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사회학 연구 (책소개)/3.불평등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물건

동방박사님 2022. 7. 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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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요 저작을 다시 만나다!
잘못된 번역어를 바로잡고 용어를 통일한 ‘셀렉션 시리즈’

2017년 1월 9일, 91세 일기로 별세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들은 수년간, 국내에도 바우만의 인기를 입증하듯이 경쟁적으로 번역되었다. 그 책들에는 『액체 근대』, 『유동하는 공포』, 『리퀴드 러브』처럼 그의 이른바 ‘액체 근대’ 연작들도 포함된다. 그런데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바우만이 쓴 특유의 개념인 ‘liquid’를 ‘액체’, ‘유동하는’ 등으로 달리 번역해왔고, 번역하기가 어려웠는지 그냥 ‘리퀴드’로 쓴 책들도 있다. 바우만은 고정되어 있다는 의미인 ‘solid’의 상대 개념으로 ‘liquid’를 썼는데, 전자를 ‘고체’로 후자를 ‘액체’로 번역하기도 해, 바우만의 대표작 중 하나인 『Liquid Modernity』(2000)는 『액체 근대』라는 제목을 달고 2009년 국내에 번역되었다. 바우만은 오늘날의 문화를 ‘liquid modern world’라고 칭하며 그 중요한 특징으로 그려낸 학자로 유명하다.

이렇게 바우만의 중요 개념인 ‘liquid modern’에서 ‘liquid’를 ‘액체’ 혹은 ‘유동하는’으로 번역하는 것도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modern’을 근대로 옮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2013년 바우만의 책 『유행의 시대(Culture In A Liquid Modern World)』를 출간한 오월의봄 출판사는 책의 보도자료에서 “바우만의 ‘모던’이 근대를 가리키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바우만은 ‘modernity’의 두 국면을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그 올바른 역어가 ‘현대성’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근대’라는 역어는 그 단어가 ‘현대성’의 첫 번째 국면을 가리킬 때만 올바른 단어다. 그리고 그 현대성의 첫 번째 국면에서는 세상이 유동적(liquid)이지 않고 견고(solid)했다. 따라서 ‘유동하는’ 또는 ‘액체’라는 표현은 절대로 ‘근대’라는 단어를 꾸미는 말이 될 수 없다. ‘근대(近代)’라는 말이 바우만의 의도대로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시민사회가 성립한 17~18세기 이후 시대’를 지칭하는 표현인 한.”이라고 밝히며 기존에 잘못된 번역어를 바로잡는다고 밝혔다.

동녘출판사에서 이번에 출간하는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는 이렇게 그동안 논란이 되어온 바우만의 중요개념을 바우만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들과 논의를 거쳐 일관성 있게 통일했다. 논란이 되어온 ‘liquid modern’을 이 시리즈에서도 ‘유동하는 현대’로 번역했다. 또한 오역을 바로잡고 용어를 통일했다. 이 시리즈는 앞으로 바우만의 중요 저작이지만 국내에 절판된 바우만의 책들[『새로운 빈곤(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 등을 새롭게 번역하고, 더불어 번역의 문제점 등이 제기되어온 동녘에서 출간한 바우만의 책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 등을 새롭게 번역하거나 보완해서 재출간할 계획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우리는 오늘날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
2장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3장 새빨간 거짓말, 그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4장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저 :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한 후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 바르샤바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

역 : 안규남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칼 마르크스』 『간디 평전』 『민주주의의 불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위기의 국가』 『인간의 조건』 『평등은 없다』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으며, 『철학 대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책 속으로

전 세계가 필사적으로 경제성장 근본주의를 밀고 나가는데도,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생각있는 사람들이라면, 잠시 멈춰 서서 부의 재분배로 인한 부수적 피해자에 대해서만큼이나 직접적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강철 체력을 갖춘 겁 없는 등반가라도 건널 수 없을 만큼 이미 깊은 심연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그 자체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 pp.10~11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며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 pp.22~23쪽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갈수록 해로움만 더해가는 집단적 경험을 통해 접하는 ‘경제성장’은 도처에서 분명히 목격되는 끔찍한 사회문제들에 대한 보편적 해결책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을 지속시키고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 pp.66~67

세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그럼에도,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한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 p.132

약자들이 스스로에게 내린 사회적 열등함의 선고는 선고로만 그치지 않고, 부정의한 불평등 자체에 대한 반대는 물론이요 가벼운 불만의 속삭임조차 집어삼켜버릴 뿐 아니라 승자가 보내는 연민이나 동정도 받아들인다. 이제 상황에 대한 이의 제기와 상황을 지속시키는 생활 방식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잃어버리고 도둑맞은(하지만 표면상 양도 불가능한) 인권, 즉 존중되어야 하고 그 원칙들이 인정되고 동등하게 제공되어야 할 인권에 대한 정당한 옹호로 여겨지지 않는다. --- p.84

세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그럼에도,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한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 p.132
 

출판사 리뷰

왜 1%의 부에 침묵하는가?
바우만, 침묵하는 99%에게 묻다!

