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1.조선통신사

비밀 조선 통신사 김홍도

동방박사님 2022. 3. 3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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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794년 4월~12월간 단지 9개월 동안의 활동으로 세계 3대 초상화가에 등극한 세계의 불가사의 존재 동주재 사락(東洲齋 寫樂), 활동국가 일본 발음 도슈사이 샤라쿠(うしゅうさい しゃらく)가 정조가 밀파한 현직 연풍현감 사능 김홍도(17455~ 1806.1?)임을 오직 객관적 자료만으로 추적한 미술역사 교양서이다.

목차

부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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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조와 김홍도, 그 운명적 만남
1. 단원 김홍도의 화원 신분
2. 금강산 복명 승경묘사 ,
제2장 비밀 조선통신사 밀파의 배경
1. 예정된 조선통신사 파견의 불발
2. 정조의 대응, 비밀 통신사 밀파
제3장 녹관화원 김홍도의 대마도 잠행
1. 대마도 잠행의 시기
(1) 투병 시점, 1790.3.26 이전이었는가 아니면 이후였는가?
(2) 투병 기간은 30일 이상이었나?
(3) 이미 1790년 3월초 이전부터 한양에서 앓고 있었다!
2. 대마도 잠행의 증거
(1) 정범조가 쓴 「걸화가의 신수부 화답에 재미삼아 제하다」의 함의
(2) 단원이 ≼원유기려도≽에 직접 쓴 화제
(3) 『김씨가보』의 기록
(4) 양산 통도사의 바위새김글
(5) 1789.12.10 『승정원일기』의 김응환 타계 기록
3. 복헌 1742년 출생의 의문점
(1) 생물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복헌의 가족관계
(2) 청성 성대중과의 관계
(3) 의궤의 기록
(4) 위창 오세창의 잘못된 필사에서 기인?
제4장 비밀 조선통신사 김홍도
1. 에도 출정식
(1) 1794.3.8 지방관 하직행사, 정조가 마련한 에도 출정식
(2) 1794.3.6 새벽, 갑작스러운 지방관 하직행사 개최 결정
2. 정조의 김홍도 에도 잠입령
(1) 1794.3.5, "현감 김홍도는 에도로 잠입하라"
(2) 1794년 3월 하순, 에도로 출발하다
제5장 에도의 동주재 정착
1. 김홍도가 남긴 낙관의 비밀
(1) 낙관이란 무엇인가?
(2) 인칭의 종류 : 명ㆍ자, 그리고 호
(3) 명ㆍ자의 대체 호칭, 호
2. 동주재 사락의 명ㆍ자ㆍ호 분석
(1) 동주재는 호
(2) 사락은 자
3. 동주재 사락의 이름으로 남긴 작품
(1) 단원의 선택, 우키요에
(2) 우키요에는 무엇인가?
(3) 단원의 우키요에는 어디에서 팔렸나?
제6장 단원ㆍ샤라쿠의 거스트만 증후군 흔적
1. 김홍도의 거스트만 증후군 증상
2. 김홍도 작품의 모사작 문제
3. 김홍도 거스트만 증후군에 대한 오해
(1) 미술 기법의 고전, ‘형태 변형’
(2) 형태 변형 수법은 자연 비율관계의 파괴
(3) 단원 및 사락 작품의 기이성은 형태 변형 수법과 무관
제7장 필체 및 준법의 동일성
1. 낙관의 필체
2. 나뭇가지의 선묘
제8장 한양으로의 복귀
1. 1794년 1월, 단원 체포 소동
(1) 연풍현감 김홍도의 세 가지 죄
(2) 연풍현감을 만나지 않은 채 작성된 호서위유사의 보고서
(3) 1795.1. 8, 단원 체포령 발동
(4) 1795.1.14, 체포관원 나장 출동
(5) 1795.1.18, ‘아직 체포하지 못한 죄인’으로 사면
2. 다시 국내 거주 기록의 등장
(1) 보직의 자리가 없는 인사명령
(2) 『원행을묘정리의궤』 기록의 진실
3. 정조의 후속 대응조치
4. 에도 스파이 활동의 기념작
제9장 호칭으로 보는 김홍도
1. 성姓
2. 명名
3. 자字
4. 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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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부록
하나 : 「인용 문헌」ㆍ「사안 정리」ㆍ「유물 도판」 목폭
두울 :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자 : 신영곤
경북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공무원 3급 퇴직(2015.3 명예퇴직)했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2015.2 입학)을 수료했다. 현재 도서출판 도화원(2015.7 설립)의 대표이다.
 
