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한반도평화 연구 (책소개)/5.한국전쟁 6.25

1950 미중전쟁

동방박사님 2021. 12. 1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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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첨예한 대립은 1950년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
비주얼북으로 만나는 화제의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


오늘날 세계 패권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그 전초전은 바로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관점으로 각국의 이해관계와 속셈, 판단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2020년 7월,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아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은 거대한 국제적 힘의 충돌이라는 새로운 접근과 최첨단 3D 기술을 활용한 실감 나는 전투 장면 등으로 호평받았다. 원작 다큐멘터리의 그 몰입감과 현장감을 고스란히 되살린 비주얼북 《1950 미중전쟁》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화면 전환이 되는 듯하도록 구성되었고, 시각 요소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변화무쌍한 배치로 리드미컬한 흐름을 자아내어 단숨에 끝까지 읽게 만든다.

책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각국 핵심 의사결정자들의 오산과 오판이다. 전쟁 개시부터 참전, 전투 등 의사결정 과정에서 상대의 수를 읽고 판단하는 데에 수많은 오류가 있었다. 그 대가는 수많은 군인의 목숨과 한반도 주민들의 고통이었다. 한국전쟁을 미중전쟁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 원인과 전개를 오산과 오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미중전쟁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아무쪼록 제대로 된 교훈을 통해 또 다른 오산과 오판에 의한 전쟁이 재현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목차

머리말

1 오판
2 충돌
3 대치

해제: 미중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본 한국전쟁

참고 자료
도판 출처

상세 이미지

저자 소개

KBS 다큐 인사이트 〈1950 미중전쟁〉 제작팀
책임프로듀서 - 서용하
프로듀서 - 안성진
연출 - 김형석
조연출 - 이학원
작가 - 윤영수
특수영상 기획 - 박준균
영어 번역 - 박정선?박자영
중국어 번역 - 남유경?백가은
NARA 아키비스트 - 윤미숙
감수 : 박태균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 원장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2007년과 2017년 ‘한국현대사’와 ‘한미관계사’로 학부와 대학원 강의를 했으며, 계간지 [역사비평] 주간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주간을 역임했다. 쓴 책으로는 『조봉암 연구』,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원형과 ...

 

책 속으로

1949년 8월, 상황이 변했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소련도 미국과 대등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 전까지 미국은 베를린, 한반도, 그리스, 터키 등에서 소련과 첨예하게 맞섰지만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소련이 미국의 핵 독점을 무너뜨리면서 미국은 대외 전략을 대대적으로 고쳐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한 달여 뒤, 국제질서에 커다란 충격을 던지는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 1945년 이후 4년이나 이어진 치열한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가야 했다. 중국이 두 개로 나뉘었으나 사실상 중국이 공산화된 것이다. 이는 단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 p.31~35

미국이 한반도를 대소련 방위선에서 제외하자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49년 봄 김일성과 스탈린이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38선 이남에서의 주한미군 철수, 중국의 공산화,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라는 세 가지 변화가 동북아 정세를 흔들어놓은 것이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스탈린의 생각도 달라져 있었다. 스탈린은 국제적 여건으로 보나 한반도 상황으로 보나 북한이 행동을 개시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스탈린이 생각하기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제압했으니 이제 북한을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었다. 반면 미국은 중·소 동맹으로 주춤할 수밖에 없고 원자폭탄을 보유한 소련의 위상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었다.
--- p.57

미군이 북상을 감행하자 10월 14일 중국은 다시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 자리에 참석한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출병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펑더화이는 미군이 평양-원산 인근에서 진격을 멈출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군이 설정한 북진 한계선과 비슷한 라인이었다. 중국은 미군이평양-원산 선에서 멈출 경우 중국군이 평양 이북 지역을 점령하게 되어 싸우지도 않고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미군의 북진 한계선을 자신들의 국방선(국가방위선), 즉 국경선으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 p.112~113

“우리가 해변을 철수하는 마지막 부대였습니다. 그때 한 여성이 사오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모닥불 쪽으로 가까이 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영어를 못했고 물론 나도 한국어를 못했지만 서로 몸동작이나 간단한 소리로 소통했습니다. 그 여성은 93세였고 피란 중 친척들과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해변 전체에 폭탄을 설치해서 폭파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거기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큰 폭발이 있을 거라고 계속 말했지만 소용없었죠. 지금 당장 승선하라는 마지막 호출이 있었지만 그는 계속 그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승선 후 위쪽으로 올라가 그가 앉아 있던 곳을 찾았습니다. 배가 1킬로미터 정도 떨어졌을 때 해변 전체가 폭발했습니다. 연기가 사라졌을 즈음 그를 더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폭발하는 현장에 있었을 겁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늘 그때가 떠올라요. 그 생각을 하면 좀 힘들어집니다.” - 월터 벤튼(당시 미 3사단), 1950년 12월 24일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 p.194~195

