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5.조선역사문화

조선과 명청

동방박사님 2022. 2. 1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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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서 마지막 왕조인 조선시대와 명/청 시대는 시간적으로는 500년에 가깝다.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여러 변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최대의 특징은 오늘날 한국이나 중국의 전통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이 시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문화, 전통적인 생활습관, 가족/친족 제도 등이 모두 이 시대에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되어온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대는 한국, 중국에 있어서 ‘전통 형성의 시대’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데도 특별히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현재를 보는 역사’인 까닭이다.

도쿄대에서 성균관대로 와 정년을 마치며 명저『나의 한국사 공부』, 『양반』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성균관대)와 당대 불세출 중국사학자인 기시모토 미오 교수(오차노미즈여대)가 함께 쓴 『현재를 보는 역사, 조선과 명청』은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국제적 시야’를 확보한 독보적인 역사책이다. 또한 정치사를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문화나 경제의 장기적 추세 역시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에서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부계 혈연집단으로서의 동족 조직이 형성되는 그 시점인 명말 청초에 중국에서도 ‘지아(家)’라는 동족 집단의 형성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를 집필한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그동안 16세기를 15세기의 성과들이 무력화되는 시기로 묘사하는 경향에 대해, 16세기는 조선왕조 5백년 역사를 조감하는 위치에 놓여 있는 중요한 시기로 평가한다.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흔히 양반관료제라고 하는데, 바로 이 양반관료제가 체계적으로 성립되는 것이 16세기로, 이 시기에 양반이라는 조선의 독특한 지배 엘리트 계층이 성립”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개정판 머리말에서 노무현, 이명박 두 대통령처럼 중류 이하 가정 출신의 사람이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는 한국인의 강한 평등의식도 족보 편찬의 보급, 확대 현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 전통과 근대의 분리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중국의 명/청 교체에 대해 명의 외부에서 강성해진 ‘주변세력의 결승전’이었으며 최종적인 승리를 차지한 것이 청 왕조였다는 견해를 펴고 있는 기시모토 교수는 “이 책에서 다룬 14세기에서 19세기 초반까지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오늘날과 연결되는 ‘나라國’의 통합이 형성 내지 재편된 시기”로 이전과 같이 ‘진전된 유럽, 뒤처진 아시아’라는 고정관념이 이미 통용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 각각의 차이를 파악하고 세계상을 묘사하는 것은 지금부터의 과제라고 한다.

 

목차

개정판에 부쳐1 일국사를 넘어선 역사 읽기_기시모토 미오
개정판에 부쳐2 족보와 한국의 평등의식_미야지마 히로시

1장_ 동아시아 세계의 지각변동
송/원 시대의 유산
가시적인 동아시아 세계 | 몽골제국의 유산
흔들리는 고려왕조
공민왕의 반기 | 경주의 설씨 | 이성계의 대두
원 말기의 반란과 주원장
빈곤한 회서 지역 | 원 말기의 반란들 | 주원장 세력의 대두
명 왕조 지배의 확립
회서의 기풍 | 유교적 정통주의 | 공포정치
조선왕조의 건국
태조 이성계의 즉위 | 용의 눈물 | 위대한 발명, 한글 | 보기 드문 독재자 세조
넓어지는 국제적 시야
『해동제국기』 | 조선 사절이 본 중세 일본

2장_ 명 제국의 확대
명 정권 초기의 '남과 북'
명 왕조의 중심 | 건문제와 연왕 | 북경 천도 | 새 수도 북경
영락 시대의 대외발전
몽골 원정 | 동북의 여진족 | 정화의 대항해 | 환관과 주변 민족
명대의 조공 세계
명대의 조공관계와 해금 | 류큐와 말라카
수세에 선 명 제국
토목의 변 | 끊어진 곳 없는 만리장성
명대 중기의 국가와 사회
성화/홍치의 성세 | 황제와 중앙관제 | 지방 행정제도 | 과거와 신사 |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던 황제