 

출판사 리뷰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김홍도가 비밀 조선통신사의 자격으로 일본의 수도 에도에서 9개월 동안 체류했음을 오직 역사 기록물만을 바탕으로 추적한 미술사 저작이다. 현직 연풍현감 김홍도가 동주재 사락이라는 암호명으로 수행했던 비밀 조선통신사의 행적을 추적한 역사서인 것이다. 동시에, 사능 = 사락을 뒷받침할 수 있는 ‘寫畵사화’인영이 사상 최초로 공개되어 있다. 사화라는 자字는 사능 자신이 사락이라는 자字로 일본에서 활동했음을 후대에 알리는, 또 하나의 암호장치이다. 이외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대마도 잠행 및 거스트만 증후군 등등 놀라운 정보들이 담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증거의 핵심은 두 작품에 동시에 관찰되는 거스트만 증후군의 흔적이다. 단원 김홍도는 선천적으로 손발의 인지에 장애를 가진 거스트만 증후군 소지자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홍도는 단 한 번도 어진의 주관화사가 될 수 없었다. 어진은커녕 당시 광풍처럼 유행했던 초상화를 단 1점도 그려내지 못했다. 단원의 유일한 초상화 합작품 서직수초상화(이명기 얼굴-김홍도 몸체 담당)마저도 서직수의 손발을 감추어야 했다. 단원이 자신의 이러한 단점에 대한 반발로 용감하게 도전했던 씨름 등 풍속화에서도 결국 손-발의 묘사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가장 취약했던 손발 묘사가 수반되는 풍속화 (조선 국내에서의 작품) 및 우키요에(일본에서의 작품)가 현재 단원 작품의 상징 내지 아이콘이 되었음은 세기적 반전이자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정조, 1794.3.5 김홍도에게 비밀 조선통신사 밀명을 내리다

정조의 일본 정보에 대한 목마름은 예정되었던 통신사 파견이 일본 요청으로 무기 연기된 1788년 6월에 이어, 연간 8회 정례 차왜(사신)만 허용한다는 임술약조 위반에도 불구하고 입국을 허용했으나 제대로 된 답변을 가져오지 않아 결국 통신사 파견 자체를 종결키로 최종 결정한 1789년 2월 이후 더욱 심화된다. 이에, 정조가 꺼내던 대응 카드가 스파이의 파견이었으니 바로 비밀 조선통신사 단원 김홍도의 밀파이다.
1794.3.5, 정조는 승정원 승지 5명 전원(6명 정원 가운데 1명 공석)에게 갑자기 외부 출장토록 조치한다. 그것도 명령한 그 날 당일 곧바로 실행토록 명령한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난다고 어가의 말고삐까지 잡아당기던,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참견하던 고위 관리들이 자리를 비우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 다음 정조가 했던 것이 바로 연풍현감으로 있던 김홍도를 단독 소견, 에도로 잠입토록 어명을 내린 일이다.

현직 연풍현감 김홍도, 일본 에도로 잠입하다

1794.5~12(일본 날짜 기준, 윤11월 포함) 에도 단신 체류하던 시절, 김홍도는 자신의 호號를 자신이 거처한 집의 이름으로 짓는다. 거처한 집이 조선의 동쪽 큰 섬에 위치한 곳이기에 바로 그 뜻 그대로 풀어 ‘동주재東洲齋’로 작명한다. 거주지를 호로 삼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지만, 일본에서 동주재, 즉 ‘동쪽 큰 섬의 집(에 거주하는 사람)’이라 자칭한다는 것은 일본 체류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선언함에 다름 아닌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먼 훗날 후손들이 자신의 신분을 해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 일본에서 사용할 자字를 자신이 근무하는 연풍현 관청의 이름에서 따온다. 관청인 동헌 건물의 이름은 ‘풍락헌豐樂軒’이다. 그가 매일 쳐다본 연풍현 관청 정면에 걸린 풍락헌 현판, 거기에서 ‘락’ 글자 하나를 따와 ‘사락寫樂락’으로 작명한 것이다. 이는 곧 백성을 풍요롭게 함으로써 즐거움을 만드는 현감 자격의 ‘풍락’ 임무가 아니라, 적국의 요충지 그림을 그려 즐거움을 만드는 화가 자격의 ‘사락’ 임무를 수행하는, 여전히 현직 현감인 자신의 공직 신분을 자에 투영시킨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현판 풍락헌의 서체와 동주재 사락의 낙관 서체가 완전 일치함은 물론이다.

