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 600

2023-04-30 성공회,구세군,고종의길,서울시청,청계천.

서울주교좌 성당은 주교의 의자(주교좌)가 있는 곳으로 대한성공회와 서울 모든 교회의 중심입니다. 서울주교좌 성당은 바쁜 도심 속에 마련된 거룩한 장소입니다. 한국근현대서 함께하며 예언자의 자취가 새겨진 곳입니다. 언제라고 바라보몀 경건하고, 누구라도 들어오면 편안하고 따뜻합니다. 영혼이 쉼을 얻고, 몸과 마음이 치유됩니다. 이 성당은 이땅에서 이 백성을 위한 선교의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전례를 드리고. 미래건축의 모범이 되게 하자는 염원을 담아 아더 딕슨 (A.Dixson)의 설계로 1926년에 건축하였습니다. 초기 성당은 원래 설게에서 축소한 형태로 건립되었다사, 199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 전통무늬기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물로 991.7제곱미터 면적에..

민영환 자결터. 3.1운동기념비. 승동교회. 탑골공원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장소. 민영환이 자결한 곳은 조계사 경내에 있는 자택이었다는 설과 의관 이완식의 집이었다는 설로 나뉜다. 현재는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시종무관 어담(魚潭)과 김우현 목사, 민병진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의 집에 민영환의 어머니와 가족이 있었기에 자결 장소를 청지기였던 이완식의 집으로 택했으며, 그의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본저(本邸)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결한 당시 모습을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만 목격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종로 하나투어빌딩 앞 이완식의 집 터에 김충현이 글씨를 쓰고 백문기가 조각한 추모 조형물이 ..

천도교서울교구. 독립선언서 배부 터. 경운동 민병옥가옥.

독립선언서 배부 터 인류평등의 큰 뜻과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선언한 '선언서' 에 담긴 가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에서부터 오늘날 헌법 전문에 이르기까지 머리글로 새겨 계승되어 왔습니다. 3.1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 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보성사 (천도교경영, 지금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찍어낸 뒤 신축 중이던 천도교 대교당 마당에 갈무리해두었다가 종교계 학생 대표들에게 미리 나눠주었습니다. 시민참여 이름들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삼일대로 시민공간 사업에는 3천여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서울시 자매도시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교민들과 중국계.일본계 미국인들을 포함하여 2천명 넘는 시민들이 힘을 보탰습니다. 이 길 네 곳에작은 시민공원를 만들고 먼저..

인사동 서울미래유산 (통문관, CAFE: 귀천)

통문관 1934년 창업주로 이겸로 씨가 금항당으로 개업한 이래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고서점으로, 1945년 해방을 맞아 통문관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통문관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서적 전문서점으로 고서 발굴 및 보급에 크게 공한 하였으며 관훈동 일대의 시대적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조계사주변 (보성사터, 숙명여학교터, 신흥대학터. 중동중학교터, 우정총국터, 도화서터, 민영환집터)

보성사 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인쇄소이다. 천도교와 보성사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학교에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은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 간부가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 독립선언서 인쇄 보성사의 가장 큰 ..

자유공원내 (송학동 옛 시장관사) 02-12

송학동 옛 시장관사 중구 응봉산 기슭에 있는 송학동 옛 시장관사는 1883년 인천 개항 후 한세기의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수려한경관과 정원으로 이름이 나 있다. 송학동 옛 시장관사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1900년쯤에는 일본인 사업가의 일본식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과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1965년 인천시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한옥 건물을 신축하고 1966년부터 35년간 인천 시장공관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총17명의 시장이 생활했다. 2001년부터는 인천직할시 승격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재단장하여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탄생 하였다.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02-12

구) 제물포 구락부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도시였다. 다른 개항장과 달리 서양 각국의 외교력과 경제활동이 청.일을 압도적으로 견제하면서 자주적인 개항장으로써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해준 도시였으며, 1901년 6월 응봉산 자락에 건축된 제물포구락부는 그 구심점 역할을 담당한 상징적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 지난 한 근현대사를 시민과 함께 해왓으며, 건축 당시의 외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와 러시아의 건축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근대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1953년 4월부터 1990년 5월까지는 시립 박물관으로 활용되며 인천 시민의 사랑을 한껏 받기도 했었다.2020년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시의 문화재 활용정책 제1호 사업으로 재개관을 했으며, 자주적 개항의 꿈..

자유공원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지. 한미수호 100주년기념탑.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02-12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영어: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은 1882년(고종 19년) 조선과 미국 간에 조인된 조약이다.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선의 전권위원 신헌, 김홍집과 미국의 전권위원 로버트 윌슨 슈펠트 간에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미국 정부의 명을 받은 슈펠트는 처음에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수호 조약을 맺으려고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는 일본 영사(領事) 곤토(近藤眞鋤)로 하여금 동래부사를 방문하고..

차이나타운 (공화춘 : 짜장면 박물관) 02-12

인천 선린동 공화춘 共和春 공화춘의 전신은 산동회관으로 중국인 전용 주거지인 청국 조계지에서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 숙식업소로 시작하였다. 1911년 산동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 (于希光)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개업하였다가 이듬해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국의 봄' 이라는 의미의 공화춘으로 개명하였다. 일제강점기 이래 인천과 서울의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경인지역 최고급 요리점으로 70여 년간 그 명성을 이어왔고, 6.25전쟁 이후에는 짜장면 등 대중 음식을 보급 하였다. 공화춘은 화강암 석축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벽돌조 건물로 화교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이다. 연안부두 신축으로 인천역 일대 상가가 쇠락하면서 1883년 영업을 중단하였고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 (의선당) 02-12

의선당 (義善堂) 1883년 청나라 영사관이 인천 선린동에 설립됨에 따라 선린과 북성 두 동은 화교들이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점차 차이나타운(청관)거리가 되었다.. 그해 인천에 체류하던 화교들은 후에 고향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작은 묘당을 건립하였고 '의선당' 이라고 불렀다. 정전은 부처님의 광명이 비추는 과세음보살, 용왕신, 의를 중하게 여기기를 천년에 이어 간다는 관공(관우), 마조선, 호삼할아버지등 다수소상을 모시는 것 외에도 다양한 민간 신앙신을 모신다. 의선당은 중국인들이 현지에 거주하고 바다에서 향해하며 무역의 교류나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평안과 화합하기를 기원하고 더욱 화교가 단결하고 정의가 가득하도록 살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