3장_ 양반의 세기 - 16세기 조선
유희춘과 『미암일기』
『미암일기』 | 유희춘의 생애 | 다채로운 등장인물들
양반관료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조선과거론 |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 중국과의 비교 | 과거와 양반 | 사림파 정권 성립의 의의
친족 네트워크
유희춘을 둘러싼 친족들 | 쌍계적인 친족개념 | 족보 편찬의 시작 |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와 관련해서
향촌사회와 지방통치
담양 향안 | 양반은 신분인가? | 유향소와 경재소 | 개발의 시대 | 양반들의 경제력
양반의 정신세계
독서광 유희춘 | 계몽정신 | 16세기 대유학자들 | 문학하는 마음
시대의 변천
그 후의 유희춘 일가 | 무대는 바뀌고 | 당쟁의 시작 | 좁아지는 국제적 시야

4장_ 후기 명 제국의 빛과 그림자
북방 방위와 재정 문제
풍속의 변화 | 북방정세-장성을 넘는 한인들 | 명 재정과 은 문제
동남 연안의 왜구
일본 은의 등장 | 왜구 집단의 성장 | 가정의 대왜구 | 북로남왜 문제의 완화 | 북로남왜 와 은의 흐름
명말의 도시와 농촌
관료/상인의 축재 | 농촌 수공업 | 도시 서비스업
공동성와 질서
양명 선생의 돈오 | 갓난아기의 마음 | 명말 사회와 양명학 | 양명학의 급진화와 양명학 비판
정치의 계절
가정제의 시대 | 서계와 해서 | 장거정의 시대 | 중앙과 지방 | 위충현과 개독의 변 | 초 망의 지사와 ‘조로’한 영웅들 | 명말 '시민' 사회 | 살찐 환자

5장_ 화이변태
세계 시스템과 동아시아
『화이변태』 | 은을 둘러싸고 | 19세기와 비교하여
임진/정유왜란
'상업의 시대'와 신흥국가 | 안동 하회에서 | 『징비록』으로 보는 임진/정유왜란 | 점령지 에서의 일본군
변경의 자립세력
변경 '권력'의 동시 발생 | 요동의 군벌 이성량 | 남해의 주인공 정지룡 | 남과 북의 신흥 세력
청의 성장
누르하치의 등장 | 후금국의 성립 | 후금의 진격 | 홍타이지의 시대
명의 멸망
궁핍한 농민의 반란 | 전설에서 사실로 | 북경 함락과 청의 입관 | 남명 정권 | 청의 중 국 대륙 정복 | 명의 유민들
청 왕조 지배의 확립
정씨와 대만 | 삼번의 난 | 주변세력의 결승전

6장 조선 전통사회의 성립
호란과 소중화
포로가 된 왕자들 | 광해군의 균형외교 | 『조선왕조실록』과 두 종류의 『광해군일기』 | 인조반정과 호란 | 소중화
당쟁으로 죽어간 사람들
당쟁의 경위 | 나주 나씨와 해남 윤씨 | 당쟁에 대한 평가
지배체제의 재편
세제의 변혁 | 균역법 | 호적과 양안 | 전통농법의 성립
전통의 형성
네덜란드인이 본 17세기의 조선 | 친족제도의 변화 | 마을의 형성 | 장시와 상업 | 상업 의 위치

7장_ 청 왕조의 평화
강희 시대의 국제환경
강희제의 시대 | 동남의 해상무역 | 러시아와 만나다 | 중가르와의 싸움
청 황제의 두 얼굴
칸과 황제 | 연회와 사냥 | 자금성 내의 학자 황제 | 역법 논쟁 | 청 황제의 다문화적 소 양 | 주접 정치
청 왕조 국가의 비전
옹정제의 즉위 | 『대의각미록』| 옹정제의 사회관 | 황제가 쥔 줄사다리
유럽에서 본 중국
기독교 포교와 전례 문제 | 계몽주의자들이 본 중국