우키요에 화가 김홍도, 에도에서 9개월 체류하다

김홍도는 1794.3.8 정조 하직 알현 이후 연풍현 부하의 입단속 및 신변 정리에 보름, 동래에서 대마도를 통해 에도까지 가는 데 1개월 보름~2개월 소요되었을 것이므로 빠르면 일본 날짜 기준 4월 하순, 아무리 늦어도 5월 초순 일본 에도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가부키극장에서, 극장 배우들의 모습을 목판화로 제작ㆍ판매하던 우키요에 판화업자 츠타야 주자부로(蔦屋 重三郎, 1750.2.13~1797. 5.31)를 만나 일필휘지로 배우 그림을 그려 보임으로써 바로 전속 계약되었을 것이므로 그의 이름 ‘동주재 사락’으로 낙관된 판화가 처음 세상에 등장한 1794년 5월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
또한, 단원은 정조에 의해 1795.윤2.28 군직 자격으로 관복 착용한 채 상근하라는 어명이 하달되면서 다시 조선 국내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기점으로 귀국 소요기간을 1개월 보름~2개월로 잡아 역산해 보면 일본 날짜 기준 1794년 12월 끝머리 때, 아마도 틀림없이 1794년 12월 29일 에도를 출발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곧 사능이 조선으로 복귀하기 직전에 그려준 그림을 바탕으로 몇 일간의 작업을 걸쳐 판화를 완성, 그의 이름으로 된 마지막 판화가 유통하게 되는 1795년 1월과 완전 합치된다.

밀명 완수 김홍도, 1795년 윤2월 한양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다

김홍도가 일본 에도에서 비밀 조선통신사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그가 귀국하기 직전 우리나라 기록물에서도 극적으로 드러난다. 1795.1.7, 『실록』과 『일성록』은 「호서위유사의 서계」내용을 게재, 연풍현감 김홍도가 잦은 중매ㆍ부하를 동원한 첩맞이ㆍ부당한 사냥 세금으로 처벌이 건의되었음을 기록한다. 그런데, 같은 날 『일성록』ㆍ『승정원일기』는 정조가 사직단의 재실로 호서위유사 홍대협(1750~?)을 호출해“연풍수령은 과연 어떠하던가?(延豐倅果何如)”라고 위 죄의 사실여부에 대해 하문하자 홍대협이 “신하가 비록 몸소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듣기로는(臣雖未能躬探 聞)”라면서 연풍현감 김홍도를 직접 만나지 못한 채 소문에 의거해 서계를 작성했음을 분명히 실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능은 1795년 1월 7일 당일 연풍현감에서 파직되는 징계를 받는다. 그것도 모자라 다음날, 당시 최고의 실세기관이던 비변사에서 파직으로는 그 처벌이 약하니 직접 체포하여 그 죄상을 가려야 한다고 정조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받게 된다. 7일이 지난 1795.1.14, 『승정원일기』는 수사 및 재판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법기관 의금부가 “자신의 근무지에서 아직 올라오지 못했다는 말들이 있어(自任所未及上來 云)”라고 정조에게 보고하면서 출두 어명 7일이 지났는데도 출석하기는커녕 사실상 행방불명된 단원 체포를 위해 체포관원 나장을 출동시키겠다고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4일이 지난 1795.1.18, 『일성록』ㆍ『승정원일기』는 의금부가 기ㆍ미결 지방관 13명을 사면하라는 정조의 어명에 대해 복명할 때 사능을 여전히 ‘아직 잡아오지 못한 죄인(未及拿來罪人)’으로 분류했음을 밝히고 있다. 김홍도의 장기 연풍현 이탈 내지 일본 밀파 사실이 드러날 위기의 순간, 정조가 이례적으로 체포조차 못한 수배자 김홍도에게 사면령을 전격 발동함으로써 모든 상황을 마무리한 것이다.
이처럼 당시 조선정부의 공식 기록물을 통해 알 수 있는 단원 체포소동은 결국 사능이 그 때 국내에 부재하였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18세기 시대라고 하더라도 연풍현에서 창덕궁까지 도로 길이 155Km에 불과하거늘, 11일간 어명을 거역한 채 출두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걸음만으로도 3~4일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시 2개월이 지난 윤2월 28일 느닷없이 정조가, 비변사와 의금부가 전국적 가뭄에 따른 지방관 처벌의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던 불명예 퇴진 하급관리 김홍도를 위해, 그것도 고작 종6품에 불과한 사능 김홍도 1명만을 위해 국왕이 직접 손수 인사명령을 내리면서 “군직에 붙여 정식 관복을 착용한 채 (의궤청에) 상근토록 하라.( 『일성록』1795년 윤2월 28일 및 『원행을묘정리의궤』 권 2 : 전직 현감 김홍도를 군직에 붙여 정식 관복을 착용한 채 상근토록 해당 부서에 구두전교하다 = 前縣監金弘道令該曹口傳付軍職冠帶常仕)"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영광을 내린다. 전권을 장악한 실세 국왕이 종6품 하급관리를 대상으로 '군직 부여ㆍ정식 관복 착용ㆍ상근'이라는 파격적인 인사를 내린 것은 스파이의 화려한 복귀를 전제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해석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의궤청에) 상근하라는 인사명령이 위장근무였음도 드러난다. 즉, 실제는 초계문신 황기천(1760~1821)과 함께 일본 잠행의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것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