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6.중국공산당

린마을 이야기

동방박사님 2022. 10. 4.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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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국 동남부 연안지역의 린 마을에 사는 한 공산당 간부의 눈을 통해 지난 40년간 중국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 나아가 한 마을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현재의 중국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미래의 중국을 가늠케 해주는 인류학적 보고서이자 드라마틱한 이야기.

목차

1판 서문(버나드 갈린)
2판 머리말
감사의 말

서론

역사적 맥락에서 본 중국 농민
이 책에 대하여
이 책의 의미

1. 프롤로그

내가 이곳에 온 것에 대한 성찰
린 마을의 첫인상
얼굴 익히기

2. 가족사

무덤으로 산책가다
풍수의 중요성

3. 해방

토지개혁
학창시절

4. 굶주림, 굶주림

대약진운동
정치활동가가 되다

5. 활동가가 되다

사청운동
정치운동

6. 귀향

한 농민의 이야기
문화대혁명
예 서기의 결혼과 가족

7. 공안 주임

예 서기가 분쟁을 해결하다
마을 내부의 갈등
그 밖의 마을 범죄들

8. 번영기

번영의 전략
뒷거래

9. 해체

축하의례
축하의례: 분석
분가
집체의 해체

10. 마을 간부들

가족계획운동
정책 수행
예 서기의 분석
중재자로서의 예 서기
예 서기의 프로그램들

11. 1990년대 마을의 변화

마을 인구
인구증가와 관련된 사회문제들
마을 방범대
마을 내에서의 절도

12. 린 마을은 어디로?

린 마을의 최근 변화
예 서기의 여성 접대부
마을 당 선거
린 종족의 부활
투표하기
선거에 대한 예 서기의 분석과 왕정순을 위한 안배

지은이 주/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저자 소개

옮긴이 : 양영균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중국 농촌의 기층간부의 위치와 역할의 변화를 통해 본 국가-사회 관계」, 「기업가의 활동과 경제 변화: 개혁·개방 시대 중국의 한 농촌마을의 사례」 등이 있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류학전공 조교수이다.
저자 : 황수민
1945년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고,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자 가족과 함께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국립타이완대학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1975년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 인류학과 교수 겸 학과장이다. 황수민은 문화인류학자로서 중국 농촌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우선적인 연구주제로 삼고 있다. 그는 다양한 중국, 즉 본토, 타...
 

책 속으로

1984년 11월 초 린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 지역의 고요함과 경치에 매료되었다. 멀리서 보면 마을은 반짝이는 무성한 푸른 논 위에 우뚝 서 있다. 마을의 새로 지은, 그리고 화려하게 칠을 한 많은 2층 건물들은 마을사람들이 새롭게 획득한 부를 상징했다. 이 새 집들 대부분이 철근, 유리창, 시멘트 외벽과 같은 현대적인 건축재료를 사용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건축 양식과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어서 새것과 옛것이 잘 어우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주택의 1층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있고 앞쪽에 네 개의 작은 방―부엌, 식당, 욕실, 농기구와 잉여농산물을 보관하는 창고―이 있다. 그 뒤편에는 세 개의 더 큰 방이 있는데, 가운데에 거실 또는 객실로 사용하는 방이 있고 양쪽에 침실이 두 개 있다.

