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인물사 연구 (책소개)/2.한국인물평전

김재익 평전

동방박사님 2022. 12. 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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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한민국에 진정한 자유 시장경제의 씨앗을 심은 김재익

불과 30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허약하기 짝이 없는 나라였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일상화되었고, 경제의 전권은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이 아니라 위정자의 머리에 있었다. 물가는 급등했고, 저축률은 떨어졌으며, 내수시장은 얼어붙었고, 기업 경쟁력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김재익은 암울했던 그 당시 40대의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경제의 문제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간파하고 이를 바로 잡은 인물이었다. 그는 ‘5공화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권한을 오로지 ‘시장을 바로 잡는 것’에만 쏟아 부었다.

그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임하던 시절 금융실명제가 추진됐고, 예산이 동결됐으며, 물가가 잡혔고, 개방 경제의 기틀이 닦였다. 강력한 개발독재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던 대한민국의 경제가 비로소 자유 시장경제라는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남긴 수많은 경제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김재익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유족들이 주도해 발간한 추모집과, 20주기를 맞아 발행됐던 추모기념집 단 두 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김재익 평전-대한민국은 그를 여전히 그리워한다』는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목차

책 머리에
프롤로그 _ 시대의 별, 지다

Ⅰ부 세상에 움트기 시작한 김재익이라는 씨앗
1장 김재익, 태어나서 자라다
2장 스탠퍼드의 수재, 자유주의에 눈을 뜨다
3장 유신 정부 시절, 안정론을 잉태하다

Ⅱ부 꽃을 피웠고, 꽃이 졌다
4장 신군부와의 운명적인 만남
5장 기득권과의 싸움이 시작되다
6장 수입 자유화, 그리고 물가

Ⅲ부 우리는 지금… 그를 그리워한다
7장 그의 사후에 꽃핀 한국의 경제, 그리고 김재익의 사상
8장 인간 김재익

에필로그_그를 추억한다(미망인 이순자 교수 인터뷰)
김재익 박사와 함께 한 5년을 추억하며(맹정주)

부록 1_김재익의 마지막 연설
김재익이 걸어온 길
‘김재익 펠로우십’ 발족식에서의 이순자 교수 연설 전문
2011년 서울대 발전 공로상 수상식에서의 이순자 교수 인사말

 

저자 소개

저 : 고승철 (고유, 高惟)
 
부산ㆍ통영ㆍ마산 등 남해안 항구도시에서 감수성 무딘 천둥벌거숭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ㆍ고교 6년간 한글날마다 열리는 교내 백일장에서 한 번도 입상하지 못했다. 관악산 기슭의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주요 신문사의 파리특파원, 경제부장, 출판국장 등으로 활동했다. 까까머리 시절엔 ‘문학소년’과는 무관했으나 20대 후반부터 소설 읽는 재미에 빠졌다. 국내외 명작을 탐독하다 창작판에까지 뛰어들어 『은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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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 2010년 11월, 신문을 보니 미망인 이순자 교수께서 ‘김재익 장학재단’을 만든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평생 모은 거의 전 재산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젊은이들이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에 쓰도록 하겠단다. 장학금의 첫 수혜자로 몽골, 인도네시아 청년이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김재익을 위해 무엇을 했나? 남은 가족은 사재를 털어놓는데, 우리 사회는 그를 위해 뭘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박사에 대한 추모사업이 체계적, 가시적으로 이뤄지는 게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낯이 뜨거워졌다. 후세인들이 너무 무심하지 않나? 혹시 나 자신이라도 뭔가 할 일이 없을까? 고심하다 얼핏 ‘평전’의 필요성이 떠올랐다. 그의 삶과 업적을 객관적으로 기술(記述)한 정통파 평전 말이다.

# 1970년대와 80년대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오로지 모든 요소들을 ‘민주주의에 동참했느냐, 독재 정부에 동참했느냐’로 구분 짓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역사에는 단지 그 두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고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김재익은 철저히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한 테크노크라트였다. 김재익에게 중요한 것은 조국의 발전이었고, 국민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이었다. 김재익 같은 테크노크라트에게 정치 권력 구조란 어찌 보면 적절한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재능을 어떻게 해서든 국민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했고, 오로지 그 일에 매진했던 인물이었다.
김재익이 국보위 참여를 결심했을 무렵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재익의 아들이 “아버지는 왜 독재 정권에 협력하려 하십니까?”라고 항의를 한 것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신군부의 쿠데타는 곧 군사 독재의 연장을 뜻했다. 아들의 항의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김재익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이렇게 답했다.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는 결국 독재 체제를 어렵게 하고, 시장경제가 자리 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아빠가 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 김재익이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있으면서 기득권층과 가장 격렬하게 부딪쳤고, 가장 무참하게 패퇴한 대표적 사건이 바로 1982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이른바 ‘금융실명제 파동’이었다. 김재익은 경제 정의 실현을 이루기 위해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 금융실명제 도입을 추진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 꿈의 실현을 위해 기득권층과 그야말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다. 그의 오랜 벗인 이상우(李相禹) 서강대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그 사건은 “‘정치로부터 경제의 해방’을 추진하려던 김재익과 이를 저지하려던 신군부 핵심들과의 사투(死鬪)”였다. 많은 사람들이 금융실명제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재임 시절 도입된 제도로만 알고 있지만, 그 제도의 도입을 위해 정치적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던 1982년의 김재익이 없었다면 금융실명제는 어쩌면 더 오랫동안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대한민국은 지금 자유 시장경제라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반석을 놓은 이의 이름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에게 진 빚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그의 이름은 김재익.

