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문학의 이해 (책소개)/3.한국문학

15.황석영 장편 소설 < 손님 >

동방박사님 2022. 1. 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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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방북과 해외체류, 5년간의 복역생활을 마치고 지난해『오래된 정원』으로 작단에 복귀하며 독서계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왔던 작가 황석영의 신작 장편소설로 2000년 10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된 소설을 단행으로 엮은 책. 형제간에 얽힌 아픈 과거를 소재로 한국전쟁과 남북현대사로 이어져온 민족의 한과 상처를 작가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어루만지며 화해와 위로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미국 브루클린에 사는 류요섭 목사. 그는 고향방문단 일행으로 북한에 가게된다. 방북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그의 형 류요한 장로가 숨을 거두는 일이 발생한다. 그 후 알 수 없는 꿈과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한 요섭은 유품으로 남은 수첩에서 요한 형이 박명선이란 여인을 만나기로 했다는 메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를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향하지만, 양로원에서 홀로 살아가는 박명선은 류요한 장로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풀지 않고 동생 요섭에게도 냉대로 일관하는데...

목차

1. 부정풀이
2. 신을 받음
3. 저승사자
4. 대내림
5. 맑은 혼
6. 베 가르기
7. 생명돋움
8. 시왕
9. 길 가르기
10. 옷 태우기
11. 넋반
12. 뒤풀이
 

저자 소개 

저 : 황석영 (黃晳暎)
 
1943년 만주 창춘(長春)에서 태어나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인 1962년 단편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이 당선되어 문학활동을 본격화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뒤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등 문학사에 획을 긋는 걸작들을 발표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 1976...
 

리뷰

`이미 문학사가 되어 버린 작가' 황석영이 지난 달 장편 소설 『손님』을 출간했다. 『손님』은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기독교인들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소재로 삼고,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얼개로 쓴 작품이다. 지노귀굿은 망자(亡者)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넋굿'으로서 작가는 주인공 류요섭 목사로 하여금 망자들과 대면하게 하여 북쪽에서 `신천 미제 양민 학살 사건'으로 규정한 이 사건의 `또 다른 진상'을 풀어나간다. 그것은 1950년 인천 상륙 후 45일 동안 3만 5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의 뿌리가 기독교와 맑시즘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두 `손님'의 대립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손님'은 조선 민중이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여 이를 막아내려고 일부러 높여 부른 칭호이다. 작가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자생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인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이라 규정짓고 1장 부정풀이부터 12장 뒤풀이에 이르는 지노귀굿 한판으로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을 잠재우며 화해와 상생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 브루클린에 사는 류요섭 목사는 고향 방문단 일행으로 북한에 가게 되는데, 요섭의 방북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그의 형 류요한 장로가 숨을 거두게 되고, 그 며칠 사이 요섭은 알 수 없는 꿈과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요섭은 화장하고 남은 형의 뼛조각 하나를 챙겨넣은 채 평양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는데, 홀연 형의 유령이 나타나 요섭의 몸에 들어오게 되고 형제는 한 몸이 되어 함께 평양으로 향한다.

북한에 머무르는 동안 요섭은 형의 헛것과 하나가 되기도 하고 둘이 되기도 하며 그들의 고향인 신천 찬샘골로 향한다. 그곳에서 요섭은 당시 기독 청년이었던 형이 연루된 끔찍했던 45일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몸서리치며 눈물 짓는다. “소싯적부터 사타구니에 거웃이 날 때까지 한 마을에서 뒹굴어온 넘들”이 서로를 죽였다. 당시 스러져간 검은 유령들은 요섭에게 떠올라 저마다 그 때를 이야기하며 소설의 말미에는 산자와 죽은 자들의 해원이 이루어진다.

『손님』은 굿판에서처럼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며 제각각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는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을 씨줄로, 등장인물 각자의 서로 다른 삶의 입장과 체험을 통하여 하나의 사건을 모자이크처럼 총체화하는 작업을 날줄로 삼아 이 둘을 서로 엮어 한 폭의 베를 짜듯 촘촘히 구성하는 작업은 한 사건이 빚어진 상황을 풍부하게 해체하고 반영하여 결과적으로 황석영만의 새로운 서사와 리얼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하여 재구성해야 한다.(중략)역사와 개인의 꿈 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도 안 되고, 화자는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일인칭 삼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완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자수를 놓듯이 그릴 수는 없을까. 객관적인 서술 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뿐이지 삶을 현실의 상태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이다.”

