능한 인질 시절 소현세자의 모습이 진정 선구자, 현실주의자, 노예 해방가, 탁월한 경영인으로 평가받을 정도였을까.

‘영웅’이 아닌 ‘인간’ 소현세자를 찾아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새롭게 기획한 ‘금요일엔 역사책’(한국역사연구회 역사선)의 열 번째 책인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에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다. ‘영웅’ 소현세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간’ 소현세자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지 등에 대한 저자의 고찰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저자 이명제(전남대학교 역사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는 이 책에서 “병자호란 패배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했던 인조와 그동안 근대화의 열망에 대한 기대를 감당해야만 했던 소현세자라는 구도 속에서 소모되고 있는 ‘영웅’ 소현세자를 구출하고, 역사적 격변기를 살아왔던 당대의 ‘인간’ 소현세자”를 마주보고자 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소현세자는 여러 콘텐츠를 통해 조선을 바꿀 수 있었던 인물로 격상된 ‘영웅’이 아니었다.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조선을 건국하여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우리 안의 작은 ‘영웅’이 아니었다. 전쟁 패배의 희생양이 되어 26세에 불과했던 1637년부터 8년 동안 인질 신분으로 청의 수도였던 심양에 머물러야 했던 ‘인간’이었다. 힘의 우위를 확인받으려는 청의 의지와 자율성 및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조선의 시도가 사사건건 충돌하던 시공간의 중심에서 그러한 충돌의 직격탄을 매순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던 ‘인간’이었다. 원대한 미래를 꿈꾸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에 허덕이다가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인간’이었다.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가 마주한 소현세자

저자는 ‘인간’ 소현세자를 찾기 위해 향후 소현세자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인조반정부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각 난에서 세자 신분으로 소현세자가 수행한 역할과 8년 동안의 인질 생활, 귀국 후 두 달 만에 사망하게 된 상황, 소현세자 서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구체적인 내용, 그러한 소현세자 서사의 재검토를 통해 당대 소현세자의 삶을 새롭게 구성한다.

첫 번째 〈세자가 되다〉에서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의 운명을 뒤바꿔놓았던 인조반정을 다룬다. 특히 반정 이후 소현세자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광해군의 대 후금(훗날의 청) 외교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두 번째 〈인질이 되다〉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조선이 청의 제후국으로 편입되고 소현세자가 인질로 끌려가는 과정을 살핀다. 또한 두 차례 전쟁에서 소현세자가 수행했던 역할도 조망한다. 특히 정묘호란 당시 소현세자가 이끈 분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당시 소현세자의 분조 활동은 인조로부터 그다지 호평을 이끌어내지도 못했으며 훗날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를 벌려놓는 한 가지 사건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세 번째 〈심양에서의 삶과 한양에서의 죽음〉에서는 8년 동안의 인질 생활과 귀국 후 두 달 만에 일어난 사망 사건을 다룬다. 특히 소현세자를 향한 조선과 청의 기대가 충돌하는 지점을 확인하고, 소현세자와 인조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는 과정을 조명한다.

네 번째 〈영웅이 되다〉에서는 소현세자의 삶이 재조명되는 계기와 현재 통용되는 소현세자 서사의 탄생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당대 조선에서는 비운의 인물로만 비춰졌던 소현세자가 현대에 이르러 조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던 영웅으로 변모하는 흐름을 정리한다.

다섯 번째 〈역사 속의 소현세자와 대면하기〉에서는 소현세자 서사를 재검토하며 당대 소현세자의 삶을 재구성한다. 특히 소현세자 서사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외교관, 노예 해방가, 농장 경영인, 현실주의자, 서양 문물 수용자로서의 소현세자 모습이 역사적 실제와 다름을 입증한다. 또한 소현세자 ‘독살설’을 꼼꼼하게 살피며 인조를 변호한다.

‘소현세자 서사’는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저자가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소현세자가 아니라 소현세자가 관심을 받게 되는 과정에 개입되었던 다양한 욕망”이다. 저자는 소현세자가 주목되기 시작한 것이 1920~30년대부터라고 말한다. 소현세자를 재조명한 이들은 왜 수많은 역사적 인물 중 소현세자에 주목했을까.

저자는 이를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 관련 담론에서 찾는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 학자들은 조선의 근대화 실패 원인을 찾아 나섰다.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이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찾기 위해서, 조선인 학자들은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원대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광해군이나 소현세자 등이 조선을 근대화로 이끌 수 있던 인물들로 호출되었다. 이 담론은 새롭게 발굴된 소현세자 등이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 보기도 전에 사라지면서 조선이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끝맺는다.

저자는 ‘소현세자’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치환했던 100년 전 일본인과 조선인 학자들의 욕망이 오늘날 ‘소현세자 서사’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소현세자라는 인물 자체의 삶이 아니라 소현세자를 통해 구현될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웅’ 소현세자를 원하는 분위기에서 역사 속 ‘인간’ 소현세자가 설 자리는 없었다. 정작 중요한 소현세자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자가 책의 제목을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라고 붙인 이유이다.

저자는 말한다.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하지만 그 열망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놓여야만 한다. 현재의 과도한 열망으로 시계추가 기울어졌다면 돌려놓아야 한다.” “21세기의 ‘영웅’ 소현세자가 아니라 17세기 격변기의 ‘인간’ 소현세자에 주목해야” 한다는 저자의 역설이 유의미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