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천주교성지 (2016~) (여행)/4.대구.부산 (대구관구)

오륜대 순교자박물관

동방박사님 2019. 7. 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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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대 순교자박물관

1982년 개관한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은 소장품으로 볼 때 가히 한국 최고의 순교자기념관이라 할만 하다.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에 예수상이 순례자를 반기며 서 있고 그 너머로 기념관과 성당 그리고 그 뒤로 야트막한 산비탈에 우거진 수풀이 시원하다. 하얀색의 낮은 건물에는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이라는 명패와 함께 " 순교자의 후손은 살아 있다." 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기념관에 이어진 성당 앞에는 작은배 하나가 눈에 띄는데 " 라파엘호"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배는 김대건 신부가 가제품을 받고 페레올 고 신부, 다블뤼 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서 제주도로 표류 끝에 강경 황산포에 상륙한 재를 본따 만든 모형이다.

그 옆에는 맷돌같이 구멍이 뚤려 있는 돌 형구가 있는데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 들의 학살로 민심이 동요되자 정치적으로 불안을 느낀 대원군의 '소리없이 죽이는 기계'를 만들라는 명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성당을 왼편에 끼고 돌아가면  십자가의 길과 로사리오의 길이 나타나고 그 위쪽으로 동래출신 8명의 순교자 무덤이 깨끗하게 정돈돼 있다. 80여 세의 노구로 사형의 험한 험한꼴을 당한 이정식(요한), 그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 이관복의 처 박소사(마리아)등 일가를 포함한 8명의 순교자가는 벼인박해의 서슬 아래 1868년 6월 부산 수영장대 (현 부산 광안동 수영중학교 뒤)에서 군문 효수의 극형을 받았다.

이들 8명 중 이정식의 가족 4명의 무덤이 본시 부산 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 가르멜 수녀원 뒷산 등에 묻혀 있었다가 1977년 9월19일 현재의 한국 순교자 기념관 뒷동산으로 이장 되었고 다만 나머지 4명의 무덤은 아직 찿지 못해 기념비만 세워두고 있다. 오륜대에는 바로 이들의 순교를 기념해 그 1백주년 되는 해인 1968년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분원이 설치 됐고 순교 복자 기념관 및 기념성당이 아울로 건립되었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실에는 1층에 순교자 유물과 자료가 보관돼 있고 2층에는 성모 성년 특별 전시실, 선교 200주년 기념실, 민속 자료실이 설치 돼 있고 3층에는 김인순(루갈다) 기증품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김대건 신부의 유품 중에는  무덤을 덮었던 횡대와 친필 서간 등이 있고, 다산 정약용(세례자 요한), 성 장 시메온 주교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십자가 등도 눈에 띈다. 또 한 면에는 소학, 다른 면에는 교리를 적어 둔 순교자 윤봉문의 위장 교리서 등 희귀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소장 되어 있다.성모 성년 특별 전시실에는 수십 수백의 성모상이 눈길을 끄는데 이중에는 필리핀의 수백 년 된 성모상에서부터 강화도 무명순교자 무덤에서 발굴된 성모상과 일본의 "마리아 관음상"등 독특한 성모상들이 다수 있어 이채롭다. 또 2층과 3층에는 왕실 관계 의상과 장신구 그리고 민속 자료등이 풍부하게 전시돼 있기도 하다.

 

 

 

 

 

 

 

 

 

장대돌

동래 순교자 여덟 분은 무진박해 중 1868년 수영장대에서 당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구주원에 의해 군문효수형이 집행되어 요감히 순교하였다. 여기 이돌은 수영장대에 흩어져 있던 돌이다. 

 

 

 

 

 

 

 

부산교구 순교자들의 무덤해설

1866년 병인박해에 이어 1868년 무진년 동래지역에서 일어난 박해로 8월4일 (양력 9월20일) 수영장대에서 이정식 요한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이정식의 대자였던 양재현 마르티노를 비롯하여 함께 옥에 같혔던 여덟 분의 신자들이 군무효수의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후 명장동 (동래구명장동 산96번지)에 묻혀있던 이정식 요한 회장의 가족 네 분의 무덤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 며느리 박조이 마리아, 조카 이관복 베드로만이 조사 확인되어, 1977년 9월19일 이곳에 오륜대로 이장하여 "부산순교자묘소"로 꾸몄다. 현재에는 네 분의 무덤 외에 다른 네 분의 무덤(옥소사발바라, 서울생원 이삼근 야고보, 차창득 프란치스코,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이  가묘로 단장되어 있으며, 특히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는 "윤지충과 하느님의 종 123위"  에 포함되어 2014년 8월에 광화문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으로 오르게 되었다,

(자료출처 : 1868년 8울4일 작성된 일성록을 원  자료로 하고 1895년의 치명일기(致命日記)를  부자료로 하였다.