맥아더를 해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소련·중국과 전면적으로 맞붙을 생각이 없었다. 맥아더는 청문회에서 트루먼과 미국 정치가들이 ‘지지도 말고 이기지도 말라’는 식의 태도를 보여 너무나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 p.215

주젠룽(도요가쿠엔대학 교수) :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몇십 년간 중국 발전 전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초기에는 자본주의와 함께 경제를 발전시킨 후 사회주의로 이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이후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발전은 전부 정치 문제였습니다. 모든 것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경제는 정치에 밀려 뒷전이 됐죠.
--- p.249

오빌 셸(아시아 소사이어티 미중관계센터장) : 한국전쟁은 한번 건너고 나면 되돌아갈 수 없는 루비콘강이었습니다. 1950년대 초 미군은 군사를 줄이고 타이완 사태도 그냥 둬서 마오쩌둥이 타이완을 공격해 장악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났죠. 이 전쟁이 다시 미국을 아시아로 불러들였습니다. 이후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중국과 관계 회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습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게 불변의 적이 되어버렸죠.
--- p.254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쟁 초기 18만여 명이었던 미군은 50여만 명으로 늘어났고, 남베트남 저항군의 주요 활동 무대인 밀림에 대한 공격뿐만 아니라 북베트남 주요 거점에 대한 공격에도 나섰다. 그러나 미 지상군은 17도선 이북으로는 진격하지 않았고, 중국 국경지역에 대한 폭격은 조심스러웠다. 중국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스툭(조지아대학 명예교수) : 한국전쟁에서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미국은 중국이 개입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베트남 통일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38도선처럼 베트남의 17도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봤죠. 공군이 아닌 지상군을 이용해 17도선을 지나면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 p.262

줄거리

「오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 초기. 북한은 어떻게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남한을 침공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신생국 중화인민공화국이 내상이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까닭은? 거기에는 여러 지도자들의 오산과 오판이 점철되어 있었다.

「충돌」

세계 3대 동계전투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를 비롯, 처절했던 1950년 겨울 한반도 북부 전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미군의 최강 화력이 산악지형에 무용지물이었던 반면, 중국군은 이미 국공내전으로 다져진 게릴라전의 베테랑이었다. 한편 진영을 막론하고 무서운 적이 있었다. 바로 혹한이었다.

「대치」

1.4 후퇴 이후 38선 부근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공방전. 전쟁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고 한반도의 군인과 민간인은 지쳐갔다. 그렇게 시작된 정전협상. 그런데 중국과 소련은 전쟁이 지속되길 바랐고, 그 결과 협상은 2년 넘게 이어졌다. 그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은 이후 미국과 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오늘날 신냉전이라고도 불리는 두 국가의 대치 구도를 우리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출판사 리뷰

“오산과 오판이 불러일으킨 70년 전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오늘날의 새로운 미중전쟁에서 우리는 더 큰 희생을 치를 수 있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첨예한 대립은
1950년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세계 패권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그 전초전은 바로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간의 내전으로 여겨지지만, 발발 3일 만에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곧바로 국제전이 되었다. 1950년 7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에 이관되었다.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넘어간 이후 참전한 중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괴멸 상태였던 북한군 대신에 공산군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공산화된 중국이 처음으로 맞붙은 무대였다.

핵무기를 비롯한 압도적인 화력은 물론 탄탄한 국력이 뒷받침된 최강 미국. 그리고 수년에 걸친 국공내전의 내상이 채 아물기도 전이었던 신생국 중화인민공화국. 얼핏 상대조차 되지 않을 듯한 두 국가가 어떻게 한반도에서 맞붙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럼에도 왜 미국이 1?4 후퇴를 해야만 했고, 이후 왜 전선이 38선 주변에서 고착된 채로 몇 년이 흘렀을까?

이처럼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관점으로 각국의 이해관계와 속셈, 판단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안목은 새로운 미중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을 살아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다. 오늘날 양강 구도의 한가운데에서 이를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 나갈지, 70여 년 전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자 기획된 책이 바로 『1950 미중전쟁』이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
그 몰입감과 현장감을 그대로 재현한 비주얼북


KBS는 한국전쟁 발발 40주년이던 1990년에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영상자료를 기초로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총망라한 〈다큐멘터리 한국전쟁〉(10부작)을 방송한 이래 2000년과 2010년에도 증보개정판 형식의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한 바 있었다. 그리고 2020년, KBS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을 거대한 국제적 힘의 충돌이라는 시각에서 들여다보자는 취지로 3부작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을 제작, 방송했다(7월 9, 16, 23일). 한반도 안에 갇혀 있는 인식의 틀을 전 세계적 범위로 확대함으로써 한반도의 상황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단순히 구조적인 필연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재앙이라는 시각에서 재구성해보고자 했다.

