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10.목포.전남

목포 근대역사기념관 (목포일본영사관)

동방박사님 2018. 8. 1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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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근대역사기념관 (목포일본영사관)

1900년 12월 건립되어 1906년 1월까지 일본영사관으로 사용된 곳

1897년 10월1일 목포가 개항되자 주한일본공사는 일본인 보호라는 명분 아래 1897년 10월26일 목포일본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개항초 일본영사관은 목포만호청사를 빌려 사용하였다. 개항초 일본영사관은 목포만호청사를 빌려 사용하였다.이후 몇 차례 이전을 거친뒤 지금의 영사관 부지를 확보하여 1900년 1월 건축을 시작, 그해 12월 완공하였다. 1906년 1월31일 이사청이 설치됨에 따라 폐쇄되었고, 1906년 2월 부터 목포이사청, 1914년 1월부터 목포부청으로 사용되었다. 해방이후 1947년부터 1974년까지 목포시청사로 사용되었다가 현재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목포 근대역사기념관 (구 목포일본영사관)

190012월 건립되어 19061월까지 일본영사관으로 사용된 곳

1897101일 목포가 개항되자 주한일본공사는 일본인 보호라는 명분 아래 18971026일 목포일본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개항초 일본영사관은 목포만호청사를 빌려 사용하였다. 개항초 일본영사관은 목포만호청사를 빌려 사용하였다.이후 몇 차례 이전을 거친뒤 지금의 영사관 부지를 확보하여 19001월 건축을 시작, 그해 12월 완공하였다. 1906131일 이사청이 설치됨에 따라 폐쇄되었고, 19062월 부터 목포이사청, 19141월부터 목포부청으로 사용되었다. 해방이후 1947년부터 1974년까지 목포시청사로 사용되었다가 현재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개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진출하려는 세계 각국은 우리나라 곳곳에 자국의 영사관을 세웠다. 개항장에 서구열강이 앞 다투어 영사관을 세운 것은 자국민의 보호를 위한 것보다는 한국 내에의 자국의 입지를 굳히고 세계각처에서 대립관계에 있던 국가와의 사이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개항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영사관를 설치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이 이처럼 영사관 건축에 공을 들인 이유는 영사관을 우리나라 침탈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였다. 이는 을사늑약이후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일본 영사관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대부분 이사청이 되었다. 이사청은 외교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일본의 행정관청으로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구이다.

목포일본영사관은 개항기 일본이 우리나라에 세운 영사관 건물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하는 건물로 목포는 몰론 국내에서도 주목할 만한 건축물이다. 목포영사관은 당초 한옥, 바로크건축물응 전전하다가 지난 1990년이 돼서야 현재의 건물을 지어 자리를 잡았다.

일제가 목포영사관을 세우던시기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우리나라에서 그들의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던 시기였다. 또한 인천과 서울을 비롯한 여러곳에 영사관을 세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건물은 이전에 세워진 영사관에 비해 상당히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장식이 필요한 곳에는 흰색벽돌을 사용하여 미적효과를 도모했다. 입면상의 변화를 위해 1층 창문상부에는 결원아치를 2층에는 반원아치를 틀었다.

목포영사관의 또 다른 특징은 정문 외부 진입로이다. 정문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직선도로가 아닌 아자형으로 만든 도로를 따라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