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지)/2.강화.인천

구 감리교여선교사 숙소

동방박사님 2016. 6. 1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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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감리교여선교사 숙소

  인천시 동구 창영동 42-3번지에는 서구적 풍에 한국적인 전통양식을 배합한 색다른 건물이 고풍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본 건물은 1993년 7월 6일 시도유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되었다.

  18세기 영국저택의 모양에  용(用)자형 창호 등을 적절하게 구사한 이 건물은 1993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19세기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송한 여선교사들이 합숙소로 사용했던 중요한 근대 역사적 의미를 갖는 건물이다.  외형은 간소한 상자형으로 되었지만  지붕구조가 독특하다. 벽체구조는 적벽돌로 석화 몰타르를 쌓은 근세 르네상스 양식인데 영국의 저택을 연상케한다.  지붕은 푸른색을 칠한 양철 즉 함석을 덮었고, 내부는 목조를 사용했다.  특히 창호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사찰의 승방 등에서 사용한 용(用)자 살을 원용했으며 가장자리는 빗살모양으로 살을 짜 넣었다.

  이 문화재 건물은 지난해까지 인천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인천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이 인천시 서국 심곡동에 새 건물을 마련해 이전하면서 기존의 복지관과 문화재 건물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창영감리교회가 운영 관리해 맡아오고 있다.  창영감리교회는 기존에 있던 복지관 건물을 인수해 새롭게 단장하면서 기존의 기독교복지관과 별개의 창영복지관으로 허가를 받아 지난해 6월 개관했다.  이 지역의 복지사업을 창영감리교회가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1905년까지 3채의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여선교사 숙소는 1894년에 준공 됐다.  지상2층, 지하1층에 건평 142평짜리 문화재 건물 옆에는 남자 선교사들의 숙소(현재는 동인천세무서가 들어서 있음) 가 지어졌고, 또 다른 건물은 아펜젤러가 사택 등으로 사용했다.  이 일대에 선교사들을 위한 건물을 짓기 위해 1893년 땅을 매입한 사람은 1892년 인천으로 부임한 내리교회 존스선교사(한국명 조원시)다.  한반도의 선교 베이스캠프가 된 이 곳은 무엇보다도 교통이 원할했다.  시내로 나가기가 비교적 수월한 것도 있었지만

서울로 갈 수가 있는 철도가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었다.  나아가 당시 고종과의 친분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알렌선교사의 별장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도 크게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돼 오던 이 문화재 건물은 1949년 4월 미국감리교 선교사 헬렌보일즈((Helen Boyles:朴一淑)에 의해 '인천기독교사회관'으로 창설되어 사용되다가 한국전쟁중 폐관되었다.  전쟁이 끝난 한참 후인 1959년 5월 다시 스카렛대학 출신 고프(Maude Goff:고명도)가 관장으로 부임하여 건축과 사회관 사업을 재개했다.  아동복지사업과 집단활동사업, 장학사업, 도서실 운영 등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전개해오던 인천기독교사회관은 1970년 미감리교 선교부의 지원으로 260평 신관을 신축했고 1975년에는 '영화유치원'을 인수해 2002년 폐원하기까지 운영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새하얀 스타킹에다. 턱끈으로 고정시킨 노란 모자를 쓰고 복지관 부설  유치원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 곳 창영동 지역 주민 들에게는 또 다른 볼거리였다.  1980년대 다른 지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이었던 이곳 복지관 부설 유치원에 드나드는 학생들은 대부분 부유한 편에 속한 자녀들이었다. 


  1980년 11월에는 인천지역 6개 감리교 사회복지관과 연합하여 사회복지법인 감리교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고 출소자를 위한 상담과 장학사업을  확대했다.  1990년 3월에는 300평의 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을 증축하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선교사들의 한반도 선교의 전진기지 역활과 인천지역 사회복지사업을 활성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선교사들의 열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한국교회의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