1층의 가운데에는 가족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널따란 안마당이 있다. 또한 농부들은 대부분 장식을 위해서 마당 중앙부에 있는 질그릇 화분에 키 작은 금귤나무를 심는다. 원형 또는 타원형의 이 과일을 미학적인 이유에서만 키우는 것은 분명 아니다. 대부분의 중국 장식품들은 실용적인 가치와 미적인 가치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머물렀던 집의 주인 아주머니는 때때로 잘 익은 금귤을 한 손 가득 따 설탕물에 조려서 일종의 오렌지향이 나는 시럽을 만들곤 했다. 그것은 내가 마을잔치로 숙취를 겪을 때마다 그녀가 나에게 만들어 준 숙취제거제였다. 심리적인 이유였을지 모르지만 이 요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마을주택의 1층은 주로 화강암판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채석장에서 끌로 잘라낸 것인데, 마을사람들은 바닥, 내벽, 때로는 심지어 천장을 만들 때에도 이것을 사용하고 목재나 철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히 목재와 철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이 지역의 특수한 상황에 사람들이 토착적인 방식으로 적응한 결과인 것 같다. 그래도 매끈하게 다듬은 화강암판을 차곡차곡 쌓아서 벽을 만들면, 집의 아래층은 훨씬 더 가벼운 2층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마을주택의 2층은 1층 후면에 있는 방 위쪽 중앙에 거실을 만들고 그 양쪽으로 침실 2개를 갖추게 된다. 2층은 1층의 곡물빛깔의 화강암판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 흔히 붉은벽돌과 회반죽을 사용하여 짓는다. 한 대담한 마을주민은 새로 지은 집 2층 벽 정면에 화려한 그림을 붙이기도 했다. 그 그림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가로세로 10cm짜리 채색 사각판을 타일벽 중간에 붙여서 모자이크한 것이다. 그림의 형상은 전통적으로 행운을 상징해 온 용과 봉황이었다. 예술비평가들은 흰색 자기에 녹색·붉은색·노란색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천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마을사람들에게 그것은 확실히 자신들이 최근 들어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마을의 삼면은 푸르고 맑은 물이 차 있는 인공 저수지에 둘러싸여 있다. 저수지 주변에는 중국 남부에서는 보기 드문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마을의 트인 쪽에서 남쪽으로 약 1km 정도 가면 화강암이 노출되어 있는 작은 언덕이 연이어 있다. 회보라빛 암석층이 주변의 푸른 논 위로 당당하게 솟아 있는데, 나는 이 광경에서 오래 전에 타이완에서 본 한 무명화가의 인상파 화풍의 그림을 떠올렸다.

나는 마을에 살면서 아침에는 저수지를 따라 산책을 하고 오후에는 언덕으로 하이킹을 가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나는 마을사람들과 보통사람으로서 서로 어울리며 내 연구주제인 농민들의 변화하는 생활방식을 연구하는 모습도 상상했다. 나는 1984년 11월 초에 이 마을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묵기에 이상적인, 2층이 비어 있는 새 집 하나를 점찍어 두었다. 나는 앞으로 내 집주인이 될 린치산과 내가 여기서 사는 동안 그의 집 2층을 빌려서 하숙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논했다. 내가 알고 있는 타이완 농촌과 홍콩 농촌의 많은 농부들과 마찬가지로 린씨는 내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내가 이 마을에서 매달 보름 정도 머물고 그 기간의 식비로 한 달에 60위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린씨는 집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우리 시골에 사는 농부들은 살려고 집을 짓지 돈을 벌려고 짓지 않습니다. 그냥 들어와서 우리와 삽시다. 전기요금만 매달 나눠서 내면 돼요."

이렇게 모든 것을 합의하고 나서 나는 린씨에게 다음 주에 이사오겠다고 말했다.

내가 소지품을 여행가방 두 개에 꾸려서 린씨 집으로 왔을 때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약간 당황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나에게 이 마을의 공산당 서기인 예 동지라는 사람이 내가 이 마을에 머물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그래서 나를 직접 맞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린씨가 이야기하는 동안 내 눈은 점점 그 방의 어두움에 적응이 되어 갔고 그 방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예 서기는 일어서서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두어 번 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고는 말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마을에서 환대를 받을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 서기라는 자그마한 이 사람이 나에게 '합당한' 요구를 해올 때 나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게 욕을 한바탕 해준 다음, 다른 마을로 옮겨 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그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첫째, 인근에서 동일한 생활여건을 제공해 주면서 이 마을과 비슷한 조건을 갖춘 마을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둘째, 아마 다른 마을에도 예 서기와 똑같은 부류의 탐욕스러운 관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중국에서 어차피 바가지를 쓸 거라면 그 중 제일 조건이 좋은 곳에서 당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샤먼 대학의 숨막히는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나는 형식적인 저항의 말을 몇 마디 힘없이 중얼거리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나는 담배연기 너머로 얼핏 그가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저주를 퍼붓고는 내가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가능한 한 그를 멀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본문 중에서
 