8장_ 새로운 도전자들 - 왕조 말기의 조선
향촌사회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향전 | 향리의 세계 | 향리 조직과 그 역할 | 향리층의 양반 지향
실학과 천주교
실학의 '발견' | 『열하일기』의 비판정신 | 실학 사상가의 위치 | 천주교의 전래 | 양반 들의 천주교 수용 | 중인층의 천주교 수용 | 연행사와 통신사
정조의 꿈과 좌절
영조와 탕평책 | 정조와 규장각 | 정조와 정약용
사회변동을 예감하다
신분제의 동요 | 노비제의 해체 | 『춘향전』의 세계
근대를 전망하며
민란의 시대 | 흥선대원군의 등장 | 대원군의 권력 기반

9장_ 성세에서 위기로
『홍루몽』과 『유림외사』
청대의 사풍 | 『홍루몽』논쟁 | 과거와 중국사회 | 청대의 고증학
'십전노인' 건륭제
판도의 확대 | 청 왕조의 통치구조
호황의 시대
빈발하는 식량폭등 | 구미선 무역의 활성화 | 칸톤 시스템
산구 경제와 종교반란
동서의 '인구론' | 이주민의 사회 | 가경 백련교의 난

10장 사람과 사회 - 비교 전통 사회론
중국의 '가'와 사회단체
‘차등적 질서구조’ | ‘가’란 무엇인가 | 명청 시대의 종족 형성 | '동기'의 감각과 사회집단
조선의 사회조직 - 중간단체를 중심으로
헨더슨의 정치사회론 | 조선의 중간단체 | 중국/일본과의 비교

대담 ‘왜구적 상황’에서 ‘쇄국’으로
연표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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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기시모토 미오岸本美緖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인문과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중퇴하였다.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조수, 오차노미즈여대 조교수, 도쿄대 대학원 인문사회연구과 교수를 거쳐 현재 오차노미즈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중국명청사. 주요 저서는 『청대 중국의 물가와 경제변동』(1997, 硏文出版), 『동아시아의 근세』(1998, 山川出版社), 『명청교체와 강남사회-17세기 중국의 질서문제』(...
 
저자 :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1948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교토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연구과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도카이대 강사, 도쿄도립대 인문학부 조교수,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조선사회경제사. 주요 저서로 『조선토지조사사업사 연구』(1991년,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2013, 너머북스), 『미야...
 
역자 : 김현영
195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했다.(문학박사).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연구실장 역임.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의 양반과 향촌사회』(1999, 집문당),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회사』(2003, 신서원)가 있고, 역서로는 『일본 근세의 쇄국과 개국』(2001, 혜안)이 있다.
 

책 속으로

한글 제정은 조선의 문자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는데, 왜 이 시점에서 독자적인 민족문자가 만들어진 것일까? 이 문제는 언어학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언어학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한국어의 구조 자체가 독자적인 표음문자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한국어 음절의 특징상 자음으로 끝나는 것이 매우 많은데, 즉 하나의 음절이 자음+모음+자음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많다. 따라서 다른 언어보다도 음절의 수가 훨씬 많아진다. 일본어는 100개도 안 되는 음절밖에 없고, 하나의 음절을 하나의 문자로 표시하는 것이 용이하지만, 한국어의 경우에는 음절 수가 1만 가까이 되는 것이다.
음절의 종류가 이렇게 많기 때문에 한 음절에 하나의 문자를 대응하면 1만 가까운 문자가 필요하게 되고, 이것으로는 한자와 마찬가지로 그 습득이나 사용이 극히 어렵다. 한자를 차용해서 만든 베트남의 민족문자 추놈 등은 이 방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 번잡성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음과 모음의 종류만큼 문자를 만들고, 그 문자를 조합해서 음절을 나타내는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다. 한글이 자음자와 모음자로 이루어진 표음문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언어보다도 민족문자의 제정이 훨씬 곤란했던 것이고, 그 제정을 위해서는 음성학적인 치밀한 연구를 필요로 하였다. -57~58쪽 중에서

