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2.한국사일반

유배, 권력의 뒤안길

동방박사님 2022. 7. 18. 16:43
728x90

책소개

유배를 통해 읽는 정치와 권력 다툼의 파란만장한 역사

왕권 다툼에서 밀려난 왕족들, 붕당 다툼으로 인해 유배와 해배를 거듭한 관료들, 선대의 죄로 인해 길고 긴 유배살이를 하게 된 왕족과 양반들…… 그들은 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책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배의 역사를 통해 당대의 정치상과 생활상을 알아본다. 유배는 단순한 형벌 제도가 아니라 정치와 권력 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유배는 정치적 도구로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었는데, 유배를 가기까지의 과정에서부터 유배형의 수준, 풀려나는 시기, 이후의 생활까지 모두 그때의 정치 논리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 책은 유배라는 소재를 통해 당대의 권력 구도와 정치 쟁점들을 알아봄으로써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이에 더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유배 생활의 면면과 유배인 각자가 지닌 개인적이고 드라마틱한 삶의 모습들은 독자들의 흥미를 배가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목차

1부 유배를 떠나는 사람들
·최고의 묘수, 유배형
·죽을 고비를 넘기며 떠나다, 유배길
·죄지은 자가 사는 곳, 유배지

2부 망국의 왕과 신하들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린 마지막 군주들
측근의 배반으로 무너진 의자왕
당나라에서 벼슬을 한 보장왕
·잇따라 유배되는 고려의 군주들
유배 길에 살해된 목종
연못에 수장된 의종
권좌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한 명종
유배인에서 왕이 된 강종과 고종
티베트에 유배된 충선왕
유배 길에서 홀로 죽은 충혜왕
어린 나이에 독살된 충정왕
공민왕의 아들
폐가입진으로 열 살에 사사된 창왕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유배되는 고려의 왕족과 신하들
충혜왕의 서자, 왕석기
내 님을 그리사와 우니다니
왕명을 위조한 사람들

3부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 건국의 2인자
·권좌에서 밀려난 조선의 군주들
단종애사
인륜을 거부한 연산군
역풍 맞은 광해군
5년간의 유폐 끝에 권력을 잡은 인목대비
·기묘명현 3인방
전지 없는 후명으로 죽다, 조광조
천추만세에 나의 슬픔 알리리, 김정
등잔걸이에 희망의 끈을 걸다, 기준
·유배 길을 떠나는 조선의 신하들
토사구팽
태종의 분노를 사 유배된 사람들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하다, 황희
사초를 고친 사관들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임사홍
내관과 광대의 직간
자손의 양육일기를 남긴 이문건
너희들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마라
천고의 간흉으로 몰린 정철
옥새를 위조하다
자신을 홀대한 유배지 수령에게 관대했던 노수신
만 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아들은
마음만 아픕니다
〈갑인봉사〉로 유배 길에 오른 정온
보길도에 살다
효도의 중함은 친모나 계모가 다름이 없습니다
할 일 없이 놀고 먹는 사람
·표착한 이방인들

4부 유배인의 뒤안길
·유배되는 조선의 왕족들
역모에 관련되다
끝없이 역모에 시달리는 소현세자의 후손들
사도세자와 왕위에 오르는 후손들
·유배인의뒤안길
파란만장한 삶 끝에 사사된 송시열
말을 지급받은 유생 이필익
왕의 신체 결함을 발설하다
탕평책을 반대하다
유배인의 첫사랑
수령은 큰 도적이고 향리는 굶주린 솔개와 같다
최초의 어보를 쓴 강이천
유배인의 가족들
황사영의 부인과 아들
불가에 귀의하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염려하며
유배지에서도 실학자다운 면모를 잃지 않은 박제가
·나라의 명운과 함께 스러져 간 사람들
대마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최익현
개혁의 칼을 뽑다
갑신정변의 주모자
·먼 바다 섬에 버림받은 사람들
 

저자 소개

저자 : 전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공군에서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졸업논문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좌우이념 대립의 전개양상 고찰」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
 
 

