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의 이해 (책소개)/3.프랑스혁명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

동방박사님 2022. 2. 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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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금까지 공포정을 다룬 모든 영역의 자료를
빼어난 솜씨로 함축하고 유려한 필치로 안내하는 모범서!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폭력(테러)과 폭력주의자의 위협을 받고 또 현실로 겪으면서 살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민주정부가 수천 명을 정치범으로 처형하면서 공포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 첫 번째 사례였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이처럼 잔인한 체제를 강요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러한 체제는 무엇을 성취했던가? 당시의 공포정은 현대의 공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책은 탄탄한 기초 위에서 혁명의 핵심 문제를 폭넓게 검토하고 공포정의 배경을 분석하며 1789년 바스티유 정복부터 1793~1794년의 공포정 시기에 단두대를 이용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하여 혁명사의 맥락에서 공포정을 다루고, 당시의 여러 상황과 관념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그 후 유럽인의 정치적 상상력에서 늘 떠오르던 사건을 일으켰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최근의 학술 성과와 토론을 반영해 완전히 새로 쓴 제2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포함시켜 독자에게 혁명의 정수를 소개한다.

- 최신의 역사서술 추가
- ‘공포정’을 명확히 정의하고, 공포정의 결과를 좀더 자세히 서술
- 프랑스 혁명기의 사회?문화 정책을 완전히 새로 서술
- 최신의 성과를 반영한 참고문헌 목록을 이용하기 편리하게 주제별로 정리

목차

옮긴이 서문
총서 발행인 서문
제2판에 부치는 저자 서문

1장 역사가와 공포정

근대 공포정의 출현
공포정은 폭력
공포정은 상황의 산물
수정주의
후기 수정주의

2장 공포정의 서막? 1789년 혁명부터 1793년 공화국까지

귀족, 교회, 반혁명
루이 16세와 바렌 도주 사건
지롱드파와 전쟁
첫 공포정과 찢어진 공화국
지롱드파의 실패

3장 1793년 3~9월, 공포정의 시작

1793년 봄, 군사적 패배와 방데의 난
공포정의 기구(1793년 3~4월)
지롱드파의 체포
구국위원회와 권력투쟁

4장 1793년 9~12월까지 파리와 지방의 공포정

음식과 단두대
방데의 죽음
연방주의 타파
구국위원회 강화

5장 1793년 12~1794년 4월, 파벌 타파

지배자 열한 명
에베르파와 탈기독교 운동
관용파의 공세
당파들의 제거

6장 1794년 4~7월의 대공포정

권력의 집중
프레리알 법
대대적인 처형
최고존재 숭배

7장 새 공화국의 새 시민 만들기

남녀 시민과 노예의 평등
가난, 토지, 복지
교육과 선전
이름과 장소, 자코뱅 클럽들

8장 1794~1795년, 테르미도르 반동과 공포정의 끝

공포정의 지지 감소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공포정의 끝과 테르미도르 반동
공포정 이후의 공포정

결론

연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휴 고프
 
아일랜드 더블린 국립대학교 역사과 명예교수로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 광범위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대표작 『프랑스 혁명기 신문The Newspaper Press in the French Revolution』 외에 『죽음의 화염 아래서Under Deadly Fire』, 『아일랜드와 프랑스 혁명Ireland and French Revolution』(공저) 등이 있다.
역 : 주명철
 
한국전쟁기라는 엄혹한 시절에 태어나 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했다. 역사공부의 참맛을 제대로 느껴보고자 무모하게 프랑스로 떠나 파리 1대학에서 알베르 소불 교수에게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그분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다니엘 로슈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불 교수에게 프랑스 혁명사를 배우지 못한 것은 큰 한이겠으나, 로슈 교수에게 앙시앵레짐의 사회와 문화를 배운 것이 오히려 ...
 