한쪽에는 혹한의 삼림·산지의 특산품인 초피나 인삼의 이득을 기반으로 성장한 이성량 군단, 한쪽에는 햇빛 넘치는 바다를 무대로 은과 생사의 교역으로 거대한 이익을 얻은 정지룡 선단이 있었다. 양자의 이미지는 상당히 다르다고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서 공통의 특질을 발견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양자에서 공통의 배경을 이룬 것은 16세기부터 17세기 초에 걸친 동아시아의 국제 교역 붐이다. 두 세력 모두 국제 상업으로 이익을 얻으면서 사상인(私商人)에 머무르지 않고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변경의 상업 질서를 지탱하는 무인이 되었다. 그들 군사력은 명 정부에 공인되어 명의 군사조직 일부가 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수령에게 개인적인 충성심을 가지는 사병에 의해 지탱되었다. 다문화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들의 리더십은 다양한 민족 집단이 제휴하고 반발하는 변경지대의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단련되었다. 강한 응집력을 가진 그들의 시야는 ‘외향적’이었고, 필요하면 누구와도 손을 잡는 기회주의적 내지는 현실주의적 재능이 그들의 장점이었다.
이들 세력의 위험성을 잘 알면서도 명 정부는 그들의 힘을 빌려서 변경·연안의 치안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량으로 투하된 군비는 그들의 사복을 채울 뿐만 아니라 변경의 상업 붐을 부채질하고 그 상업 이익을 둘러싼 여러 집단 간의 분쟁은 더욱 격화되어 무역 분쟁을 억제하기 위해 명 정부는 더욱 깊이 그들엑 의존하게 되었다. 명말 중앙정부에 의한 엄격한 징세는 사람들의 원망의 표적이 되었는데, 이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변경의 자립세력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경제와 군사의 무제중심이 주변부로 이동해가는 강력한 원심력 속에서 명의 지배는 해체되어갔던 것이다. - 258~259쪽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한국과 중국의 ‘전통’이 형성되었던 조선과 명청 시대!
일국사를 넘어선 역사 읽기가 오늘날 우리와 동아시아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서 마지막 왕조인 조선시대와 명/청 시대는 시간적으로는 500년에 가깝다.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여러 변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최대의 특징은 오늘날 한국이나 중국의 전통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이 시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문화, 전통적인 생활습관, 가족/친족 제도 등이 모두 이 시대에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되어온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대는 한국, 중국에 있어서 ‘전통 형성의 시대’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데도 특별히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현재를 보는 역사’인 까닭이다.
도쿄대에서 성균관대로 와 정년을 마치며 명저『나의 한국사 공부』, 『양반』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성균관대)와 당대 불세출 중국사학자인 기시모토 미오 교수(오차노미즈여대)가 함께 쓴 『현재를 보는 역사, 조선과 명청』은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국제적 시야’를 확보한 독보적인 역사책이다. 또한 정치사를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문화나 경제의 장기적 추세 역시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에서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부계 혈연집단으로서의 동족 조직이 형성되는 그 시점인 명말 청초에 중국에서도 ‘지아(家)’라는 동족 집단의 형성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를 집필한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그동안 16세기를 15세기의 성과들이 무력화되는 시기로 묘사하는 경향에 대해, 16세기는 조선왕조 5백년 역사를 조감하는 위치에 놓여 있는 중요한 시기로 평가한다.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흔히 양반관료제라고 하는데, 바로 이 양반관료제가 체계적으로 성립되는 것이 16세기로, 이 시기에 양반이라는 조선의 독특한 지배 엘리트 계층이 성립”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개정판 머리말에서 노무현, 이명박 두 대통령처럼 중류 이하 가정 출신의 사람이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는 한국인의 강한 평등의식도 족보 편찬의 보급, 확대 현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 전통과 근대의 분리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중국의 명/청 교체에 대해 명의 외부에서 강성해진 ‘주변세력의 결승전’이었으며 최종적인 승리를 차지한 것이 청 왕조였다는 견해를 펴고 있는 기시모토 교수는 “이 책에서 다룬 14세기에서 19세기 초반까지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오늘날과 연결되는 ‘나라國’의 통합이 형성 내지 재편된 시기”로 이전과 같이 ‘진전된 유럽, 뒤처진 아시아’라는 고정관념이 이미 통용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 각각의 차이를 파악하고 세계상을 묘사하는 것은 지금부터의 과제라고 한다.
『현재를 보는 역사, 조선과 명청』의 원저인 『명청과 이조시대』가 1998년에 출간되었고, 한국어판은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역사비평사)로 한국어판이 나왔다. 2008년 원저의 개정판이 나옴에 따라 초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출간한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의 지각 변동, 넓어지는 국제적 시야

