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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의 기독교 전래

동방박사님 2016. 11. 1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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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의 기독교 전래

충청도를 선교 구역을 하고 있던 침례교 계통 엘라딩기념선교회가 1901년 철수하면서, 이곳은 각 교파 선교부의 계통 엘라딩기념선교회가 1901년 철수하면, 이곳은 각교파 선교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곧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부간에 이지역을 둘러싼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쉽게 합의를 보지 못한채 충청동에서의 선교사업은 각 교단 선교부의 결정에 맡겨졌다. 북감리교의 공주스테이션 설치 (1903년)와 북장로교 선교사 밀러의  청주 이주(1905년) 는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 졌다. 그런 상황에서 1903년봄 군산 주재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불은 금강을 건너 금강을 건너 이미 자신들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충남의 서천과 한산의 신자집단을 방문하였다. 불의 보고를 통해서 그곳에 자신들과 관련된 기독교 공동체가 있음을 확인한 남장로교선교부는 1903년 9월의 연례모임에서 충청도의 순회사역자로 불을 임명 하였다.


또 1904년 남장로교 선교부는 그해9월에 열린 연례회의 에서 군산스테이션의 담당구역으로 충남지방을 추가 배정하는 한편 충남의 선교와 관련된 스테드맨 또는 (미국의 북 침례교회와 협상할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으로 불과 해리슨 그리고 전킨 선교사를 지명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남장로교의 선교가 충남으로 확대되고 있었으며 또 스테드맨 철수이후 그의 지도를 받고 있었던 칠산 (침례)교회의 구성원들이 불에계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해 온 데 따른 것 이었다.


드디어 불은 1905년 7월에 칠산 (침례)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던 왕골 (초왕, 현 부여군 양화면 오량교회)의 교인 51명에게 세례를 주면서, 이들은 남장로교 선교부의 새로운 모임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무렵 남장로교 선교부역시 충남지역으로 진출을 공식화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충남은 미 감리회와 북장로교 그리고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이 동시에 활동하는 지역이 된 것이다.


그들의 활약으로 충청지역에는 스테이션이 세워진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미감리회는 공주와 청주 홍주,천안 충주지역등 충청도의 많은 지역에서 발빠르게 움직였다. 북장로교 역시 청주를 중심으로 보은 .괴산. 영동. 조치원 옥산에서 자신들의 세(勢)를 확산시켜 나갔다.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의  발길은 금강을 출발하여 멀리 안면도에 까지 미치고 있었다. 당연히 선교지역이 중복 되었다.


한 도시에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나란히 세워졌다.특히 충북지역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거의 혼재되어 있었다. 남장로교와 미 감리회의 경우도 강경-부여-임천-남포를 경계로 충남의 서남부 지역에 대치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북장로교와 평안도 황해도에 대한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마친 북감리교는 1907년 남장로교 선교부와도 분할협정을 체결했다. 1907년 9월5일 열린 남장로교선교부연레회의 에서는 선교지 분할과 관련하여 스웨어러 (북감리교)와 전킨(남장로교)이 동의한 '연합공의회 실행위원회 회의록"이 낭독 되었다.


1907년 9월5일 열린 남장로교 선교부연례회의에서는 선교지 분할과 관련하여 스웨어러 (북감리교)와 전킨(남장로교)이 동의한 "연합공의회 실행위원회 회의록이" 이 낭독되었다. 그,내용은 군산과 공주사이의 오천.보령, 남포, 홍산, 비인,서천, 한산,임천, 그리고 안면도는 남장로교가 맡고 그이북 지역 모두는 북감리교가 담당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남장로교의 충남선교는 스테드맨의 철수이후 이 지역의 주도적인 선교부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금강을 따라 진출한 군산 스테이션의 활동이 누적된 결과, 결국 이곳이 그들의 선교지역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감리회 역시 충남 서남부 지역에 대한 남장로교 선교부의 기득권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당한 진통을 겪었던 충북지역의 분할 협정과는 다른 양상 이었다.

1907년 현재 이 지역에는 총 16개의 신자 집단이 남장로교 선교사 불의 목회적 관심을 받으며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