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 600

명성황후 생가 & 감고당 (2024-04-08)

명성황후 생가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85년에는 대대적인 생가 복구가 진행이 되었다. 1996년에 안채가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 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明成皇后 誕降舊里)"(뜻: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명성황후 출생과 가계명성태황후 민씨는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 (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경기도여주 명성황후 유적지 (기념관) 2024-04- 08

명성황후출생 연도 / 1851년(철종 2) /사망 연도: 1895년(고종 32) / 본관: 여흥 /출생지: 경기도 여주 / 관련 사건: 임오군란|갑신정변|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명성황후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이다. 1851년(철종 2)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왕비로 간택되었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척족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협력자로 나서서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립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거듭된 국내 정변의 중심에 있었고, 청·일의 간섭으로 인한 혼란 속에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이 살해했다. 사후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후로 추숭되었다.민..

근현대사 인물산책 (함태영.차미리사 집중탐구) / 2024-03-13

함태영 (咸台永) 1949년의 함태영 /대한민국의 제3대 부통령/임기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출생일 1872년 10월 22일/출생지 조선 함경도 무산군 무산읍/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사망일 1964년 10월 24일(92세)/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가 396번지/(고혈압과 노환의 합병증으로 병사)/국적 대한민국 학력 한성법관양성소 졸업/주오 대학 정치학과 1년 중퇴/평양신학교 졸업/경력 한국신학대학교 재단 이사장 독립촉성중앙회 최고위원/자유당 상임고문/정당 무소속/본관 강릉/부모 함우택(부), 원주 변씨 부인(모)/배우자 밀양 손씨 부인(사별)/전주 최씨 부인(재혼)/고숙원(삼혼)/자녀 아들 함병철, 함병승, 함병창, 함병서, 함병욱, 함병소, 함병춘,..

골목길투어 부암동 일대 (2024-03-06)

창의문 彰義門 시대 1396년 (태조5년) .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이 만나는 곳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41년(영조17)에 다시 세운 것으로,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문루에 걸어 놓았다.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인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창의문 彰義門 서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四大門), 그 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 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

남양주 이석영 기념관/리멤버1910 (2024-03-10)

이석영 (독립운동가) 이석영(李石榮, 1855년 ~ 1934년 2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855년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이 나라를 빼앗자 이석영은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 생활비를 마련하여 형제들하고 같이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경학사·신흥무관학교의 창설 운영자금으로 헌신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이석영은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녔다.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동아일보 1934년 2월 28일자 기사. 이석영의 장남인 이규준(1899 ~ 1927)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일제의 밀정인 김달하 등을 암살하고 한커우(漢口)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29세의 나이로 암살당해 사망하였다.

윤동주 문학관 (2024-03-06)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호는 해환(海煥)이다. 1917년 12월 30일 동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이다. 명동촌은 동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동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동간도 최대의 한인촌을 형성했다.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수학하였고, 광명중학교와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생애 : 동영상 캡처) 2024-03-06

생애 초반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에 거주하다가 1886년 길림성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독실한 장로교회 장로인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명동학교의 설립자인 김약연의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세기 말 조선인들이 간도로 대거 이주하게 된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간혹 미국의 청교도처럼 종교적인 이유에서 새로운 촌락 공동체를 건설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구세동(救世洞)·영생동(永生洞)·낙원동(樂園洞)·명신동(明信洞)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달리 유교를 신봉한 김약연은 처음에는 맹자의 정치철학에 입각하여 '신(信)·식(..

청와대 사수: 정종수 경사 순적비 & 최규식 경무관 (2024- 03-06)

정종수 경사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이다. 생애 1935년 7월 17일 경상북도 상주군(現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에서 아버지 정진성(鄭陳成)과 어머니 전암분(全岩分)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954년 상주공립농잠중학교(現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1960년 12월 21일 경찰공무원에 입직했다. 재직 중에 유도 초단을 취득했으며, 서울특별시 경찰국 기동대를 거쳐 1967년 1월 서울종로경찰서 수사2계 폭력반에 배치돼 형사(순경)로 근무 중이었다. 1968년 1.21 사태 당시, 그는 서울종로경찰서 관할 자하문검문소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1월 21일 밤 10시 1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검정동(現 종로구 부암동) 세검정고개에서 서울종로경찰서장이던 故 최규식 경무관, 박..

서울 문래창작촌 (2024-03-14)

자생적 예술마을 : 문래창작촌 문래동에는 1941년 오백채마을 (영단주택단지)이 생기고 60년대부터 이곳에 철공단지가 조성되어 80년대까지 철강산업의 호황기를 누렸지만 90년대 이후 금속제조업의 침체로 문을 닫는 철공소가 늘어났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작업 공간이 필요한 예술인들이 문래로 유입되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문래역 일대는 철공소 옆에 예술가들의 공방과 전시품, 레트로 감성의 카폐와 식당이 함께 존재한다. 도보관광을 통해 천천히 숨은 작품 찾기를 시작해보자.

의정부시 송산 사지 (2024-02-25)

송산사지(松山祠址) 송산사지(松山祠址) 는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에 있는,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 왕조와의 절개를 지킨 조견, 원선, 이중인, 김양남, 유천, 김주 등 여섯 분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 있던 터이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송산사지(松山祠址)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 왕조와의 절개를 지킨 조견, 원선, 이중인, 김양남, 유천, 김주 등 여섯 분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 있던 터이다. 조선 정조 22년(1798)에 건립되 '삼귀서사(三歸書社)'라 하였는데, 순조 3년(1803)에 '송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고종 5년 (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건물은 헐려 없어졌고, 1892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