이 책은 1402년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중국/조선/일본이 한 장에 그려진 최초의 동아시아 전도인데, 단순히 동아시아 전역을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유럽까지 부정확하게나마 그려 넣었다. 이 지도가 이때 조선에서 만들어진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배경에는 동아시아 전역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역사적 과정-송 왕조의 문화혁명, 몽골 세계제국의 성립 등 구체적으로 10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동아시아 세계 교류의 현격한 진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몽골제국과 고려가 무너지고 명과 조선이 성립할 수 있었다.
세계지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이미지가 시사하는 것처럼 14~15세기는 『해동제국기』를 저술한 신숙주처럼 국제적 경험을 가진 엘리트들이 많았고, 바깥을 향한 시야가 현저하게 확장된 시기였다. 문자사상 세계사적으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한글 창제 역시 더 넓은 세계와의 관계가 그 배경이었다. 미야지마 교수는 “표음문자라는 발상법에 한자의 작자법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동양과 서양의 작자 원리를 융합한 것”이라 한다.
명 제국의 건국에 대해 ‘한족의 중국지배회복’이란 관점은 한족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것으로 비판하는 미시모토 교수는 “원 왕조 역시 중국 정통 왕조의 하나라는 것은 주원장에게도 당연했으며 자신이 새로이 천명을 받아 세웠다는 인식이 당시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1430년대 북경 거주민의 3분의 1은 몽골인이었으며, 북경 내성의 북문은 몽골 등 북방과 연결하는 창구였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낙타를 탄 캐러밴들이 북경과 북방을 연결하였다는 이 책의 서술에서 보이듯이 명 제국은 남방(남경)과 북방(북경)의 이원적인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희춘과 그가 쓴 『미암일기』를 통해 양반과 양반을 둘러싼 16세기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역할을 한 중국의 ‘신사’와 한국의 ‘양반’에 대한 설명은 대단히 흥미롭다. 명/청 시대 중국의 관료 경험자 또는 과거 자격 보유자를 가리켜서 ‘신사(紳士) 또는 향신(鄕紳)이라 불렀다. 그들은 지방 사회의 유력자로서 지방관과 병립할 수 있는 세력을 가졌는데, 현임 관료도 퇴임 후의 신사도 모두 요역 면제 등의 특권을 부여받고 또 갖은 의례에 있어서도 일반 서민과 달리 한 단계 높은 신분으로 간주되었다. 중국에서 사람들이 이들을 따랐던 것은 인간으로서 서민보다 휼륭하다-그러한 도덕적 능력이 과거시험으로 인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조선의 양반은 한층 더 복잡한 존재였다. 저자는 양반을 신분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고 본다. 양반이란 지위는 국가의 법제적 규정도 아니고, 양반으로서의 근거나 양반들끼리의 격(格)의 상하를 결정하는 기준도 없었고 따라서 양반과 비양반과의 한계 기준도 매우 상대적이며 주관적이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양반들도 과거제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나, 양반은 중국의 신사에 비해서 동족집단 및 지방사회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미야지마 교수는 그의 명저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에서 안동 권씨 권벌 가문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의 역사적 실체를 찾아 나섰다. 이 책에서는 ‘유희춘’이라는 16세기의 한 인물과 그가 쓴 『미암일기』를 통해 양반과 양반을 둘러싼 16세기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시대를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인물을 통해 전체 사회상을 묘사하는 방법은 이 책에서 자주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다.
양반 체제는 사림파의 중앙 진출과 함께 향촌에서 양반을 핵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저자는 사림파 등장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기술하며 왕권과 신권의 문제에 주목한다. 핵심 요지는 왕권과 재상권의 대립을 축으로 한 양극 구조에 사림이라는 또 하나의 정치세력을 더함으로써 보다 안정된 정치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신권이 재상권과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낭관권으로 분리됨으로써 왕권의 상대적 강화를 이룰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한편 사림파 정권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한 ‘당쟁’을 조선 민족의 민족성으로 보는 일본인 연구자의 기존 평가와 당쟁이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정치적 룰로서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한국의 연구자들의 평가를 비판한다. 그것은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친 정치구조 변화의 산물이며 양반을 주체로 하는 통치체제의 활력 자체는 당쟁의 과정에서 점차 고갈되었다고 평가한다.