책 속으로

지난 몇 년 동안 대다수 역사가는 후기 수정주의 방법론으로 눈길을 돌렸다. 최근에 수정주의 역사가는 여전히 퓌레의 주장을 많이 이용하고 혁명을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태도를 보여주긴 해도 이념만이 공포정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 대신 그는 사건이 공포정의 원인이며 정치가들은 이념을 활용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다음의 서술은 대체로 공포정의 문제를 1793~1794년의 사건만 따로 떼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후기 수정주의의 방법론과 믿음을 담았다.
--- p.50

왕의 처형은 정치재판이었다. 그는 왕이었다는 이유와 왕으로서 한 일 때문에 처형당했고, 여느 범법자처럼 통상의 법원이 아니라 법원 행세를 한 입법부의 재판을 받았다. 그의 지위가 특별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며, 재판 절차는 균형 잡혔고 세심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처형이 정치적 행위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공포정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을 처형하고 몇 주 동안 처형한 사례가 없었고 왕의 지위는 분명히 특별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처형의 의미를 과장한다. 그 대신 그의 죽음은 좀더 단기적인 결과로 지롱드파의 지위를 약화시켰다는 데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p.78~79

1789년 혁명을 돌이켜볼 때 아주 눈부신 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분명히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나라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애국파가 밀어붙인 변화에 귀족 대다수, 적어도 가톨릭교도 절반과 왕이 저항했다. 왕의 바렌 도주는 애국파를 분열시키고 유럽과 치른 전쟁의 망령을 불러오면서 위기를 고조시켰다.

애국파는 좀더 차분한 정치적 분위기에서 온건한 왕정주의자를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어야 옳았겠지만 1791년 가을까지 화해를 추구하는 일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지롱드파는 전쟁으로 유럽에 혁명을 일으키고 역적들을 쓸어버리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더욱이 폭력과 타협해야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미처 그럴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국민공회의 경쟁자인 몽타뉴파는 폭력과 타협할 태세를 갖추었다.

1793년 봄, 프랑스는 공화국이 분명했지만 분열한 상태였고, 정치 토론을 한답시고 대부분 서로의 계략과 음모를 비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유럽과 전면전을 앞두고 여차하면 폭력이 난무할 만큼 날마다 급진화하는 파리를 만나야 하는 공화국이기도 했다. 분열한 공화국, 유럽과 벌인 전쟁, 음모의 소문, 민중 폭력의 두려움은 공포정을 불러올 치명적인 요소였다.
--- p.81~82

공포정이 18개월 이내에 끝났기 때문에, 그것이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의 태도를 얼마나 바꿔놓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단기적으로 그것은 분명히 실패했다. 공포정이 1794년 늦여름에 끝났을 때 공포정의 사회정책은 대부분 뒤집히거나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테르미도르 반동파는 공포정뿐만 아니라 자코뱅주의의 사회적 이상을 전반적으로 적대시했고, 1789년에 떠오른 재산권과 자립주의에 의존하게 되었다. 공포정 시기의 수많은 경제계획은 풍부한 국가 재정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실천할 수 있었고, 1794년 가을에는 통화팽창과 막대한 전비가 국가 재원을 고갈시켰기 때문에 실질적인 경제 대책만 마련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코뱅파의 사회적 이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총재부 시기에 신자코뱅파는 그 이상을 정치적 행동강령의 일부로 남겨두었고, 19세기[1814년부터 1830년까지]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 시절 급진파 민주주의자와 [1830년부터 1848년까지] 7월 왕정 시절 사회주의자에게 넘겨주었다. 그즈음 혁명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프랑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공포정의 야망은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 p.222~223

정치적 반동과 개인적 복수가 이내 지방으로 퍼지면서 ‘백색공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백색은 부르봉 가문의 색깔이었다. 1793~1794년의 공포정에 동조한 사람은 누구나 공격을 받았다. 1793년 여름 연방주의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자코뱅파가 아주 잔인하게 탄압했던 곳에서 독한 복수의 바람이 불었다.

백색공포는 공식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1793~1794년의 공포정과 달리 정부조직이 살인에 관계한 적은 없었다. 단지 몇 군데 지방 행정기관이 은밀히 부추겼거나 못 본 체해주었을 뿐이다. 1794~1795년 겨울에 왕당파 비밀집단으로 자칭 ‘예수의 부대’ 또는 ‘성자의 부대’가 자코뱅파를 공격하면서 복수를 감행했다.
--- p.241

이렇듯 공포정이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나? 단두대를 공포정의 가장 지속적인 상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장 명백한 결과를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 역사가 도널드 그리어Donald Greer는 60여 년 전의 연구에서 1793년 3월부터 1794년 8월 말까지 공식적으로 1만 6,594명이 처형당했다고 썼는데, 이것이 공포정 시기에 관한 유일한 통계분석이다.

