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지)/2.강화.인천

인천 대불호텔 터

동방박사님 2016. 6. 11. 09:52
728x90


  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구미각국의 외교사절, 선교사 외교사절 들이 밀려 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목적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인천에 도착하면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철도가 놓이기 전이어서 교통편이라고는 조랑말이나 가마 정도가 고작이었다.  걸어서 가려면 하루종일 걸렸다.  또 배의 도착시간에 따라 하루를 묵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자 자연스레 숙박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숙박시설의 정결함을 유난히 따지는 서양인들을  주막에 재울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근대적 숙박시설인 호텔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효시가 1888년 인천시 중구 중앙동에 세워진 '대불호텔'이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시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대불호텔은 일본조계 입구에 벽돌식의 3층 건물로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에 의해 1887년 착공돼 다음해 완공됐다.  당시 일본조계 첫 집이 호리씨 자택이었고 두 번째가 대불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서양인들을 겨냥해 서양식으로 설계됐다.  


  대불호텔 건너편 2층 건물에서 중국인 이타이라는 사람도 외국인 상대로 장사를 했는데 1층에서 잡화상점을 차렸고 2층에는 '스튜어드 호텔'을 개업했다.  대불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으며 침대가 딸린 객실 수는 11개, 다다미 수는 240개에 달했다.  숙박료는 당시 화폐로 상급 객실 2원50전, 중금 2원, 하급 1원50전이었다.  같은 시기 일본식 여관인 '수월루'의 상급 객실 숙박료가 1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2배 이상 비쌌음을 알 수 있다.  호텔 내에서는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불호텔은 일제시대 때 중국요리집인 '중화루'로 바뀌었다.  중화루는 공화춘, 동흥루 등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3대 중국요리집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건물은 1978년 헐린 뒤 현재는 나대지로 방치돼 있다.  대불호텔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우리나라에 처음 온 감리교 선교사 아펜절러의 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1885년 4월 5일자 비망록에는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과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 짐들이 옮겨져 있었다. 다이부츠 호텔로 향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다이부츠'는 대불호텔의 일본식 발음이다.  따라서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1888년 대불호텔을 건립하기 이전에 이미 같은 이름의 서양식 호텔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펜젤러는 '호텔방은 편안하고 넓었으나 약간 싸늘했다.  식탁에 않았을 때는 잘 요리되어 먹기 좋은 음식이 나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