세계에서 채굴된 은은 태평양으로 돌든지 인도양으로 돌든지 최종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를 표방하는 만큼 이 책은 국제관계에 대해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다. 특히 눈이 띄는 대목이 ‘은 무역’이다. 이는 종래에 다른 조선시대 개설서와 차이점이기도 하다. 16세기 초 조선에서 새로운 채광법의 개발로 은의 수출이 급증하고, 일본에서도 많은 은이 유입되어 중국으로 흡수되었다. 은 수출을 둘러싼 새로운 사태는 일본으로의 면포 대량 유출, 사치 풍조, 밀무역 등 여러 문제를 야기했는데 사림파 정권은 이러한 변화를 억눌렀다. 사림파의 정치적 관심은 어디까지나 국내 지향적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사림파의 국내지향성과 국제정세에 대한 무관심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원인이었다고 본다.
은 무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역사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책의 역사서술이 장기적인 구조를 중심에 둔다는 의미이다. 당시 중국은 세계 은의 블랙홀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16세기 후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2100톤에서 2300톤, 17세기 전반에는 5000톤에 달했다. 세계에서 채굴된 은은 태평양으로 돌든지 인도양으로 돌든지 최종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중국의 왕성한 은 수요가 명 왕조 내내 위협이 되었던 북방의 몽골과 동남 연안의 왜구, 즉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기의 리듬과 일치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북방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은의 북방 집중은 강화되고 중국 내의 은 부족은 심각해진다. 그러면 동시에 동남 연안에서는 밀무역이 호황을 누린다. 이리하여 명 제국의 북과 남에 형성된 변경의 세계는 상업-군사적인 ‘작은 국가’ 형성에 이르며 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체제는 붕괴함과 동시에 요동의 군벌 이성량, 남해의 정지룡 등 주변부의 변경 ‘권력’들의 형성이 단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만주의 여진족 누르하치가 등장한다. 당시 여진 경제는 소박한 자급자족 경제가 아니라 국제교역을 위한 모피와 인삼 등 특산품을 얻는 데 그 주안점이 있었다. 저자의 시선에서 명청 교체는 명의 외부에서 강성해진 ‘주변세력의 결승전’이었다. 그 중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차지한 것이 청 왕조였다. 청 왕조의 성립은 16세기 이래 변경사회의 팽창을 지탱한 국제 상업 붐이 종말을 고한 시기이기도 했다. 1684년 청 왕조는 해금을 해제하고 민간인의 해상무역을 허가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이전과는 다른 국면을 거치게 된다.