오늘날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이 벌어들인 재산은 가장 가난한 10억 명 재산 총합과 같다고 한다. 바우만에 따르면 20대80의 사회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다. 1대99의 사회도 아니다. 더 정확히는 ‘0.1대99.9’인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2018년에 발표된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토마 피케티, 이매뉴얼 사에즈 등 전 세계 경제학자 100여 명이 거의 모든 나라의 소득, 자산 불평등 데이터를 수집해 작성한 보고서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http://wir2018.wid.world)은 지난 37년간 세계 상위 0.1%인 760만 명이 얻은 부가, 하위 50%인 38억 명에게 돌아간 몫과 같은 수치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말로만 들었던 ‘0.1:99.9’ 사회가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의 빈부 격차는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고, 중동이나 인도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극단적 수준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이 보고서는 세계 상위 1%(약 7600만 명)의 부유층이, 1980년부터 2016년 사이에 늘어난 부 중에서, 27%를 가져갔다고 밝혔다. 나아가 최상위 0.1%(760만 명)는 13%, 0.001%(7만6천 명)는 4%를 차지하는 등 부자들 사이에서도 큰 격차가 존재하며, 극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심화되어 왔다고 분석했다. 주목할 것은, 하위 50%와 상위 1% 사이에 있는 약 40%에 해당하는 글로벌중산층이 이 기간에 이룬 부의 성장률이 ‘0’에 수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간 ‘낙수효과’를 운운하며 ‘파이(경제성장)’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주류 성장론자들의 논리가 허구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동하는(liquid)’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현대 사회를 분석해온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간에 격차가 날로 커지는 구조에서, 희생자들 사이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는커녕 오히려 부자 감세와 복지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심해지는 빈부격차에 우리는 왜 분노를 터트리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긍정하는 찬사만 늘어놓고 있을까. 왜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불평등을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바우만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우리는 이 거짓 믿음을 인간의 힘으로는 맞서거나 개혁할 수 없는 ‘당연한 세상 이치’로 오해하고 있다. 가장 비근한 예가 ‘낙수효과(Trickle Down)’ 이론이다.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주장으로, 정부가 경제 정책을 대기업 중심으로 운용하며 늘 동원하는 논리다. 결국 이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은 공동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사회적 기회는 기득권자들이 독식하며 양극화의 심화와 승자독식이라는 불평등은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되었다”라고 역설한다.

소비=행복·경쟁=사회 정의……
거짓 믿음에 깃들여진 사회 현실을 고발하다!

바우만은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는 계층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대표적인 거짓말로 다음의 네 가지를 꼽는다. ①경제성장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 ②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가 행복을 충족시켜 준다는 믿음, ③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라는 믿음, ④경쟁은 사회질서의 재생산과 사회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받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수에 대해 과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면에는 개인 능력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기 때문이라고 바우만은 지적한다. 특히 이 믿음에 저항하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체념하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저자는 불평등이 지금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을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어쩔 수 없이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는 ‘열등의 선고’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렇게 우리가 선고 내린 불평등이 ‘정당한 불평등’이 되는 순간, 불평등은 반대하거나 개선해야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저자가 지적했던 대로 그것은 바로 불평등을 영원히 멈추지 않는 ‘영구기관’으로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양극화’ 문제도 이야기한다. 평균소득끼리 비교한 결과 “오늘날 세계 최고 부국인 카타르의 1인당 소득은 최빈국 짐바브웨의 428배에 이른다.”면서 “전 세계가 필사적으로 경제성장 근본주의를 밀고 나가는데도,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고 꼬집는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간격이 커지는 양극화를 우리가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를 해체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에 바우만은 “상이한 개인들을, 상이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잠재력을 펼칠 능력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상이한 능력을 타고나는 것으로 상정한다.”면서 “우리는 큐가 보내는 방향대로 당구대 위를 움직이는 당구공이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여전히 문제는 불평등이다
우리가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바우만은 불평등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으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내린 ‘열등의 선고’를 거두라고 말한다. 불평등에 반대하고, 그것을 개선 대상으로 상정시키는 일이 거기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우리를 옥죄는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손쉽게 타협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자는 “패배라는 것이, 임박한 파국에 맞서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저 무지 그리고/혹은 무시로 인해 승리에 실패했음을 의미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거짓 믿음들을 버리기만 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조화된 현실의 힘, ‘운명’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거짓 믿음에 근거한 잘못된 선택이 바로 우리를 옥죄는 구조화된 현실을 만들고 공고히 하는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고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 그리고,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하라고 강조한다.

현 정부에서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같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의제들이 논의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제가 연속성을 지니거나, 현실에서의 실현까지는 성사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불평등에 대해 침묵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무수한 불평등 앞에 “어쩔 수 없다”거나 “스스로를 탓하라”며 외면하고, 어느새 사그라진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다시금 요구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바우만은 책의 끝머리에서 이런 우리에게 만약 그렇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았다고 말한다. “그냥 외쳐라!” 단순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뀔 수 있음을 역설하는 바우만, 이 책을 다시 읽으며 그가 무척 그리운 것은 바로 그런 단순하게 보이는 그의 외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