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 172

육군박물관 (베트남파병)

국군의 베트남전쟁 파병 대한민국의 베트남전쟁 파병은 1964년 5월9일 미국의 존슨대통령이 대한민국을 포함한 자유 우방 25개국에 남베트남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에 의해 시작되었다.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의원 및 태권도교관단이 최초로 파병되었으며, 1965년 3월에는 비전투부대인 2천여 명 규모의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이 추가 파병되었다. 이후 베트남전쟁의 상황이 격화되자 미국의 추가 파병요청을 하였다 이에 대한민국은 1965년 9울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10월 제2해병여단(청룡부대)과 수도사단(맹호부대)을 파병하였다. 이어서 1966년 9월에는 제9사단9백마부대)을 추가 파병하였다. 또한 전장에서의 원할한 군수조달을 위하여 제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를 창설하였으며, 해군 수송전대(백구부대)..

육군박물관 (6.25 유엔군의 참전)

유엔군의 참전과 활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이 확인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신속하게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6월26일 안정보장회의에서 북한군의 대한민국 침략 중지 내용을 담은 제1차 결의안이 채택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이 없자 6월27일 다시 안정보장회의에서 '북한 침략을 격퇴하는데 필요한 군사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한다.'는 제2차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이 없자 6월27일 다시 안전보장회의에서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필요한 군사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한다.' 는 제2창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유엔회원국 군사적 참여가 즉시 이루어졌고, 6월 27일 미국의 군사지원을 시작으로 연합군의 참전이 시작되었고, 여러회원국들은 군대 및 식량, 의약품 제공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육군박물관 (6.25전쟁)

6.25 전쟁의 발발과 전개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부터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한민국 침략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하였고, 결국1950년 3월 스탈린, 5월 중공의 마오쩌뚱에게 남침에 대한 동의와 지원약속을 얻게 되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은 38도선 전역에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하였다. 북한의 전력은 전차 242대, 각종 포 3천여문, 전투기 84대, 병력 약 19만명에 달했지만 대한민국 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나 전투기도 갖고 있지 못하였고, 병력도 10만명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국군의 농번기를 맞아 6월24일 비상 경계령을 해제하여 많은 장병이 휴가,외출,외박을 나간 상황이었다. 이렇게 전력의 역부족과 기습적인 침략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는 등 개전 1개월여 만에 낙동..

육군박물관 (정부수립 &육군의 창군)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육군의 창군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지지를 받아 카이로회담(1943)과 포츠담선언(1945)에서 독립을 약속받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광복이 되자 국내에서는 다양한 사설 국내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미 군정은 이에대한 해산령을 내리고 11월에 을 공표하여 국방사령부(1946년 통위부로 개칭)를 설치했다. 1946년 1월에는 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자리에서 국방경비대 제1연대가 탄생했다. 국방경비대는 곧 조선경비대로 개칭했으며 추가 창설을 통해 총 9개 연대를 두었다. 이후 1948녀네는 총 16개 연대로 증편하고 5개의 여단을 새롭게 창설 하였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공식 출범하였다(9월 5일). 이해 11..

육군박물관 전시 (광복군)

광복군의 활동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민족해방과 독립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하였다. 1940년 11월, 한국광복군은 모병과 선전을 위해 총사령부를 시안으로 이전했으며, 충징에서 파견된 인우너과 군사파견단 인원과 군사파견단 인원을 중심으로 제1,2, 3지대를 조직했다. 이후 1941년 1월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편입시켜 제5지대 까지 조직을 확대했고, 1942년 4월 조선의용대를 편입하면서 제1지대(중칭), 제2지대(시안), 제3지대 (진화)로 재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1941.1..

육군박물관 (의열투쟁 & 독립군)

의열투쟁 의열투쟁이란 소규모조직이나 개인적차원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을 의미한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 하면서 1909년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등 개인적으로 일제와 맞서려는 항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 만주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1920년대 가장 활발하게 투쟁을 전개하여 조선총독 등 일제 고관이나 부역자들을 처단하고 주요기관 파괴에 앞장섰다. 이외에도 대한광복회, 대한애국청년단, 한인애국단 등에 소속된 독립단원들의 개별적인 항일투쟁은 일제 강점기간 동안 지속하였다. 대표적인 의거로는 강우규의사의 조선총독 폭탄투척(1919),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1926), 이봉창 의사의 일왕 암살시도와 윤봉길의사의 홍커우공원 폭탄투척(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