전통 사회의 형성, 유교 혹은 주자학의 영향 때문이 아니다

‘화이변태’라는 동아시아의 지각 변동이 절정을 경과할 무렵 조선에서는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사회가 성립된다. 이른바 부계 혈연집단으로서의 동족 조직의 형성과 강화였다. 문중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로 17세기 이후 본격화한다. 부계혈연집단의 결합이 강화됨에 따라 이전의 쌍계적인 친족관념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변화가 족보 편찬 방식의 변화인데 16세기의 족보에서는 남계와 여계를 함께 수록하던 것이 17세기 후반부터 남계자손 우선 편찬 방식으로 바뀌다가 나중에는 남계 혈연집단의 구성원만을 수록하는 것이 통례가 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미야지마 교수는 대부분 유교 혹은 주자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에 의문을 던진다. 주자학이 본격 도입되는 시기와 부계 혈연집단의 조직화 시기는 그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이 움직임을 근저에서 규정한 것은 양반 집단의 경제력 저하였고 특히 지방에 사는 양반들의 활력이 점차 상실되어가는 가운데, 그들의 생존전략으로서 부계 혈연집단의 강화가 꾀해졌다는 것이다.
한편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전국적으로 장시망이 형성되었지만, 상업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보면 조선왕조 사회는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보면 빛을 잃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이 책은 서술하면서도 한국 학계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거리를 둔다. 장시에 있어 상설 점포의 결여나 화폐의 미발달 등이 그것을 상징한다. 저자는 그 원인으로 국가가 상업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정책을 고수한 것을 들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지배층의 존재 형태였다고 말한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이었던 양반은 대대로 서울에 사는 친척이나 현직 관료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농촌 거주자였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유한 농지나 노비로부터 일용물자를 조달하고, 시장교환을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16세기 이후 경제의 자급자족 체제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국가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양반층의 존재방식이 보다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다양한 변동이 일어난다. 신향층이나 향리층의 대두, 노비제 해체, 천주교의 전래와 침투, 농촌으로 파급된 상품 경제 등을 기술하는 가운데 저자는 이 시기의 특징을 신분제 붕괴나 동요로 보는 학계의 통설에 거리를 둔다. 서얼, 향리, 부농 등의 향전(鄕戰)은 사회적 신분질서를 부정하거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양반 대열로의 신규 진입이 용이했다는 사실은 양반이 사회적 신분제에 속하며 양반제가 강인함을 드러냈다는 해석에 힘을 더한다. 저자는 결국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보고, 조선후기를 봉건제 해체기로 파악하는 한국학계 주류 견해인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경영형 부농의 출현과 신분제 해체를 골간으로 한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이는 지배층으로서 양반을 서구의 귀족과 동일시한 논리로 조선시대의 발전 모델을 서유럽에서 찾으려 한 이데올로기에 볼과하다고 지적한다.

세계 학계에서 ‘청 왕조의 국가적 성격’만큼이나 연구가 급속히 진전되어 온 것도 드물다. 기본 방향은 서구 중심주의를 지양하고 새로운 중국사 서술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기시모토 교수는 유럽의 역사를 모델로 하여 선진/후진을 판단하려는 방법이 이미 성립되지 않게 되었다면, 각기 개성 있는 국가, 사회체제를 만들어온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나라들에 대해 어떠한 역사상과 역사서술을 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과제라고 한다. 21세기의 패러다임이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말하는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은 다시 19세기 이전에 위치했던 동아시아의 주변적 위치로 되돌아갈 것”이라 전망한다. 동아시아의 역사 지도는 대단히 논쟁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시모토 교수의 개정판 서문의 맺음말은 의미심장하다.

