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인물사 연구 (책소개)/2.한국인물평전

새벽 김대중 평전

동방박사님 2022. 12. 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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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대중 서거 3주기, 김대중을 다시 생각한다

이 책은 2012년 8월 김대중 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아 다시 김대중을 생각하고자 한다. 꿈 많던 섬 소년에서 청년 사업가로, 유망한 소장 정치인에서 대통령의 정적으로, 사형수에서 대통령으로의 인생 역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고,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통과한 김대중 대통령의 고난과 고뇌, 성취와 좌절은 한편의 대하드라마라 할 만하다.

그는 눈앞에 닥쳐오는 시련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개인과 시대의 한계를 극복해간 그 이름은 납치와 사형 선고, 망명 등과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또 정치인으로 살아간 30여 년의 시간은 알알이 대통령으로 귀결되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은 남북 화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 경제 위기 극복 등으로 준비된 대통령으로서의 존재감을 깊게 각인시켰다. 김대중은 시대가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바늘이었고, 한국 현대사는 김대중과 함께 그 한계를 극복해갔다.

하지만 동시에 김대중은 한편으로 빨갱이, 전라도, 거짓말쟁이 등 공격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 책, 김대중 평전은 김대중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오해와 왜곡을 벗겨내고 인간 김대중을 드러내고자 한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라는 신념과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원칙 아래 열정적으로 개인의 인생과 시대의 미래를 개척해나간 정치가이자, 성실하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며 이론을 정립해간 사상가이자 정책가이며, 종교라는 영성의 힘으로 정적들을 용서하고 평화를 얻은 종교인이었다.

저자 김택근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자서전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어 자서전 집필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총 2년여 동안 41회의 구술, 관련 인물들과의 수많은 인터뷰, 김대중 대통령 국정노트, 일기, 육필 메모 등의 미공개 자료들도 섭렵하여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김대중 전문가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서전 집필을 의뢰받고 구술을 시작한 2004년부터 평전의 원고를 마무리한 2012년까지 저자 김택근은 8년의 시간 동안 김대중을 붙들고 살았다. 그는 김대중에게 놓여나지 못했고 짧지 않은 8년의 시간이 평전에 녹아 있다.

 

목차

차례
프롤로그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

1부
연꽃섬, 겁쟁이 울보
혁명과 쿠데타 사이에서
박정희 대 김대중
갑옷을 입다
망명
1973년 8월 8일
유신의 심장이 터지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다
용서의 힘
다시 길 위에 서다

2부
6월, 그 불멸의 시간
일흔에 다시 시작하다
전라도를 아는가
돌아와 돌을 맞다
마지막 도전
저항의 뿌리
4대국 외교, 평화의 그물망
문화 대통령의 힘
인권의 등을 달고, 현대사의 한을 사르고
지식정보 강국, 집념의 매듭
임동원을 얻다

3부
부신 햇볕 잔치
지구를 어머니로, 만물을 형제로
햇볕과 광풍
슬픈 석양
홀로 주먹을 쥐다
퍼주기가 아니다, 퍼오기다
하느님은 아시리라
깊게 울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영면

후기 김대중을 역사에 묻으며
김대중 연보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김택근
 
언론인 김택근은 오랜 기간 동안 기자 생활을 했고,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김대중 자서전』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다. 1990년 겨울, 생전에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던 권정생을 인터뷰한 뒤로 그 인연을 깊이 새기고 있다가 그의 일대기를 이야기로 엮었다. 1954년에 태어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자랐고 동...

책 속으로

대중은 마음이 여리고 겁이 많았는데도 큰일에는 담대했다. 대중은 형제 중에서도 가장 겁이 많았다. 밤에는 옛날이야기 속의 도깨비가 튀어나올까봐 마음을 졸였다. 바람이 불면 마당 한 켠에 있는 측간에 가지 못할 정도였다. 혼자 있으면 귀신이 나올까봐 이불을 뒤집어썼고, 또 어머니가 돌아가실까봐 홀로 울었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뭍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신문 배달을 해서라도 공부를 하겠다고 부모를 졸랐다. ‘비바람이 두렵고, 어둠이 무서웠지만 새벽에 길을 나서고야 말았던’ 김대중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p.23

김대중은 또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보통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신문을 탐독했다. 아버지가 구장직을 맡고 있어서 매일신보가 들어왔다. 며칠이나 묵은 신문이었지만 섬에는 없는 여러 소식이 들어 있었다. 서당에서 익힌 한자 실력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중에서도 정치면을 유심히 봤다. 일본 내각이 개편되면 그 명단을 베껴서 가지고 다녔다. ---p.24