-작가의 말에서

개인과 역사가 맞물리는 복잡 다난함이 드러내는 리얼리티에의 추구,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끌어올리는 강한 서사의 힘. 1989년 방북과 해외 체류 그리고 5년간의 복역. 그 굵직한 역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작가가 분명 모색하고 궁리할 수 있는 것이다.
 

책 속으로

찬샘골이라고 말하자마자 그는 사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마을의 이름을 입밖에 내놓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찬샘골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무슨 향내나는 산열매 같은 맛으로 혀끝에 맴돌다가 발효시킨 생선의 썩은 냄새로 돌변하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수채화로 연두색의 여린 잎사귀를 가득 차게 그린 화선지 위에 먹구름 같은 물감이 왈칵 덮치듯이 쏟아져 번져가는 것처럼...
--- p.12
자자, 이젠 돼서. 그만들 가자우. 순남이 아저씨의 헛것이 말했고 일랑이도 그 옆을 따른다. 그래, 가자우. 다른남녀 헛것들도 벽에서 스르르 일어나 바람에 너울대는 헝겊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득하게 먼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서로 죽이고 죽언것덜 세상 떠나문 다 모이게 돼 이서. 요한이 아우에게 말했다.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도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 p.
자리를 옮겨서 땅바닥의 흙을 파냈다. 두어 줌 파내니까 축축하고 나뭇잎 섞인 흙이 나오다가 한뼘쯤을 더 파내니 그제야 부드럽고 바알간 속흙이 나왔다. 그는 잔돌멩이들을 골라내고 손바닥으로 자리를 다진 다음에 간수했던 모피 주머니를 꺼냈다. 가죽끈을 풀고 안에서 작은 도장처럼 생긴 형의 뼛조각을 꺼내어 구멍 속에 놓았다. 요섭은 그 위에 흙을 덮는다. 그리고 아기를 잠재울 때처럼 손바닥으로 땅 위를 토닥이며 두드려주었다. 형님 이제야 고향에 돌아온 거요, 하고 요섭은 소리를 내어 말하고 싶었다.
--- p.254-255
요섭은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의 뒤통수를 지나 얼굴을 다시 돌아본다. 이쪽 통로에는 없는 것 같다. 그는 커튼을 젖히고 어둠속으로 들어선다. 화장실의 빈칸 표시등이 파랗게 반짝인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비행기의 굉음이 귓바퀴에 멍멍하게 가득 찬다. 거울 위에 피로한 초로의 얼굴이 떠 있다. 그는 손을 씻고 세수를 한다. 종이타월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고 맨손바닥으로 다시 얼굴을 쓸어내린다. 요섭이 문을 향하여 돌아서는데 갑자기 자신이 타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힐끗 본다. 형이 거기에 떠올라 있었다. 그는 쫓기듯이 문을 밀치고 나온다. 그리고 커튼을 젖히고 통로로 나오는 데 저어기, 자신의 자리에 요한 형이 앉아 있었다. 류요섭 목사는 잠깐 멈칫했다가 형을 향하여 눈길을 똑바로 맞추고 형이 앉아 있는 좌석으로 걸어나갔다. 가까이 다가서니 빈 좌석이다. 앉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뒷전에 형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그대로 눌러앉는다. 요한 형의 환영을 등으로 깔아뭉개면서 요섭은 등받이에 푹 기대앉았다. 요섭아, 요섭아. 그는 깜짝 놀라서 궁둥이를 얼른 들었다가 다시 앉았다. 요섭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허튼 짓 하지 말라우요. 한번 갔으문 그만이지 왜 자꾸 나타나구 기래요? 난두 너하구 고향 가볼라구.
--- p.37
사랑할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251)
--- p.251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p.161
그러나 참극은 거의가 사실일 것이다. 악몽은 사실이지만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 생생함을 잃어버린 말은 또한 얼마나 가벼운가. 수십 수백번 거듭된 말은 마치 타버린 책의 종잇장처럼 검게 일그러져 허공에 떠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거기 찍혔던 활자와 의미는 재가 되고 먼지가 되어버렸으리라.
--- p.108
그때 우리는 양쪽이 모두 어렸다고 생각한다. 더 자라서 사람 사는 일은 좀더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어야만 했다. 지상의 일은 역시 물질에 근거하여 땀 흘려 근로하고 그것을 베풀고 남과 나누어 누리는 일이며, 그것이 정의로워야 하늘에 떳떳한 신앙을 되돌릴 수 있는 법이다. 야소교나 사회주의를 신학문이라고 받아 배운 지 한 세대도 못 되어 서로가 열심당만 되어 있었지 예전부터 살아오던 사람살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 p.176
 

