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 172

자유수호평화박물관 - 베트남 참전 기념탑

기념탑의 의미 높이 솟은 팔각의 본체기단에는각군의 사령부 및 사단8개 참전부대 마크와 참전 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1964년 9월22일부터 파병하여 1973년 3월23일 까지 8년8개월 전투임무를 마치고 개선 귀국할때 까지를 기리고자 기념하여 탑 높이를 8m 80cm로 하였으며, 탑 상단에는 우주속에 지국를 높이 받들고 그 위 비상하는 비둘기는, 동두천시를 대표하는 새로서 세계의 평화와 사랑을 상징하는 표상의 뜻으로 조각하였다. [2005년 9월 1일 베트남 참전 유공자회 동두천시 지회]

갑곳 선착장 강화양민 학살지

갑곳 선착장 강화양민 학살지 강화지역 민간인 학살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1·4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강화경찰서장의 지시에 따라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강화(강화도·석모도·주문도)지역 민간인 430여 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특공대는 민간인들이 북한 점령 시기 부역혐의자와 가족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했다. 희생자 430여 명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39명으로 여성이 42명(30%), 10대 미만이 14명(10%)을 차지하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학살이 일어난 곳은 강화도 갑곶나루·옥림리갯벌·월곶포구·돌모루포구·철산포구·온수리·사슬재·선원 대문고개·매음리 어류정 등지이다. 당시 학살지였던 갑곶나루가 현재 갑곶선착장이다. 강화군 관계자는 “공간 부족으로 위..

강화도 산이포

산이포 사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 회,강화(강화도,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2008. 1951년 1월 3일 부터 중순에 걸쳐 양사면으로 파견나온 강화 특공대가 부역협의자 및 그 가족들을 연행하여 철사포구로 들어오던 피신 귀향자들을 전부 살해한 사시리, 강화특공대 철산파견대 대장 홍종택, 인화리 파견대장 계현성, 양사면 소년단 김종법, 한재한, 한규호, 한상식의 증언과 신청인인 김의용, 이정희 전종국, 참고인 이순희. 오옥자의 관련 진실을 통해 확인 되었다. -덕화리 김00씨의 증언 1.4후퇴 당시 산이포(천신뿔)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가 개에서 배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목격하였음, 당시 강화특공대가 이들에게 솔가지를 붙여 배로 던졌고, 배에 타고 있던 1백여 명의 주민들이 모두 학..

강화도 UN 8240 을지 타이거여단 충혼비 (교동도)

유격군 충혼 전적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950년 6.25남친전쟁에서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 탈환후 1951년 1.4후퇴 때에 북한 지역과 38도선 접경지대에 거주하면서 치안대, 청년단, 학도호국대 등으로 반공결사대를 조직하여 공비소탕과 치안사업에 헌신한 청년방위군 등은 육군 ' 을지 제2병단" 으로 편성된 후, 극동군사사령부 주한연락처 (제8240부대)에 예속, 이후" 타이거여단"으로 개편된 반공유격대원으로 북한 연안일대와 적지내륙 등지에서 첩보전을 수행하며 도서지역 및 해상 방어 작전에서 유격전을 전개 하였다. 한편, KLO부대는 1950년 9월14일 인천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여 함정 261척이 안전하게 수로에 진입하게 하는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강원도 화천 (꺼먹다리)

화천(華川) 꺼먹다리 : 국가등록문화재 꺼먹다리는 1940년대 화천댐과 화천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세운 폭 4.5m, 길이 204,84m의 다리이다.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기둥 위에 철골 구조물로 뼈대를 세우고 마지막으로 나무를 올려 완성하였다. 다리에 사용한 나무는 네모난 모양으로 깍은후 대각선으로 놓았으며, 부식을 막기 위해 콜타르를 칠하였다. 이콜타르의 색이 검어서 다리도 전체적으로 검은색을 띠므로 '거먹다리'라는 이음이 붙었다. 한국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꺼먹다리가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였기 때문에 남과 북이 다리를 폭파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그래서 꺼먹 다리에 총알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지만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 되었다. 꺼먹다리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보수공사를 ..

강원도 화천 수력발전소

화천수력발전소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한강 유역의 전원개발을 위해 당시의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에 의하여 총 설비용량 10만8000㎾, 총 저수량 10억2000만㎥의 댐수로식 발전소를 착공, 1944년 5월에 2만7000㎾용량의 제1호기가 준공되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제2호기가 준공되었으며 제3호기는 기기설치 도중에, 제4호기는 기초공사 완료 후에 각각 광복을 맞이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발전소는 38도선 이북에 위치함으로써 민족의 수난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해야 했다. 1946년 5·14단전 후 우리는 심각한 전력난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북한은 일부 시설만을 가동하여 38도선 이북의 강원도 북부지역에만 전력을 공급하였다. 그 뒤 시설이 불필요하여 제2호 발전기를 규모와 낙차가 비슷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