해방 공간은 어수선했고 나라는 국민들의 염원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사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새로운 조국을 건설한다는 희망과 의욕으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그 후 좌와 우로 갈라지면서 숱한 정당이 탄생했다. 김대중은 조선신민당에 입당했다. ‘좌우 합작’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의 독립보다는 소련을 추종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충성을 하자는 움직임을 보였다. “우리의 조국 소비에트 만세” 또는 “붉은 깃발만이 우리의 진정한 깃발”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김대중은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어떤 놈들이든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고, 붉은 깃발을 우리 깃발이라고 하는 놈은 때려 죽여야 한다.” ---p.29~30

“김구 선생이 5.10 총선에 참여했다면 이승만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이 땅에 반공을 빙자한, 친일파에 의한 독재가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우리 현대사 비극의 시작이었다.” 김대중은 훗날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말했다. 그것이 최악의 경우를 막아 결국은 민의를 따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p.30
김대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이미 김대중은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사선을 넘으며 가슴에 새겼다. 부산 정치 파동은 잘못된 정치가 빚어낸 또 다른 비극이었다. 전선에서는 젊은이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오직 정권만을 탐하는 무리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p.38

1954년 목포, 1958년 인제, 1959년 다시 인제. 세 번을 연거푸 떨어졌다. 김대중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쌀이 떨어졌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사람 만나기가 무서웠다. 사람을 피해 무작정 버스를 탔고, 가다 보면 또 마땅히 내릴 곳이 없었다. 청년 사업가로 그간에 쌓은 부와 명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집에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뿐이었다. ---p.43~44

1962년 봄날 김대중은 몹시 아팠다. 앓아누워 꼼짝하지 못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이희호를 만나지 못했다. 아프면 서럽다. 그래서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는다. 이희호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사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바로 찾아갔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척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이희호는 그 말을 듣고 울먹거렸다. 김대중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p.55

하지만 김대중은 국교 정상화에 대한 ‘무조건 반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국익을 위해서 일본과의 수교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었다.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침략자들과 수교를 하는 것은 침략 행위를 용서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였다. 강해져서 다시는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진 기술은 받아들여야 했다. ---p.59~60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정책 선거를 천명했다. 상대 후보 박정희에 대한 인신 공격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정책으로만 승부하기로 했다. 향토예비군 폐지, 미?중?소?일 4대국의 한반도 전쟁 억제 보장(4대국 안전보장론), 남북한 화해와 교류,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과 무역 추진, 대중 경제 노선의 추진, 사치세 신설, 학벌주의 타파, 이중곡가제 실시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p.76

판세가 극도로 혼미했다. 불안해진 정부 여당은 김대중을 용공 분자로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 감정을 조장했다. 그대로 가다가는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빨간색’ 낙인은 김대중이 아닌 박정희에게 찍어야 했다. 만주군 출신의 박정희는 여순 사건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또 형의 좌익 활동 등으로 행적 곳곳이 불온했다. ...... 거기에 비하면 김대중은 ‘가진 자’로 분류되어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할 뻔했다. ---p.85~86

나는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지하 감방에서 취조를 받는 영상을 보았다.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희귀 영상물이었다. 화면은 흐릿했지만 김대중은 군복을 입었고 간간히 담배를 피웠다. 수사관의 말투는 비교적 공손했고, 김대중을 선생님이라 칭했다. 어차피 죽일 대상이었으니 김대중에게는 가혹한 고문을 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p.144

사형수 김대중은 죽음 앞에서도 용서를 얘기하고 있다. 훗날 군사 쿠데타의 머리인 전두환, 노태우를 용서한 것은 이렇듯 감옥에서 이미 결심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자신뿐만 아니라 아우와 자식, 비서, 동지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갔지만 가해자들을 용서했다. 참으로 비범한 일이다. 그렇지만 전두환, 노태우의 중죄를 용서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용서를 넘어 재직 시에는 전두환과 만찬을 하기도 했다. 광주 시민들을 집단 학살한 무리의 수괴와 함께 밥을 먹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희생자 중에는 “김대중 석방”을 외치다 숨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p.160
천하의 김대중도 선거판을 읽지 못했다. 김대중은 당시에 흥분하고 있었다. 김대중을 연호하던 1971년의 유세장 열기가 재연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16년 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국민들의 눈에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후보’가 아니었다. 김대중은 어느덧 빨갱이, 거짓말쟁이, 대통령병 환자, 위험한 과격분자로 바뀌어 있었다. 군사정부의 지속적인 공작에 속속 속아 넘어갔다. ---p.199

김영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지를 짓밟으며 권력을 좇았다. 그 후 김대중의 마음속에서 민주화 동지 김영삼은 사라져 버렸다. 자서전 구술을 할 때 김영삼에 대한 인물평을 묻자 김대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이 흘렀지만 그날은 입을 열지 않았다. ---p.211