책 속으로

조광조와 사림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정공신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이들을 기용했으나, 조광조의 지나치게 원리원칙적인 태도와 사림들의 정권 장악은 도리어 중종을 옥죄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중종과 조광조는 동상이몽을 하고있었다.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고‘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조광조 등 신진 세력을 끌어들인 것이지 사림들이 추구하는 도학 정치, 이른바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 정치와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개혁에 동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자 출신으로 정치인이 아니었던 조광조는 이러한 중종의 내심을 읽지 못했다. 때문에 조광조는 훗날 적소에서 “왕이 나를 부를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며 사약을 마시기 전에도“이럴 리가 없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중종이 자신을 ‘토사구팽’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만큼 순진하고 고지식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날 사관은“그를 죽인 것도 왕의 결단이다. 왕이 그를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마치 두 왕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적었다.
(...)
적소 주변은 날카로운 가시나무로 겹겹이 높게 세워 울타리를 처마 끝까지 둘러 적소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는듯하였다. 환히 밝은 낮인데도 방 안은 어스름하였으며, 공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막혀 있었는데, 방 안에서 고개를 내밀어 위를 쳐다 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바깥 4면에 사령들이 작은 막사를 지어 경비까지 하니, 토착민들은 이곳을‘산무덤’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준은 “해가 떠도 어두움을 밝히기는 어렵고, 바람이 불어도 마음이 답답하고 쓸쓸함은 끝이 보이지 않다.”라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는 완전히 차단되고 무료한 유배 생활을 달래기 위해 재미있는 일을 한 가지 하였는데, 바로 방에 놓인 사물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과 대화한 것이다. 이는《육십명》이라는 책을 통해 남겨졌는데, 창문은시창, 등잔걸이는 집희경 등 60가지의 사물에 각각 이름을 붙여 글을
썼다. 창문을‘시창(북쪽으로 난 창)’에 비유한 글에는“창문을 아침보다 나중에 열지 않고 저녁보다 먼저 닫지 않으며”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는 유배 생활 동안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선비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등잔걸이는 ‘집희경’이라 하였는데, 〈등잔걸이의 “불빛이 다하는 것은 기름이 말라서 없어진 탓이며…… 그 밝음을 내내 이어가야지.”라는 표현은 그가 미래(해배)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 3부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출판사 리뷰

당대의 권력자들이 지우려 했지만 역사 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유배인들

“바다로 흘러들어간 강물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듯이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못한다”라는 의미의 유형(유배). 유배는 중한 죄를 범한 경우 사형보다 한 등급 낮추어 내리는 형벌로, 원칙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귀양지에서 살게 하는 천혜의 형벌이었다. 원래 고급 관리용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이는데, 주로 정치적 이유로 밀려난 왕, 왕족, 관료들이 유배를 가곤 했다. 따라서 법을 만드는 관리들이 자신이나 후손이 형벌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해 둔 것으로 보인다. 상대파의 인사들을 한 옥에 가두어 두고 훗날을 도모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뿐더러 자신이 벌을 받아도 풀려난 후 관직에 복귀할 길을 터놓는 묘수였던 것이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 초기까지는 주로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왕 혹은 정치적 이유로 폐위된 왕들이 유배형에 처해지곤 했다. 특히 고려 말 원 간섭기와 무신정변 등으로 왕권이 추락한 시기 왕들이 교체되면서 왕과 왕족들의 유배가 빈번해졌으며, 조선 중기까지 쿠데타 등으로 인해 세 왕이 유배형에 처해진 바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붕당으로 인해 수많은 선비들이 유배를 가곤 했다. 정계의 판도가 변화함에 따라 오늘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내일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외지로 쫓겨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당시 정치인들은 사화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때로는 권력형 비리를 이유로, 때로는 왕의 정통성을 위협한다는 이유 등으로 유배인이 되곤 했다.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 역시 그때그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풀려났다 다시 유배를 가게 되는 일도, 관직 불복귀 조건으로 풀려나는 일도 있었다. 즉, 법의 정당성보다는 권력 다툼으로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이런 불이익을 감수하고 불합리한 정책이나 부당한 조정 대사에 대해 목숨을 내걸고 상소하고 간언하였다. 그것이 지식인으로서 진정한 선비의 도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유배를 갔어도 좌절하지 않고 정약용, 박제가, 김정희 등처럼 유배지에서도 학문과 문학의 꽃을 피운 인물들도 있었다.

독자들은 유배의 과정과 유배생활, 해배 이후의 삶까지 드라마틱한 유배인들의 일생과 각각 개성에 따라 유배살이를 하는 면면을 흥미롭게 읽어나가다 보면 유배에 대해 알고 있던 것과 오해하고 있던 것을 제대로 되짚어 보는 것은 물론 당대의 정치적 쟁점과 시대 상황을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