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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대 한국순교자 박물관 / 전시관 박해일지

동방박사님 2019. 7. 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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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대 순교자박물관

1982년 개관한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은 소장품으로 볼 때 가히 한국 최고의 순교자기념관이라 할만 하다.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에 예수상이 순례자를 반기며 서 있고 그 너머로 기념관과 성당 그리고 그 뒤로 야트막한 산비탈에 우거진 수풀이 시원하다. 하얀색의 낮은 건물에는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이라는 명패와 함께 " 순교자의 후손은 살아 있다." 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기념관에 이어진 성당 앞에는 작은배 하나가 눈에 띄는데 " 라파엘호"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배는 김대건 신부가 가제품을 받고 페레올 고 신부, 다블뤼 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서 제주도로 표류 끝에 강경 황산포에 상륙한 재를 본따 만든 모형이다.

그 옆에는 맷돌같이 구멍이 뚤려 있는 돌 형구가 있는데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 들의 학살로 민심이 동요되자 정치적으로 불안을 느낀 대원군의 '소리없이 죽이는 기계'를 만들라는 명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성당을 왼편에 끼고 돌아가면  십자가의 길과 로사리오의 길이 나타나고 그 위쪽으로 동래출신 8명의 순교자 무덤이 깨끗하게 정돈돼 있다. 80여 세의 노구로 사형의 험한 험한꼴을 당한 이정식(요한), 그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 이관복의 처 박소사(마리아)등 일가를 포함한 8명의 순교자가는 벼인박해의 서슬 아래 1868년 6월 부산 수영장대 (현 부산 광안동 수영중학교 뒤)에서 군문 효수의 극형을 받았다.

이들 8명 중 이정식의 가족 4명의 무덤이 본시 부산 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 가르멜 수녀원 뒷산 등에 묻혀 있었다가 1977년 9월19일 현재의 한국 순교자 기념관 뒷동산으로 이장 되었고 다만 나머지 4명의 무덤은 아직 찿지 못해 기념비만 세워두고 있다. 오륜대에는 바로 이들의 순교를 기념해 그 1백주년 되는 해인 1968년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분원이 설치 됐고 순교 복자 기념관 및 기념성당이 아울로 건립되었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실에는 1층에 순교자 유물과 자료가 보관돼 있고 2층에는 성모 성년 특별 전시실, 선교 200주년 기념실, 민속 자료실이 설치 돼 있고 3층에는 김인순(루갈다) 기증품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김대건 신부의 유품 중에는  무덤을 덮었던 횡대와 친필 서간 등이 있고, 다산 정약용(세례자 요한), 성 장 시메온 주교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십자가 등도 눈에 띈다. 또 한 면에는 소학, 다른 면에는 교리를 적어 둔 순교자 윤봉문의 위장 교리서 등 희귀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소장 되어 있다.성모 성년 특별 전시실에는 수십 수백의 성모상이 눈길을 끄는데 이중에는 필리핀의 수백 년 된 성모상에서부터 강화도 무명순교자 무덤에서 발굴된 성모상과 일본의 "마리아 관음상"등 독특한 성모상들이 다수 있어 이채롭다. 또 2층과 3층에는 왕실 관계 의상과 장신구 그리고 민속 자료등이 풍부하게 전시돼 있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 이벽 세레자 요한

이벽 (1754-1785) 세례자 요한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이다. 1777년 (정조1년 무렵부터 정약전.약용 형제와 함께 천진암(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강학에 참가하여 하늘, 세상, 인성(人性)에 대해 토론 하였다. 또한 옛 성현들의 윤리서 등을 함께 검토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이 지은 한역판(漢譯版)철학, 수학, 종교서적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천주교서적을 읽고 스스로 교리를 이해한 뒤, 녹암계의 학자들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벽은 경기도 광주를 떠나 한양의 수표됴 (현 서울 중구 수표동)인근으로 이주해 살면서, 서양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북경교회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그러던중  1783년 말, 이승훈이 동지사 冬至使 의 서장관 書狀官

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을 찿아가 '선교사들에게 기도문과 서적들을 구해오고 영세를 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한 즉시 북당으로 선교사들을 방문하였고, 이듬해 1784년 봄,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의 귀국과 동시에 교회 창설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때 이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천주교서적들을 읽으면서 그 교리가 진리이며,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784년 겨울, 이벽의 집으로 이승훈, 권일신, 정약전, 약용형제가 모였는데 이승훈은 북경선교사들에게서 배운대로 동료들에게 세례를 배풀었다. 이 최초의 세레식이 바로 "천주교의 창설'이다. 그 후 김범우는 명례방 (현 명동성당 부근)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집회장소로 제공하여 초기의 신앙공동체는 수표교에서 명레방으로 이전되었다.