김대중에게 정계 은퇴는 가장 효율적인 정치행위였다. 한국에서 패배를 곱씹는다는 것은 근천스러운 일이었다. 지지자들을 볼 염치도 없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세 번 떨어졌으니 국민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 정치판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래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김대중은 그 절망의 시간에 다시 자신을 점검했다. ---p.216~217

그렇게 소문으로만 굴러다니던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 방해 공작이 있었을까? 결론은 ‘실제로 엄존했음’이다. 북유럽에 사람을 보내 유력 인사나 언론인과 접촉하여 부정적인 여론을 전달했다. 또 노르웨이나 스웨덴 내의 여론주도층에 허위 사실을 퍼뜨렸다. ...... 이러한 공작은 김영삼 정부에서까지 계속되었다. 해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니 ‘수상 방해’는 해마다 안기부의 주요 공작이었다. ---p.269

임동원은 감동했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된 분석과 판단은 예리했고 해결책은 명쾌했다. 통일 철학과 원대한 비전, 그리고 논리정연함에 깊이 감탄했다. 김대중의 식견이 두려울 정도였다. 임동원은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인을 다소 얕보고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달랐다. 그 자신이 십수 년 동안 남북문제에 매달려 왔는데도 이렇듯 고견을 지닌 인물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p.313

이 인사말로 김정일은 서방세계의 잘못된 정보가 만들어 낸 유령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성격이 음울하고 잔인해서 기쁨조들과 밤마다 술판을 벌이는 방탕한’ 인물이 아니었다. 김정일은 외세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에 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 상대가 김대중이기에 그는 부풀어 있었다. 김대중은 인사말을 듣고 안도했다. 그를 설득할 자신감이 생겼다. ---p.334~335

2000년은 노벨평화상을 제정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해보다 경합이 치열했다. 35개 단체와 115명이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중동 평화 협상에 주력한 빌 클린턴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김대중이 단연 빛났다. 노르웨이 언론은 “과거에는 이런저런 자격 시비가 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단 한 건의 반대 의견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p.346

노벨위원회 위원장 군나르 베르게는 별도의 해명을 했다. 이는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노벨상은 로비가 불가능하고, 로비가 있다면 더 엄정하게 심사한다. 기이하게도 김대중에게는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 김대중의 수상을 반대하는 수천 통의 편지가 한국에서 날아왔다. 그것이 모두 특정 지역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46

권력형 비리는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2002년 새해 연두 회견에서는 사과부터 해야 했다. 시종 고개를 숙였고 죄송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여섯 차례나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더욱 잔인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아들의 비리 연루 의혹이 불거졌다. 아침 신문 보기가 겁날 정도였다. ---p.367

김대중은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조마조마했다. 소위 개혁 정책이라는 것들이 곧잘 현실을 떠나 이상적이거나 또 소모적인 논쟁을 일으켜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일련의 민주적 조치들은 평가할 만하지만 국민 의사를 수렴하는 데는 문제가 많았다. 김대중은 참여 정부 사람들을 만나면 모든 정책은 “국민보다 반걸음만 앞서 가라”고 당부했다. ---p.388

김대중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고 마지막에는 신 앞에 엎드렸다. 겸손하게 ‘지난날’을 바쳤다. 연금을 당하고 있을 때도 가족, 비서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또 아내 이희호와 단둘이 있을 때도 기도드리고 찬양했다. 납치되어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 예수님을 본 후 하루라도 기도를 쉰 적이 없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느님을 찾았다. ---p.404

살아서 후임 대통령 영전에 꽃을 바칠 줄은 진정 상상도 못했다. 미망인 권양숙을 보더니 한없이 깊게 울었다.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아버지처럼 흐느꼈다. 불행을 막지 못한 것이 자신의 죄인 양 서럽게 울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입을 벌려 울고 있는 모습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p.412

다시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면 그가 올 것이다. 새벽처럼 돌아올 것이다. 죽어서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어진 생을 한 점 남김 없이 태웠다. 온몸을 바쳐 평화를 만들고 그 속에 들었다. 최선을 다해 살았던, 참 아름다운 사람을 역사에 묻고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
---p.439
 

출판사 리뷰

새벽은 눈물로 열렸다.

사형수가, 야당 후보가, 서자가, 섬사람이, 네 번의 도전 끝에, 70대 고령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암흑시대에 지지자들이 흘린 눈물, 그 눈물의 강을 타고 올라가
마침내 단 한 사람이 됐다. 척박한 현대사를 갈아엎는 기적이었다.
우리네 새벽에는 김대중의 눈물이 고여 있다.