1949년, 그러니까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도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현대사의 거목들임에는 틀림없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이름 없는 다수의 삶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소수의 영웅이나 지도자의 행적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거센 역사의 풍랑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중국 푸젠(福建) 성 남부 연안의 한 농촌 마을인 린(林)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린 마을의 당 서기인 예원더(葉文德, 이하 예 서기로 지칭)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 주변인물들의 인생역정으로 재구성된 중국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서술방식을 인류학에서는 생애사(life history)라고 하는데, 생애사의 가장 큰 미덕은 보통의 역사책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인생>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예 서기의 눈을 통해 본 중국현대사

예 서기의 눈에 비친 중국 농촌사회의 변화는 해방(1949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그의 집은 중농으로 분류되어 토지개혁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지만 지주와 부농은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을 소처럼 일만 했던 무지렁이 농사꾼이었지만, 장남만큼은 잘되어야 한다는 일념에서 학교에 보냈다. 덕분에 예 서기는 린 마을에 사는 그의 동년배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등학교 졸업자였다. 그가 군대를 갔다 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어려서 사고를 당해 다리를 약간 절었다?훗날 당원이 되고 마을의 당 서기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학력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학창시절 그의 아내를 만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닌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졸업 후 정치운동에도 함께 뛰어들었다. 그들은 1964년 사청(四淸)운동?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지역의 무능한 간부들을 재교육하거나 제거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정치활동가로서의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같이 활동했던 청년운동가들은 훗날 예 서기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이들이 지역사회 곳곳의 요직에 포진함으로써 예 서기는 중국에서 '관시'(關係)라고 부르는 사적인 인맥을 형성하여 마을이나 마을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 서기는 공산주의의 진실한 신봉자였다. 1966년에 공산당원이 되고, 1967년 말에 처음으로 생산대대 서기라는 정규직책을 얻었으며, 1975년에는 생산대대 민병대장 겸 공안주임이 되었다. 그리고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이 종지부를 찍은 1978년에 생산대대 당 서기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조적이고 맹신적인 공산당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대단히 유연한 사고를 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비판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토지개혁이나 대약진운동, 또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정치운동에 대한 평가이다.

토지개혁 때 "[우리 집이]'계급의 적'이 되었더라면 나는 입당은커녕 고등학교 진학도 하지 못했을 거고요. 반대로 우리 가족이 '빈농'이나 더 낮은 계급으로 분류되었더라면 권력을 쥐고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끝없는 증오와 폭력의 순환고리의 한 부분이 되고픈 유혹을 받았을 겁니다. ……가끔은 계급투쟁이라는 관념, 그리고 농민을 다양한 계급으로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우리 정부의 근본적인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사람은 똑같이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남보다 똑똑한 사람도 있고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고요. 만약 더 열심히 일해서 토지를 축적한 사람에게 벌을 주고 어리석거나 게으른 사람에게 상을 준다면, 그것은 인민들과 다음 세대에게 잘못된 교훈을 전달하는 거예요. 해방 전에 열심히 일했던 부모나 이웃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자란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혁신적이 되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어요?"

또 대약진운동 당시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그는 "만약 모든 사람이 마오 주석의 지도를 열심히 따른다면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마을 용광로에 쇠를 조금씩이라도 더 보태면,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고 세상 모든 나라를 능가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우리가 대약진운동 기간에 했던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일들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믿어지지 않습니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철강 생산량이 목표치에 도달하면 중국이 자동적으로 공산주의의 낙원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게 했습니다. 대중들이 단순한 정치구호에 얼마나 쉽게 넘어갈 수 있는지 당신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술회한다.

더 나아가 그는 "방관자로서 나는 중국 정치운동의 모순을 완전히 이해하고 평가하기 시작했어요. 항상 어느 정도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그러나 또한 지극히 단순한 구호 뒤에서 몇몇 정치인들은 청년들의 광신적인 열광을 선동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공허한 약속에 숨겨져 있던 것은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하는 몇 사람의 개인적 탐욕일 뿐이었습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청년들은 그들을 위해 최상층의 몇몇이 그려낸 이상적인 이미지에 속았던 것이지요. 청년들은 비현실적인 교의를 위해 자신들의 시간, 에너지, 때로는 목숨까지도 희생했어요. 문화대혁명의 열광과 광란을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이 이전의 운동에서 이런 의식 없는 청년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나는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하나의 역사적 과오가 아니었을까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고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하지만 집체체제에 대해서는 지지를 분명히 했다. 집체체제가 없었다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주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이 예 서기의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