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1.서울시 관광

우표박물관

동방박사님 2020. 11. 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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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의 탄생

세계 최초의 우표는 1840년 5월 6일 영국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교육자이자 개혁가인 '로랜드 힐 셔 1795~1879)의 제안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우표는 받는 사람이 우편요금을 지불하도록 되어 있는 종전의 불편한 점을 개선하고자 만들어진 것입니다. 영국의 국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을 감은 최초의 우표는 액면이 1 페니인 흑색과 2펜스인 청색 우표가 두 가지로 발행되었으며 각각 페니 블랙과 팬스 블루라는 애칭으로 불립니다.

 

최초의 우표 - 세계 최초의 우편봉투

세계 최초의 우표는 액면 가격이 1페니인 흑표 우표와 2펜스인 청색 우표 두 가지로 1840년 영국에서 발행되었으며, 각각 페니 블랙과 펜스 블루라는 애칭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같은시기에 우편요금을 미리 표시한 우편봉투도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요금은 1 페니였고, 봉투의 그림을 도안한 화가 윌리엄  멀 레디의 이름을 따서 "멀 레디 봉투'라고 불립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우리나라의 근대식 우편제도는 1884년 11월에 우정총국의 개설과 함께 홍영식 (1855~1884)선생에 의해 시작되었다. 우편에 사용할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5종을 발행하기로 하고 그 제작은 일본 회사에 맡겼으며, 그중에서 먼저 인수한 5문짜리와 10문짜리 우표를 11월 18일에 한성-인천 간 우편 업무에 최초로 사용하였습니다.

 

20여 일의 단명에 그친 한국 최초 우표 

1884년 11월 18일 우정총국 사업개시와 함께 한성(서울) ~인천 간에 한국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가 붙은 우편물의 송달이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같은 해 12월8일 왕명으로 우정국이 혁파 (革罷)  될 때까지 20여 일간 우편업무가 실시되었으나, 짧은 기간 동안 우표를 붙여 송달된 우편물이 얼마나 되었는지 현재까지 단서가 될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편 사업을 시작하니 17일째 되는 1884년 12월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개화파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이상재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여기에 가담자는 몰론 개화당 일파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다. 따라서 이에 연루된 사람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근거를 없애기 위하여 오간 서신 등 물증이 될만한 것은 철저히 없앴거나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당시의 우편 자료가 될 만한 물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1880년대에 조선의 사회계층의 구조로 보아 우편을 이용할 만한 사람은 거의가 지식층에 속하는 양반 계급의 지체 높은 사람들일 것인데, 이들의 서찰은 예외없이 하인을 시켜 직접 전달하는 것이 양반의 체통이고 예의라고 여기던 시기인지라 우편에 의한 서신(체송 된 우편물)의 왕래가 거의 없었으리라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다만 문위 우표의 실체 우편물이 주한 외국인 9선교사 등)이나 외국의 우편 수집가가 재한 외국인에게 부탁하여 이들에 체송 되었거나 수집용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어딘가에 숨어 있을 실제 봉투가 발견된다면 세계적인 희귀품일 뿐 아니라 우편사 연구에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발행된 문위 우표는 1884년 11월 18일 우정사업이 개시되고 동년 12월 4일 갑신정변의 실패로 모처럼 이룩한 신식 우편사업 제도가 왕명에 의하여 1884년 12월 8일 폐지됨으로써 한국 최초로 발행되었던 문위우표는 불과 20여 일 만에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우정총국 개국과 동시에 판매할 예정으로 5종의 우표를 일본 정부에 발주하였으나, 우정총국 개국일인 1884년 11월 18일까지 5문과 10문의 2종만 도착되고, 나머지 3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이  폐쇄 (1884年12月8日) 될 때까지 도착이 안되어 (1885年3月3日납품) 사용하지 못하고 미 발행에 그치고 말았다.

 

어극 40주년 (御極40周年) 기념우표

구한국의 유일한 기념우표는 조선조 26대 고종황제의 어극40년과 망 6 순(望6旬) 51세에서 60세를 바라본다는 뜻 0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우표와 기념 메달 제작을 비롯하여 기념비 건립 제막식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돌림병 (호열자/콜레라)의 유행으로 기념 축하 행사를 다음 해인 1903년 4월 30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기념우표만은 예정대로 1902년 10월 18일에 발행되었다.

 

도안은 우표 중앙에 왕관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4 귀퉁이에 이화(李花)를 그려놓고 그 주위에 '大皇帝 陛下御極40李慶祝, (대황제 폐하어 극 40계 경축)이라고 적었으며 아래쪽에는 불어로 'XL ANN. JUBILE' 'D, AVENEMAN'라고 표기하였고, 우표의 상단에 한자로 大韓帝國郵票 (대한제국 우표)를 하단에 불어로 'POSTES DE COREE,를 표기하였다.

 

도안 작성은 서울 용산에 있던  전환 인쇄국에 근무한 일본 기술자에 의하여 그려졌고 인쇄 원판은 일본 정부 인쇄국에 근무한 일본기술자에 의하여 그려졋고 인쇄원판은 일본정부인쇄국에 제조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전지 구성은 가로 5 매 X 세로 10매로 50 매이다. 액면은 국내 서장 요금인 3천이며 인쇄판 식은 철판 (요판)으로 투문이 없는 백지이다.

 

이화 (李花) 보통우표

이화 보통우표는 한국 최초로 국내에서 인쇄한 우표로 1900년 1월 1일 대한제국이 UPU에 가입함으로써 국제 간 우편물 교류가 개시됨에 따라 다양한 요금의 우표가 필요하게 되어 발행한 우표이다.

이 우표는 1900년 1월부터 1901년 3월 15일 6월까지 액면별로 2리(厘)부터 2원(圓)까지 13종 발행하는데 이어 1901년 3월 15일, 2전 우표의 도안을 수정하여 추가로 발행함으로써 총 14종이 발행되었다.

도안은 백송(白松) 지창한 (池昌翰)의 원도로 태극과 이화 (李花)를 기본으로 항 상단에 한문으로 '大韓帝國郵票,라고 쓴 밑에 영문으로 'IMPERIAL KOREA POST'라고 쓰여 있다. 이와 같이 우표 도안에 한문과 한글 그리고 영문을 표기한 위치에는 우표의 도안 구성 등이 조금씩 다르다. 이우 표는 도안에 섬세하고 액면이 다양하며 인쇄의 선명도 등은 지금까지 발행된 어떤 우표보다 훌륭한 우표가 평가되고 있다.

 

인쇄는 농상공부가 1896년 (건양 원년) 2월 2일 우표와 수입인지를 인쇄할 목적으로 독일에서 석판인쇄 시설을 구입비 5,000원에 계약하고 2년 후인 1898년 상해를 경유하여 수입함과 동시에 일본에서 조각사와 제판 기술자 및 인쇄공을 초빙하여 인쇄기를 운영케 하였다.

 

이화 보통우표의 인쇄 초기에는 지폐 등을 인쇄하던 '대한제국 농상공부' 인쇄국에서 하다가 후기에는 '대한제국 전환구'에서 하였다. 이것은 직계 개편으로 정부의 인쇄처가 '대한제국 농상공부, 에서 '대한제국 전환국'

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전 우표가 두 종류 된 사유는 처음 발행된 우표 (태극 중앙 2전 0의 태극문양이 거꾸로 된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이를 수정하여 다시 발행하였기 때문이다.

 

우정총국에서 포스트타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