이것은 파리와 지방을 아우르는 통계지만 재판을 받지 않거나 재판을 기다리다가 감옥에서 죽은 사람 1만 8,000~2만 3,000명을 더해야 할 것이다. 방데에 사망자 20만 명을 더하면 사망자 총수는 최소 24만 명까지 올라간다. 아마 수천 명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무분별하거나 보편적 현상이 아니었다.
--- p.251

그리어는 이렇게 말했다. “공포정이 주로 공화국의 가장 철저한 적에게 적용한 정치적 탄압의 도구였다는 추론을 무시하기 어렵다.”
--- p.252~253

공포정 시기 사망자 수에서 정치적 영향으로 눈을 돌리면, 군사적 패배에서 공화국을 구했다는 사실이 가장 명백하다. 방데 반란이 성공했다면, 연방주의 군대가 파리까지 진격했다면, 제1차 동맹이 중대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공화국은 아마 붕괴했을 것이며, [절대군주정이든 입헌군주정이든] 어떤 형태로든 군주정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군대를 강화하고 장군들을 교체하고,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내란을 끝내면서 공포정에 성공한 결과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확실히 막았다. 그러나 자코뱅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와 달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공포정을 더욱 억압적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 p.253
 

출판사 리뷰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에 대한 가치 있는 입문서

이 책은 아일랜드의 프랑스 혁명사 권위자인 휴 고프의 유명한 저작을 주명철 한국교원대 명예교수가 후학을 위해 세심하게 번역한 것으로, 현대 정치 토론에서 여전히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는 ‘공포정’에 대한 가장 핵심적이고 체계적인 입문서다. 휴 고프는 후기 수정주의의 입장에서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의 참다운 의미는 희생자의 수보다 그 목적·유산·시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주권의 이름으로, 인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반대자를 죽이기 위해 공포정을 이용했다고 진단한다.

1793년 봄부터 1794년 여름까지 대략 18개월 정도 지속되었다가 실패로 막을 내린 공포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역사학자마다 다르다. 그러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은 ‘개인의 자유’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강력하고 거대한 흐름이었던 혁명이 개개인의 생명보다 사회의 안녕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혁명의 반대자들을 단두대에서 무자비하게 처형했다는 점이며, 훗날 20세기에 파시스트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처럼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오점을 남겼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포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는 무엇을 공포정이라 하는가? 최근에 통용되는 의미로 볼 때, ‘공포정’은 협박·대량 체포·처형으로 민간인을 두렵게 만들어 마음대로 통제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체제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너무 작거나 약한 소수집단이 통상적 방식 대신 폭력을 동원하더라도 뜻을 이루려는 술책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프랑스 혁명기 그라쿠스 바뵈프Gracchus Babeuf가 1796년에 정변을 일으키려 할 때 처음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19세기 후반에 무정부주의 운동과 함께 유럽사의 주요 흐름에 끼어들었고 20세기에 전 세계로 빠르게 퍼졌다.

그래서 한편에는 국가 폭력이, 다른 한편에는 국가를 향한 폭력주의가 있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은 전자에 속한다. 혁명기에 군중의 폭력이 분명히 존재했고 학살과 음모의 소문도 파다했지만, 주장을 관철시키는 방식을 신중히 고려하고 조직적으로 폭력을 이용한 집단은 없었다. 그러나 국가는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공포에 의존했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은 알카에다의 폭력보다 스탈린의 공포정과 더 비슷하다.” (32~33쪽)

공포정을 바라보는 네 가지 시각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2세기도 더 지난 과거의 사건이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나타난 공포정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공포’가 지닌 현재성을 간과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지금 우리는 현저한 민주주의의 발전 덕에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두렵고 암울했던 상황을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지구촌 곳곳에는 무자비한 테러와 폭력주의자의 위협에 고통당하는 사례가 빈번하며,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라 해도 언제 어느 순간 반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득세할지 장담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공포’는 오랜 세월 동안 학자나 정치인, 정치평론가들의 주요 토론 대상으로 자리잡아왔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에 대한 시각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의 양상을 보였지만 크게 우파적 시각과 좌파적 시각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좀더 세분하면 네 가지 견해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아일랜드의 정치인이자 『프랑스 혁명 고찰』로 유명한 에드먼크 버크를 비롯해 피에르 쇼뉘, 사이먼 샤마 같은 이들은 언제나 혁명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혁명이 봉건사회를 파괴하고, 절대군주정을 폐지했으며,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힘을 약화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저자 휴 고프는 이런 시각은 모든 사건을 1793~1794년부터 1789년의 시점으로 거꾸로 읽고, 혁명을 싫어하는 마음에서 반혁명도 공포정의 조건을 조성하는 데 한몫했음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에서 너무 단순한 견해라고 일축한다.