출판사 리뷰

 
미국 브루클린에 사는 류요섭 목사는 고향방문단 일행으로 북한에 가게 되는데, 요섭의 방북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그의 형 류요한 장로가 숨을 거두고 그 며칠 사이 요섭은 알 수 없는 꿈과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요섭은 유품으로 남은 수첩에서 요한 형이 박명선이란 여인을 만나기로 했다는 메모를 발견하고 그녀를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향하지만, 양로원에서 홀로 살아가는 박명선은 류요한 장로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풀지 않고 동생 요한에게도 냉대로 일관한다. 결국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요한은 화장하고 남은 형의 뼛조각 하나를 챙겨넣은 채 평양으로 떠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데, 홀연 망자의 유령이 나타나 고향으로 가는 그와 동행하게 된다.

요섭은 초현실화 속에 걸어들어온 듯 멍한 기분으로 평양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고향인 황해도 신천 찬샘골로 향하고, 그러는 동안에도 형의 헛것은 그와 하나가 되었다 둘이 되었다 하면서 50여년 전 과거의 아슴한 기억으로 그들을 불러들인다. 요섭은 형이 북에 남기고 온 아들 단열과 해후하는 한편, 고향땅에 세워진 '학살박물관'을 참관하며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듣는다. 한국전쟁 당시 '미제'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사건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그곳에서 요한은 당시 기독청년이던 형과 연관된, 1950년 인천상륙 이후의 끔찍했던 45일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몸서리치며 눈물 짓는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지만 사실은 우익기독세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만행. 서로를 죽이고 죽던 검은 유령들이 요섭에게 떠올라 저마다 그때를 이야기한다. 요한과 요한의 아내, 두더지 삼촌과 이찌로, 이렇게 산자와 죽은자 들의 해원이 시작되는데……

작가도 밝히듯이 이 소설에서 '손님'이란 주체적 근대화에 실패한 우리에게 외부에서 이식된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가리킨다. 작가는 1950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 두가지 이데올로기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인간군상들의 원한과 해원을 그려냄으로써, 이제야 겨우 냉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 한반도에 화해와 상생의 새 세기가 열려나가기를 희망한다. 『손님』은 황석영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방북취재, 대작가의 선 굵은 서사구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특히 『손님』은 형식적인 면에서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얼개을 차용하여 작가가 새로이 구성한, 리얼리즘의 틀을 깨고 나온 리얼리즘이라 할 만하다.
 

추천평

내가 방북했을 때 저쪽에서 방문 코스와 스케줄을 협의해왔는데 다른 방북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름대로 선택을 하거든요. 나는 만주에서 태어나 외가인 평양에서 몇년 살다가 삼팔선을 넘었으니까 한번도 본적지에는 가보지 못했어요.

하여튼 황해도 신천(信川)을 방문했는데 매우 암울하고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낙후된 인상을 받았어요. 신천에는 '미제 양민학살 기념관'이 있고 군(郡) 전역에 걸쳐서 학살장소를 보존하고 있어서 더욱 어두웠습니다. 안내원이 격앙된 어조로 전쟁시기의 미군의 만행에 대하여 치를 떨며 설명하고 그 물적 증거물들을 보여주는 식이었지요. 남한에서의 좌우대립에 의한 농촌공동체의 파괴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듣고 보아온 나로서는 분노보다는 죽은이들의 신발이라든가 옷가지, 또는 머리카락 따위 물건들의 생생한 보존과 인형으로 만들어놓은 참상의 실감나는 재현 등에 소름이 끼쳤어요. 더구나 끔찍한 것은 전 군민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3만 5천여명을 학살했다는 것이지요. 몇번의 방문 중에 알게 되었지만 황해도에는 본토박이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이주시킨 사람들이 많았어요. 북한에서 월남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라는 겁니다. 미군은 남한에서도 그랬고 북한지역의 곳곳에서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 이 지역에서만은 머무를 시간이 없이 곧바로 만주의 국경지대를 향하여 북진했고, 중국군이 참전하자 일제히 후퇴했다고 전사(戰史)에 나와 있어서 이건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베를린에 돌아가자마자 여러가지 자료를 뒤지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에서 월남한 해외동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황해도에는 봉건시대부터 토착 대지주가 별로 없었지요. 북에서는 유일한 곡창지대인데 대지주가 별로 없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지요. 조선시대부터 황해도는 토질이 좋은데다 토반세력은 형성되지 않아 일찍부터 궁방전(宮房田)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궁에서 온 하급아전들과 지방 마름〔舍音〕들이 지주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곡산군수로서 목격한 황해도의 백성들이 일년에 여덟 가지, 많게는 열 가지 이상의 부역을 지고 있어, 남도에서 아전의 수탈과 폐해가 가장 심한 전라도보다 더하다고 탄식할 정도였지요.

