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6.대전.충남

충남병천 매봉교회와 3.1운동

동방박사님 2019. 3. 26.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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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교회와 3.1운동

천안 병천(아우내)의 만세운동은 목천군 이동면 용두리교회의 존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아우내의 3.1운동을 매봉교회 (용두리교회의 새이름)의 독립운동 으로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 이다. 감리교선교사 스웨어러 (서원보)는 1899년 3월 경기도 이천에서 한 남자와 그 가족에게 세레를 주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천 덕들교회의 박해숙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도활동의 결과로 1901년경 목천과 진천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니까 천안은 천안읍(1915년)보다 그주변에 복음이 먼저 전래된 것이다. 이 때 목천의 교회는 사자골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얼마뒤에 드곳에서 몇 리 떨어진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후에 용두리로 바뀜)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지령리교회는 1907년 8월 '대지령야소교당"의 이름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가 하였는데, 그때 동참한 교인이 82명에 달했다.그런데 당시 지령리교회가 있던 목천군 일대는 의병운동이 성했던 곳이다. 당시 신문들은 그곳에서 몇차례 있었던 일본군 수비대와 의병의 충돌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1907년 11월 일본군은 목천의 사자골교회 신자 3명을 총살한데 이어, 지령리교회당에 불을 질러 건물을 전소 시켰다. 이것은 지령리교회의 상당수 교인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만큼 항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대한 일본군의 보복으로 보인다. 지령리교회는 항일운동이라는 지역의 정서와 문명개화라고 하는 시대의 흐름이 잘 녹아있던 정신적인 공동체였다.

그리고 지령리교회의 이같은 흐름은 교회의 재건을 통해서 계승되고 있다. 예배당이 불에 타면서 해산됐던 교회를 1908년 다시 재건한 주역들은 내내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했던 지령리교인들 이었다. 유관순의 일가 였던 유빈기와 숙부 유중무는 케이블(기이부) 선교사의 지원을 얻어 지령리교회를 다시세웠다. 3.1운동당시 용두리(1914년 지령리에서 행정구역 변경)교회의 속장이었던 조인원도 이때부터 교회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조인원은 자신의 사랑채를 사경회 장소로 개방하고, 케이블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아들 조병옥을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시켰다.  또 유빈기가 매서인으로 떠난후 용두리교회의 지방사역자로 활약했던 유중무의 조카 유우석과 유관순의 각각 공주 영명학교와 이화학당의 학생이 되었다.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은 이미 1907년 국채보상의연금 납부자의 일원 이었다. 그리 1919년 유중무와 조인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용두리교회는 독립만세운동의 격랑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