대한민국에 진정한 자유 시장경제의 씨앗을 심어놓고
30년 전 버마 아웅산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 김재익이다.

김재익, 우리가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

30년 전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에서 우리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인재를 잃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당시 유명을 달리한 인재들 중에서 우리는 지금 유난히 김재익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 30년 사이에 대한민국은 벌써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자유 시장경제라는 든든한 반석 위에서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자유 시장경제의 토대가 허약하기 짝이 없는 나라였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일상화되었고, 경제의 전권은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이 아니라 위정자의 머리에 있었다. 물가는 급등했고, 저축률은 떨어졌으며, 내수시장은 얼어붙었고, 기업 경쟁력은 바닥을 헤맸다.
김재익은 40대의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경제의 문제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간파하고 이를 바로 잡은 인물이었다. 그는 ‘5공화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권한을 오로지 ‘시장을 바로 잡는 것’에만 쏟아 부었다. 그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임하던 시절 금융실명제가 추진됐고, 예산이 동결됐으며, 물가가 잡혔고, 개방 경제의 기틀이 닦였다. 강력한 개발독재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던 대한민국의 경제가 비로소 자유 시장경제라는 대해(大海)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30년이라는 세월 탓에 이제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잊고 지낸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가 남긴 족적을 그렇게 마치 아무 일도 아닌 양 넘어가는 것은 후세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재익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남긴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 지금 올라서 있는 그 든든한 시장경제의 태동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먼 타지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를 추모하며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30년 만에 출간되는 김재익의 일대기

그가 남긴 수많은 경제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김재익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유족들이 주도해 발간한 추모집과, 20주기를 맞아 발행됐던 추모기념집 단 두 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생과 업적을 온전히 기록하고 평가한 평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렸던 김재익의 겸손한 성품 탓에 그의 육성이 담긴 인터뷰 기록물도 전무(全無)한 실정이다.
그래서 이번에 출간되는 《김재익 평전-대한민국은 그를 여전히 그리워한다》는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평전은 그가 남긴 수많은 업적은 물론 한국전쟁 때 아버지와 형제들을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소년 김재익’의 씩씩한 모습부터 45세로 요절하기까지 그의 온 생애를 온전히 담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한국 역사에 독재정권으로 기록된 5공화국의 핵심 관료였지만, 그가 경제 민주화를 통해 얼마나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고자 했던 인물이었는지도 생생히 기록돼 있다.
그 장엄한 기록들을 추적하며 작가들이 느낀 것은 한 가지였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인사의 다음과 같은 김재익에 대한 평가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김재익, 그 이름 앞에 세인트(Saint·聖人)를 붙일 수 없겠소? 그는 한국 경제를 살리려고 순교(殉敎)한 분 아니겠소? 평생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삶을 산 분이오.”

평전이라고 불러도 좋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라고 불러도 좋다.

이 책은 평전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경제 기적을 이뤄낸 1970~80년대 한국의 현대사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격동의 그 시기에 김재익이 남긴 그림자는 짙고 넓다.
1970년대에 김재익이 주도한 부가가치세 제도의 도입, ‘사회 개발’ 개념의 도입, 그리고 1980년대에 그가 이룩했거나 이룩하고자 했던 물가 안정, 수입 자유화, 예산 동결, 통신혁명, 금융실명제 등의 단어는 지금 한국 경제를 든든히 지탱해주는 버팀목 역할을 한다.
한국은 그가 주도했던 안정과 질적 성장이라는 새로운 경제 철학을 바탕으로 1980년대 후반 건국 이후 최고의 호황기를 누린다. 이는 진보와 보수 모든 진영을 망라한 공통된 평가다.
이 평전은 그가 5공화국에 몸을 담았다는 이유로 그를 보수의 한 축으로 평가하는 것을 거부한다. 1980년대 초반 김재익이 추진했던 정책은 당시로서는 실로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것들이었다. 지금도 여러 진보적 매체와 진보 인사들이 김재익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민주정부 시기라고 불렸던 1998~2007년, 그 시기의 경제 정책이 과연 5공화국 경제 관료였던 김재익의 그것보다 뛰어났던가?”라고.

* 김재익이 걸어온 길
ㆍ1938년 11월 26일 김응묵과 강병주 사이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남
ㆍ1956년 경기고등학교 2학년 수료
ㆍ1960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ㆍ1960년 한국은행 입행
ㆍ1964년 서울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국제관계 전공)
ㆍ1968년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경제학)
ㆍ1968~1973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통계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 취득
ㆍ1973년 한국은행 복직(조사1부 근무)
ㆍ1973년 9월~1974년 9월 대통령 비서실 파견 근무
ㆍ1974년 10월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 비서실장
ㆍ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ㆍ1977년 7월 정부, 부가가치세 제도 실시
ㆍ1979년 4월 정부, 4·17 경제안정화 시책 발표
ㆍ1980년 6월 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장
ㆍ1980년 9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ㆍ1980년 9월 정부, ‘독과점 규제 및 공정거래법’ 발표
ㆍ1981년 5월 공정거래위원회 발족
ㆍ1981년 7월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년) 발표
ㆍ1982년 7월 정부, 금융실명제 실시 계획 발표
ㆍ1983년 5월 경제기획원, 수입자유화 추진 계획 발표
ㆍ1983년 5월 정부, 1984년 예산 동결 방침 발표
ㆍ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순직(향년 4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