반면 좌파 역사가들은 혁명을 현대 민주주의의 시작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혁명을 공포와 파괴의 장기적 모험담으로 보는 우파적 견해를 부인하며, 공포정을 혁명의 일부로 보지 않고, 공화국을 완전히 패퇴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적들에 맞서 전략적으로 공화국을 수호한 행위로 판단한다. 자유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 세 갈래의 공화주의자들은 공포정을 ‘상황’의 산물이라고 옹호했다. 정치가들은 반혁명과 전쟁의 압박을 받아 공포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압박이 풀린 뒤에 공포정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휴 고프는 ‘상황론’ 역시 당시 혁명가들이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세 번째 견해는 1980년대를 풍미한 수정주의 해석이다. 좌파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가 자유주의 중도파로 옮긴 프랑수아 퓌레는 공포정은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적 반사작용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에 깊이 새겨졌으며 20세기 공산주의의 실천을 조장한 태도였다고 주장하면서 ‘상황론’의 대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휴 고프는 반혁명과 정치적 사건의 영향을 무시하면서 이념의 역할에 지나치게 가중치를 주었다고 비판한다.

마지막 네 번째 견해는 1990년대 이후 대다수 역사가가 동의하는 후기 수정주의(신수정주의) 해석이다. 저자는 이 견해가 혁명의 정치적 변화라는 맥락에서 공포정을 바라보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후기 수정주의는 공포정의 문제를 1793~1794년의 사건들만 따로 떼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후기 수정주의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미국 역사가 아서 울럭을 비롯해 파트리스 이고네, 미셸 비아르, 티모시 타케트, 소피 바니슈 등이 대표적이다.

‘공포정’은 혁명의 특효약인가, 위약인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공포야말로 사람들을 순순히 동원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 또는 공포가 사람들을 동원하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프랑스 혁명기에 공포정이 세 단계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1792년 8~9월에 군중 폭력을 바탕으로 ‘첫 공포정’이 나타나고, 1793년 봄에 국가적 공포정으로 발달한 뒤 1794년 여름에 ‘대공포정’이 되었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세 단계의 정확한 시기를 다르게 판단한다. 어떤 역사가들은 1793년 봄에 혁명법원이나 구국위원회 같은 공포정의 주요 제도를 확립했을 때가 맞는다고 주장하는데, 다른 역사가들은 군중이 국민공회를 압박해서 공포정을 ‘의제議題’로 논의하라고 한 1793년 9월을 지목한다. 1793년 봄에 공포정의 제도를 수립한 결과 모두가 인지할 수 있는 처벌?두려움?협박에 바탕을 둔 정부의 체계와 운영 방식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9월이 아니라 봄에 공포정을 시작했다는 견해를 따른다.

한편 역사가들은 공포정이 왜 발생했는지를 두고 해석의 차이를 보인다. 보수주의자는 공포정을 혁명의 한 요소로, 상황론자는 반혁명 대응책으로, 수정주의자는 긍정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놓쳐 결점으로 나타난 것으로, 후기 상황론자(후기 수정주의자)는 반혁명에 대한 숱한 음모론과 밀접히 연관된 혁명기 정치의 발전으로 본다.

과거를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구체제의 사회지도층인 반혁명가와 부자, 종교인 등을 상대로 벌인 사회적 전쟁으로까지 발달한 공포정은 단기적으로 보면 명백히 실패했다. 그러나 조금 긴 안목으로 보면 공포정을 거치면서 남성 보통선거, 의회민주주의, 정교분리에 기반을 둔 공화적 민주정, 사회민주주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라는 중요한 정치적 전통이 탄생했다. 더불어 대내외 전쟁과 극심한 경제 문제 등으로 당시에는 당장 실현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재산의 분배, 교육과 사회부조의 권리 같은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19세기 사회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