을사년(1785)봄, 명례방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때 형조들의 금리들이 우연히 그 집회장소를 수색하게 되어 모여있던 신자들이 모두 형조로 압송되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범우는 밀양단장으로  유배되고, 이승훈돠 이벽은 집안 식구들에 의해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벽의 부친은 이벽이 스스로 신앙을 버리도록 하기위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지만,이벽은 집안에서 연금생활을하다가 그의나이 만31세에 숨을 거두 었다. 

 

 

 

 

 

 

 

 

 

이벽의 친필

 

 

다산 정약용의 친필서간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이 1818년 강진 유배시 저술한 서적 총48권 16책 지방 관리들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폭정을 비판하고 있다. 다산의 애민정신과 서학사상이 잘 절충되어 당시 사회, 경제,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 요한

정약용(1762~1836) 요한은 한국천주교회 창설의 주역가운데 한 사람이며 대 실학자이다

 

다산 정약용의 십자가

정약용 요한은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한 사람이며 대 실학자이다. 신유박해로 인하여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그 후 1836년에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 이 십자가는 마재의 다산의 묘에서 발굴되어 4대손 정 바오로가 기증 하였다.

여유당전서

다산 정약용의 시 모음집

신해박해 辛亥迫害 1791년

 

 

 

권철신 친필

홍유한에게 보낸 친필서간

 

권일신의 십자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아 (1781~1792)는 한국천주교회 창설을 주도한 실학자로 1791년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고민을 받고 예산으로 유배 가는길에서 순교하였다.

 

 

 

복자 이순이 누갈다의 옥중서간

복자 이순이 누갈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숲 정이서 순교하기전에 옥중에서 어머나 권씨와 언니 올케 등에게 보낸 편지이다. 2014년 8월16일 복자품에 올랐다. 평소몸에 지였던 복자 이순이의 십자가.

 

황사성 백서 帛書 (복제)

황사영 알렉시오가 충북 배론의 토굴에서 작성한 것으로 1801년 당시 천주교회 박해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 문서이다.가로 62cm 세로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쓴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장문이다. 

 

 

 

 

 

 

 

성녀 허계임 막달리나의 횡대 

 

순교자의 관 뚜겅 

 

 

 

 

 

 

 

 

기해박해 순교자의 묵주

기해박해 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의 묘에서 발굴된 묵자

 

 

미리내 교우촌 순교자 십자가

미리내 교우촌에서 살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조상들의 십자가를 후소들이 간직하여 오다가 기증하였다.

 

 

 

 

 

 

 

 

 

 

 

 

새남터의 모래와 돌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노들" 혹은 사남기 沙南基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 주로 주교와 신부들이 처형된 순교지이다.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친필서한

(1842~1845)

 

 

현종대왕실록

"임금께서 사학죄인 김대건을 효수하도록 명을 내리셨다. 대건은 용인사람으로, 나이15세에 광동으로 가서 서양학문을 배웠다.계묘년에 현석문 무리와 결탁하여 몰래돌아와 서울에서 교주가 되었다. 봄에 해서지방으로 가서 어부를 만나 중국 배로 편지를 부치려 하다가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현정 권13,12년 병년8월

 

 

 

 

 

 

 

 

 

은이.골배마실 교우촌의 기해박해 순교자들 십자가.

기해박해 때 순교한 조상들의 십자가를 은이 교우촌의 후손들이 간직하여 오다가 이곳 출신 박의회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통하여 기증하였다. 은이 마을과 이웃한 골배마실은 솔뫼에서 이사온 소년 김대선이 15세 때 마카오로 떠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김대건 신부가 서서품울 받고 귀국한 뒤 첫 사목지로 공소公所를 차린 곳이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를 비롯한 6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정의배, 우세필 등의 순교와 순교 후의 시신매장에 대한 증언록이다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