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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대학교 명륜당

동방박사님 2022. 1. 3.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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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대학교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 및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 소재의 4년제 사립대학교.

1398년[8] 개성에서 한성부 숭교방으로 성균관이 이전되었고, 기존의 개성 성균관은 향교로 격하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이래 성균관에 경학과[9]가 설치되었으며 근대적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성균관은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었으며 근대적 대학 교육의 기능도 중단되었다. 이후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의 영향으로 부설된 교육기관인 명륜전문학교 마저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1943년 폐교되었다.

비로소 광복 후 군정법령]에 의해 명칭이 성균관으로 회복되었고,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였다. 이후 전국유림대회를 통해 유림 천여 명은 성균관대학의 설치를 결의하였고, 이어서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심산 김창숙 선생의 주도 하에 명륜전문학교와 학린사가 통합되어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성균관대학은 1946년 문교부의 인가를 받았고, 캠퍼스는 전묘후학의 원칙에 따라 옛 성균관의 뒤편에 자리잡게 되었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81년 자연계열 학과가 새롭게 조성된 수원시의 자연과학캠퍼스로 이설되었다. 이는 성공적인 이원화 캠퍼스 체제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 성균관의 부지 전체는 1964년 사적 제143호로, 건물 5동은 앞선 1963년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 과거 이와 성균관대학교를 하나의 법인이 관리하였으나, 1963년 사립학교법이 시행된 이후 '재단법인 성균관'과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분리되어 각각 종교와 대학 교육의 기능을 전담하게 되었다. 법적으로는 분리되었지만 활발한 인적 교류[18]를 이어가며 깊은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하마비와 탕평비각  下馬碑. 蕩平碑閣

비각 안의 탕평비는 1742년(영조18)에 세운 것이다. 영조는 지나긴 당쟁의 폐해를 막기위해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을 펼쳤고, 이 비를 세워 그 의미를 널리 알렸다. 영조가 직접쓴 비문의 내용은 " 두루 사귀어 편당을 짓지 않은 것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마음이다." 라는 뜻이다. 

비각 오른쪽의 하마비에 새겨진 " 大小人員 皆下馬"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종묘(宗廟)나 궁궐의 문 앞에 등에도 하마비가 세워졌다

 

 

성균관대학교의 상징물은 은행이다. 은행나무는 교목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은행잎은 학교 로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자가 행단(杏壇)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은행은 유교적인 상징성을 띠게 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학교 이곳저곳에서 은행을 접할 수 있다. 성균관 명륜당 앞은 물론이고 학교 정문에서 올라가는 도로 양옆으로 은행나무를 줄지어 심어놓았다. 또한 성균관대의 구호는 '킹고 킹고 에스카라 킹고'인데, '킹고(Kingo)'는 은행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각종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킹고포털, 모바일 포털앱 KINGO-M, 법학전문대학원/일반 여학생 대상 기숙사인 K-하우스(킹고하우스) 등 이름에 '킹고'가 붙은 것이 많다. 또한 인사캠 600주년 기념관 학생식당의 이름은 '은행골'이며 자과캠 학생회관 학생식당의 이름은 '행단골'이다. 여러모로 은행과 관련이 깊은 네이밍을 이곳저곳에서 접할 수 있다.

 

서울 문묘(文廟)와 석전대제  

서울 문묘지역은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 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묘에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에게 석전제를 드리는데, 이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한다. 석전대제는 일반적으로 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제사 의식이며 문묘에서 치러지는 석전대제는 엄숙란 제례 절차와 더불어 기악과 성악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띤다.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그 원형이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명륜당과 그 주변  明倫堂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 공간이다. 1398년 (태조 7)에 설립되어 왕세자 가지 교육한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명륜(明倫)'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이라 전해진다.

명륜당은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3도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잇는 온돌방이 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명륜당 뒤쪽에 있는 존경각은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1519년 (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대성전 과 그 주변  大成殿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는 영역이 문묘, 즉 제사 공간이다. 남쪽의 삼문(三門)은 제례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던 정문인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도록 했으며, 가눈데 문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상징적인 문이다. 대성전 서쪽에는 제사음식을 차리는 전사청, 하급 관원들의 관청인 수복청,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 등 부속시설을 따로 설치 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주욱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성전에만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 교육기관 안에 앞마당의 묘정비각 비문은 문묘를 창건하고 고쳐지은 연혁을 기록한 것이다. 대성전의 현판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 (韓濩: 1543~1605) 의 친필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