일제가 들어오면서 궁방전은 곧 국유화되거나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제의 경제기관에 흡수되었어요. 구한말 식민지시대에 이르면 이들 관리인 계층이 중농층을 이루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북선지방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신분상승을 하려면 기껏해야 향시나 보고 실직(實職)이 아닌 직함으로 지방에서 행세깨나 할 정도였지요. 그러므로 이들은 진충보국(盡忠報國)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개화하여 신지식을 받아들이거나 했습니다.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이들의 배경이 그렇지요. 식민지시대 북선에서 개화 지식인은 두 가지 상반된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의 선진사상인 사회주의를 통한 개화였지요. 사실 이들의 뿌리는 하나였던 셈입니다.

해방이 되어 항일빨치산 세력이 북한정권의 실세가 되었고 겨우 두어달 동안에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는데, 남쪽에 미군정이 있는데다 시간도 없었으며 또한 전투경험은 많지만 현장 당활동이나 교육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지방에서 여러가지 무리를 빚게 됩니다.

열정이 넘치는 반면에 교조적인 젊은 당원들은 평양은 물론이고 신의주나, 함흥, 원산 등지에서 기독교로 대표된 민족 부르주아지들의 저항에 부딪칩니다. 더구나 당의 이론가들은 거의가 소련에서 교육받고 자라나 조선의 실정을 모르는 스딸린주의자들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을 담당할 요원들은 모두가 이른바 기본계급이라고 하는 빈농층이나 머슴 같은 이들이었어요. 이들은 오랫동안 어느 지방 한 동네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인정상이나 도리상 계급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요. 복잡한 공산주의 이론보다는 '적개심'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수단일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이나 중국의 경우, 토지개혁 과정을 착근(着根)이라고 하여 노련한 당일꾼이 하방해서 마을의 농군 집에 기거하며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의식화하여 농민 스스로가 토지개혁의 주체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있었겠지요.

물론 이러한 조급성은 북한정권의 책임도 있겠지만 당시의 급박한 국제정세와 분단의 탓일 수도 있습니다. 초창기 북한정권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이러한 조급성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만식이나 그와 비슷한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나 지방 향신층으로 이루어진 교계의 장로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이들 상반된 세력은 토지개혁에의 저항, 주일날 대의원선거의 강행과 불참, 그리고 테러와 체포, 처형으로 맞대결하게 되지요.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철천지원수의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전쟁 전까지 형성된 지하교회는 일종의 지하조직으로 되었던 겁니다. 백색테러로 유명한 서북청년단이나 한독당 또는 반공청년단의 정신적 근거가 사실은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와 깊게 관련되어 있거든요.

나는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사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 생각이 있었지요. '나는 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생각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는다'는 생각입니다.

망명지를 뉴욕으로 옮긴 뒤에 통일운동 활동으로 알게 된 신천 출신 어느 목사에게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자료를 통해 가졌던 의구심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진실은 그 끔찍한 학살이 '우리들끼리'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면적인 죄의식과 두려움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 광적인 증오의 뿌리가 되었던 셈입니다. 북이 이 사건을 '미제'라는 원인제공자에게 돌린 것은 자신들 체제의 봉합과 해소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손님』은 한국전쟁시기 서로 죽고 죽이던 저러한 악몽의 45일을 몽환적으로 드러내는 한판의 해원(解怨)굿입니다. 사실 '손님'은 천연두의 민속적 별명이기도 합니다. 천연두는 17세기에 서양에서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를 통하여 중국의 양쯔강 이남을 휩쓸고 동북지방을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뒤부터 조선에 창궐해서 풍토병이 되다시피 했지요. 백성들은 그것이 서병(西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호구별성(胡寇別星)이라고 불렀습니다. 호구는 오랑캐, 별성은 궁 지키는 수문장 같은 무서운 존재이므로 말 그대로 외국 병정을 말합니다. 천연두의 다른 별명인 '마마'라는 말도 당상관 이상의 무섭고 높은 이에게 붙이는 경칭이라는 점에서 천연두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천연두 자료를 찾아보면 각 시대마다 목차가 끝없이 나타나서 어느 자료를 뒤져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마을마다 수호신처럼 서 있는 장승이나 돌 무더기 따위도 무슨 이정표가 아니라 사실은 바로 외방에서 들어올 손님 귀신을 막자는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