 

 

 

 

 

 

 

 

 

 

 

 

 

 

 

 

 

 

성 남종삼 요한

1817~1866.3.7 서소문 밖에서 순교

 

 

 

 

 

병인박해 순교자 최종구의 십자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최종구(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최선옥 수녀의 고조부)의 십자가로, 아들 최낙현이 간직하다가 3대손 최윤길에게 물려 주었는데 부인 이제학 안나가 196년에 기증 하였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

 

조선 선교사로 선발된 이들은 1864년 7월15일 파리를 떠나 홍콩과 상해를 거쳐 11월 요동의 차쿠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5월 27일 추청도 내포지역에 상륙한 후 여러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앞줄 왼쪽이 도리 신부이고, 뒷중 왼쪽부터 위앵, 볼리외 브르티니에르 신부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1868년에 복자품에, 1984년에 성인반열에 올랐다.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프랑스 로즈 제독이 조선조정에 보낸 회답문

 

순무영에서 보낸 격문에 대해 로즈제독이 조선 조정에 보낸 회답문이다. 프랑스선교사 처형 책임자에 대한 엄중처벌과 조약을 맺기위한 전군대사파견 등 두가지 요구조건을 달고 있다.

(박병건 저 "1866년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 참고)

 

 

격문의 프랑스어 번역문 /  병인양요 관련 영자신문기사

 

 

리델 주교와 조선인 신자

1866년 병인박해로 리델주교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탈출할 때 동행했던 조선인 신자들이다. 1866년 8월23일 상해에서 찍은 사진으로 상투를 틀고 있는 리텔 주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리델 주교 옥중수기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리텔주교가 1877년 9월 조선에 재입국 한 후, 이듬해 1월28일 체포되어 5개월 동안의 옥중생활과 심문내용 등을 자세히 기록한 수기이다.

북경주재 프랑스공사의 교섭으로 옥에서 풀려나 (6월5일0만주로 추방되었다ㅣ (7월12일) 그후 프랑스로 돌아가 1884년 6월20일 54세로 선종하였다.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설립자 소개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을 설립한 윤병현 (1912~2003) 안드레아 수녀는 1946년 한국의 방인수녀회 설립계획을 가지고 있던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와 조우로 경기도 개성에서 시작되었고, 공동설립자 윤병헌 안드레아 수녀는 1950년 서울용산구 청파동으로 본원을 옯기면서 전교와 께 한국전쟁으로 사라져가던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회원들에게 일깨우고 특히 여성교육에 앞장서서 여성의 개화와 교육에 평생 투신하였다.

수도자 양성과정에서도 항상 깨어있는 여성, 모성애를 지닌 여성을 강조하고 남다른 열정으로 교육하였다.

설립자 윤병현 안드레아수녀는 시대를 앞서 진쥐적이고 창의적인 예술성을 지닌 적극적인 삶의 소유자로 수도생활중 순교정신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인人,사事,물物을 기쁘게 대하는 명랑성과 미소봉사, 미소치명의 모범으로 수도회를 공동설립한 마뗄(어머니)로써 많은 존경을 받았다. 또  한국교회 문화유산 뿐 아니라 한국 고유의 문화유산 보존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순교자 헌양을 위한"오륜대 한국순교자 기념관 (2009.3.2.박물관등록)을 건립하여 사회 문화교육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기도하는 성지 "오륜대" 를 회고하며

 

부산 땅을 처음 밟게 된 것은 6.25동란 때이다. 피난 내려와서 서공석세레자 요한 신부님의 어릴적 본가에 머물면서 그날그날 빌려주신 손미싱으로 바느질품을 팔아 다섯 명의 초창기 회원이 단칸방에서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그때 통영 (현재 충무)본당 박동준 마티아 신부님의 부탁으로 고등양재학원과 성모유치원을 시작하여 성황을 이루엇고 충무여고에도 수녀를 파견하였다. 1957년 부산교구가 설립되면서 주교관과 대양중고등학교와 테레사여중고에 수녀를 파견하였다. 마침 우리가 수집하고 있던 순교자유물이 아직 트렁크에 보관되고 있을 때 대양학교에서 전시회를 하도록 부탁해 왔다. 쁘로마뗄과 둘이서 자료를 기차에 싣고 내려와 교실 다섯개에 전시하여 관람자를 감탄케 하였다. 또한  청학동 자치분원에서 운영하는 복자유치원에서도 전시회를 열어 신부님들의 관심과 격려를 받았다. 1968년 병인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절두산에 순교자기념관이 생기는 것을 게기로 이 유물들을 부산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가을 하였다. 몇해 동안 오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