“수십 년 후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세계의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 토론이 진행되어 일정한 공통 인식이 생기게 될까?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러한 의론이 활발하게 진행된다면, 명청 시대 중국에 대해서도 더욱 넓은 시야에서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이에(家), 중국의 지아(家), 그리고 한국의 집(家) 비교

역사 연구와 서술에서 비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들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이 이 책의 마지막 장, 일본의 이에(家), 중국의 지아(家), 그리고 한국의 집(家)의 개념을 비교하는 대목이다. 일본의 이에(家)와 중국의 지아(家)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이 책의 기술에 따르면 에도시대의 일본의 이에는 ‘가업’의 관념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하층 농민에서 천황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가명(家名)과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가산(家産)과 가업(家業)이 있었다. 그러한 ‘이에’의 집합으로서 사회 전체가 이미지화되어 있는 것이고 사회에서 할당된 그 가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는 것에 ‘이에’의 원래의 존재재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에게 ‘이에’는 개인을 넘어선 단체로서, 같은 이에에 속한 사람들과의 공동의식은 혈연관계 그 자체보다도 ‘이에’의 목적을 위해 공동으로 일함으로써 지탱된다.
그에 비해 중국에서는 ‘가업’이라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사회를 관찰하는 사람은 종족이나 촌락 등 혈연, 지연 단체는 물론 동업단체나 비밀결사 등 사회단체의 다양성과 그들의 생활에서 가지는 커다란 의의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생활에서 기본단위가 되는 것이 ‘지아’인 것이다. 중국의 ‘지아’ 내부에 존재하는 의식의 근본에 있는 것은 남계(男系)의 피를 통하여 면면히 계승되는 생명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흐름을 왕왕 ‘기(氣)’라고 표현하는데, 비록 떨어져 살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기’가 같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연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족은 ‘타인’이 아니며,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감각에 광범하고 강고한 동족의 결집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족 집단의 형성이 진행되는 시기는 사회의 유동성이 대단히 높았던 명말에서 청초까지의 시기였다. 조선에서 전통이라고 여겨질 여러 사회적 요소들이 형성해갈 무렵에 동시에 중국에서도 유사한 사회적 흐름이 나타났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중국의 ‘지아’나 일본의 ‘이에’에 비해 조선사회의 기초단위에 대한 이 책의 설명은 대단히 유동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중간단체라는 것을 중심으로 조선 사회를 분석한다. 혈연집단에 대한 중간단체로는 문종 조직이 가장 중요했다. 혈연에 의하지 않은 중간단체로는 각 계층마다 조직된 자치적인 조직들이 있었다. 양반층의 향안이나 향리층의 단안(壇案)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계(契)가 훨씬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중간단체들의 성격은 중국과 일본의 그것과의 차이를 보면 그 성격이 분명해진다. 중국의 종족은 조선의 동족 조직에 비해 융통성이 풍부한 반면 결속력에서는 약한 특징이 있다. 중국에서는 혈연조직 이외의 단체를 형성하는 때에도 혈연관계를 의제화(擬制化)하는 경우가 보이지만 조선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은 조선의 단체보다 강고한 것이 차이이다. 저자는 일본 이에의 강조함을 지탱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천황제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각자의 이에들이 각자의 가업을 갖고 분업을 이루는 사회시스템의 정점을 이루는 것이 천황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횡적 아이덴티티를 기반으로 하는 중국과 종적 아이덴티티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의 중간단체와 비교해보면 조선의 중간단체의 특징은 통일적인 아이덴티티가 유연하다는 것인데,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통일적인 아이덴티티의 부재가 가지는 적극적인 면이다. 오늘날 해외에 정주하는 한국인의 수는 본국 내 거주 인구와의 비율로 보면 세계 최대의 이민국이라고 말하는 중국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 왕성한 정착력은 그 유연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일본 사회와의 ‘공생’ 노력은 그들의 유연한 아이덴티티 확립의 노력임과 동시에 일본인의 협소한 아이덴티티에 대한 계속적인 문제제기라며 이 책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