〈1950 미중전쟁〉은 이러한 새로운 내용에 걸맞는 ‘형식’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미군 및 중국군 참전자들의 생생한 경험담과 더불어 최첨단 3D 기술로 주요 전투 장면들을 재연 촬영 없이 실감 나게 재현했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중심으로 9천여 개에 이르는 새로운 영상을 발굴했다. 또한 박태균 서울대 교수, 윌리엄 스툭 조지아대학 명예교수, 김동길 베이징대학 교수, 주젠룽 도요가쿠엔대학 교수 등 세계적인 한국전쟁 연구자들의 심층적인 육성 해설을 곁들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이 다큐멘터리를 본 시청자들은 ‘영화 같다’, ‘걸작이다’와 같은 찬사를 보냈다.

대표적 한국전쟁 교양서인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을 비롯해 역사책을 전문적으로 펴내온 도서출판 책과함께는 한국전쟁 발발 71년을 맞아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을 단행본으로 선보인다. 원작 다큐멘터리의 그 몰입감과 현장감을 최대한 되살리는 데 중점을 둔 비주얼북 『1950 미중전쟁』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화면 전환이 되는 듯하도록 구성되었고,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전황의 이해를 돕는 시각 요소를 부각시켰다. 나아가 여러 요소들의 변화무쌍한 배치로 리드미컬한 흐름을 자아내어, 한번 잡으면 끝까지 단숨에 몰입해 보게 만든다. 요컨대 ‘읽는 책’이 아니라 ‘책으로 보는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짧은 호흡의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관심과 이해를 환기하는 데 적절할 것으로 기대된다.

핵심 의사결정자들의 오산과 오판이
전쟁을 일으키고 그 규모를 키웠다


『1950 미중전쟁』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핵심 의사결정자들의 오산과 오판이다. 먼저 공산 측이 전쟁을 일으킨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오산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이었다. 이는 미국이 1949년 여름에 주한미군 대다수를 철수시키고 1950년 1월 새로운 극동방위선(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한반도에서 한참 남쪽으로 설정한 ‘잘못된 신호’ 때문이었는데, 막상 개전되자 미국은 3일 만에 참전을 결정했고 일주일 만에 첫 미군 병력이 도착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서울을 수복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38선 이북으로 진군했을 때, 정주와 함흥을 잇는 북진 한계선(이른바 ‘맥아더 라인’) 이북으로 미군이 진군하지 않을 거라 예상해 중국이 참전을 결정한 것이나,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고 하더라도 소규모일 거라고 예상해 북진 한계선을 해제한 맥아더의 오판 역시 재앙을 초래했다. 양측 모두 동사자가 속출하는 영하 30도 미만의 혹한 속에서 고통스럽게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당시의 잘못된 예측과 판단을 조명하며 박태균 교수는 묻는다. “70년 전 한반도를 재앙으로 몰고 간 오산과 오판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의 일대일로 vs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오늘날 이들의 대치 구도를 우리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한국전쟁에서 처음 시작된 미국과 중국 간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전투가 진행되지 않을 뿐 이 갈등은 경제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안보 영역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다. 미국은 대륙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경제를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국이 중심이 되는 규율을 설정해 이 규율을 받아들이는 국가들만이 미국 중심의 무역 체계 내에 들어올 수 있도록 했고, 이는 미국이 세계 경제질서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규범이 되었다.

그와 달리 대륙에 위치한 중국은 북쪽으로 러시아,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에 연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고속 성장을 계속해온 중국은 규율이 아니라 대륙의 곳곳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규율을 넘어서 철도와 고속도로로 유통망을 연결하고, 연결된 국가에 대해 투자를 보장하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은 200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미중 갈등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미중 갈등의 양상에 따라 세계 경제가 출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갈등의 한가운데 위치한 우리나라가 미중전쟁의 또 다른 전쟁터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할까? 한국전쟁을 미중전쟁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 원인과 전개를 오산과 오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미중전쟁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총칼을 들어야만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전쟁은 총칼보다도 더 큰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아무쪼록 제대로 된 교훈을 통해 또 다른 오산과 오판에 의한 전쟁이 재현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