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2.부산시 관광

부산 영도대교 & 광복동선교사기념비

동방박사님 2019. 6. 2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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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도개시간  14;00~14;15 (15분)

영도다리는 다리가 아니다.

6.25전쟁 전후 영도다리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장소이다.

살기위해 남족 피난지로 몰려왔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만남과 희망의 장소가 된 영도대교는 도개기능을 멈춘 지 47년만인 2013년, 다시 다리를  들어 올릴수 있게 되었다.


부산의 개관

부산지역의 문화는 오륙도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 남부의 온화한 기후와 동남방으로 펼쳐진 광활한 바다와 영남지방을 관통하여 흐르는 낙동강하구라는 자연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다. 남방의 따뜻한 기후는 안온한 풍속을 만들고, 드넓은 바다는 탁 트인 느낌을 주면서 양질의 해산물을 제공하였다. 또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의 연안 각 지역의 인구와 물산이 몰려드는 풍성한 도회를 만들었다.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부산은 바다 건너 일본과 대립 융합되는 문화와 접점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교역과 국방상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내륙의 여타 지역과는 다른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평화 시에는 외국의 색다른 문물과 접촉하여 교역하는 개방 공간으로, 바다 건너 일본과 대립 융합되는 문화의 접점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교역과 국방상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내륙의 여타 지역과는 다른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평화 시에는 외국의 색다른 문물롸 접촉하며 교역하는 개방 공간으로, 바다건너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될 때에는 외침에 대비하는 최전방 요새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은 부산의 문화 전통을 내륙의 어는 다른 지역과 구별하게 하였던 중요한 요소들이다.

부산이란 지명은 부산포에서 유래된 것이다. 15세기 후반 지금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의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솥 (釜)과 같다고 해서 부산(釜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부산포는 당시 독립된 지방행정구역 단위가 아니라 동래현 속현 (지방관 이 파견되지 않은 현)이었던 동평현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구 후에는 동래도호부의 구역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부산은 나라의 관문으로 국방상 요충지였다. 즉 부산의 진산(鎭山) 금정산의 산성은 그 규모로 볼떼 국내에서 가장크며, 지금의 부산 수영동에는 경상 좌수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남지방 해양군사거점으로서의 경상좌수영이 다대진에서 울진에 이르는 동남연변의 수군을 통솔하였다. 부산포의 왜관은 조선전기의 부산포왜관 (현 수정시장 일대)을 거쳐 조선후기 초량왜관(현 용두산과 복병산일대)으로 이어져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부산이 개항될때 까지 지속되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1877년 1월 동래부사와 <부산구조계조약 釜山邱租界條約>을 체결하여 일본인의 부산내왕과 통상, 토지임차권, 가옥건축권 등을 확보하였다.이른바 침략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또 조선정부는 그 후속 조치로 1890년대 부산의 감리서 (현 봉래초등학교 자리)를 두어 외교, 통상,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싸. 이어서 1883년 영국이 부산에 영사관을 개설한데 이어 1884년에는 청나라가 초량에 영사관과 청관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관의 토지와 가옥은 일본 영사관에서 접수하였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게된 일본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인 1906년 부산에 이사청 (理事廳)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부산의 초량왜관 11만평은 모두 '부산일본제국전관(專管)거류지"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초량왜관 시절의 제한조치들이 폐지 되면서 부산일본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가 정비되고 시설들이 신속하게 정비되었다. 그리하여 개항이전 중심이었던 동래와 구별되는 일본인 주도의 식민도시가 형성되었다.
















옛 부산항 터, 선교사 기착지

아폔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선교를 위해 1885년 4월5일 오후 3시 인천 제물포에 발을 디디기 3일 전인 1885년 4월2일에 부산에 내려 하루를 묵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이들의 부산입항은 인천입항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부산이 도착지가 아니고 거쳐가는 기착지였기 때문이다. 부산 선교사 기착표지석은 2013년 3월29일 부산남퐁역 인근 광복동 쉼터에 부산기독교 총연합회와 부산 중구청이 공동으로 세웠다.

가로세로 각각 70cm. 55cm 표지석 앞면에는 "기독교선교사, 이곳에 첫발을 딛다"라는 문구와 함께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3명의 선교사 사진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그 현장의 역사적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알렌(1884년 9월14일)의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1885년 4월2일)등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딘 기착지이다. 1890년대 초부터 부산에 정착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한국의 개화와 근대화가 계기가 되었다.선교사들은  교회설립 뿐만 아니라 근대학교, 고아원, 서구식 병원을 설립하였고, 자선과 구호 활동을 통해 그리스동의 사랑을 실천 하였다. 또 민족독립운동, 사회개혁, 여성교육  등 여러영역에서도 지역 발전에 기여 하였고, 근대문명돠 민주적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