“돌이켜 보면 선생은 내 청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낭만적 감성만 과도하게 부풀어 현실 도피를 되풀이하고 있던 내가 부모님의 나라를 방문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재생을 맹세한 학생 시절, 선생은 이미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 존재였다.” _ 도쿄대 교수 강상중

“1960,70년대에 똘망똘망한 정신을 가지고 그 시대의 아픔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김대중은 한 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빛이었고 희망이었고 자유와 진리를 향한 열정의 분화구였다.” _ 철학자 김용옥

김대중 서거 3주기, 김대중을 다시 생각한다

2009년 여름, 우리는 두 명의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바위에서 뛰어내려 비명횡사한 대통령을 슬퍼하던 노 대통령은 불과 석 달 후 세상을 하직했다. 꿈 많던 섬 소년에서 청년 사업가로, 유망한 소장 정치인에서 대통령의 정적으로, 사형수에서 대통령으로의 인생 역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고,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통과한 김대중 대통령의 고난과 고뇌, 성취와 좌절은 한편의 대하드라마라 할 만하다. 2012년 8월 김대중 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아 다시 김대중을 생각하고자 한다. 현대사 초유의 정치 거인이자, 눈물 많은 범부이기도 했던 한 사람의 일생을 돌아보며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되새기고자 한다.

김대중에게 길을 묻는다

기성 정치인 중 유일하게 선생님으로 불렸던 사람, 김대중. 그 이름은 한 사람의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 눈앞에 닥쳐오는 시련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개인과 시대의 한계를 극복해간 그 이름은 납치와 사형 선고, 망명 등과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또 정치인으로 살아간 30여 년의 시간은 알알이 대통령으로 귀결되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은 남북 화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 경제 위기 극복 등으로 준비된 대통령으로서의 존재감을 깊게 각인시켰다. 김대중은 시대가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바늘이었고, 한국 현대사는 김대중과 함께 그 한계를 극복해갔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양극화가 심화되어온 지난 5년의 시간을 정리하고 다시 선택을 눈앞에 둔 지금, 김대중에게 시대가 나아갈 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한국 현대사, 민주주의를 향한 역경의 드라마

일제 치하의 식민지에 태어나 일본어로 공부하고 창씨개명을 당하고, 해방과 함께 새로운 조국을 꿈꾸며 정치에 투신하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 아래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를 온전히 살아냈다. 특히 한국전쟁과 3.15 부정선거, 4.19 혁명, 5.16 쿠데타, 71년 대통령 선거, 망명과 도쿄 납치 사건, 12.12 쿠데타와 5.18 광주, 87년과 92년 대선,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 남북 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등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한국 사회의 중요한 쟁점에 김대중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다. 김대중의 일생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 한국 민주주의사라고 할 수 있다.

오해와 왜곡을 벗겨내고 인간 김대중의 진면목을 드러내다

한국 현대사 초유의 거인이었던 김대중은 한편으로 빨갱이, 전라도, 거짓말쟁이 등 공격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김대중을 괴롭혔던 숱한 오해와 왜곡은 김대중이라는 정적을 탄압하고 방해하기 위한 정치 공세이기도 했지만, 김대중에게는 시련이고 좌절이었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은 신화적 존재인 만큼 그 개인의 구체적인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대중을 다시 쓰고자 하는 이 책, 김대중 평전은 김대중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오해와 왜곡을 벗겨내고 인간 김대중을 드러내고자 한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라는 신념과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원칙 아래 열정적으로 개인의 인생과 시대의 미래를 개척해나간 정치가이자, 성실하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며 이론을 정립해간 사상가이자 정책가이며, 종교라는 영성의 힘으로 정적들을 용서하고 평화를 얻은 종교인이었다. 또 성취를 열망하고 불의에 분노하고 좌절에 실망하고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보통 사람이었다. 평전은 김대중에게 덧씌워진 오해와 왜곡을 걷어내고 인간 김대중의 진가를 드러낸다.

김대중 평전의 완결판

『새벽 - 김대중 평전』의 저자 김택근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자서전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어 자서전 집필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총 2년여 동안 41회의 구술, 관련 인물들과의 수많은 인터뷰, 김대중 대통령 국정노트, 일기, 육필 메모 등의 미공개 자료들도 섭렵하여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김대중 전문가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서전 집필을 의뢰받고 구술을 시작한 2004년부터 평전의 원고를 마무리한 2012년까지 저자 김택근은 8년의 시간 동안 김대중을 붙들고 살았다. 그는 김대중에게 놓여나지 못했고 짧지 않은 8년의 시간이 평전에 녹아 있다. 특유의 간결하고 유려한 문제로 쓰여진 『새벽 - 김대중 평전』은 자서전과는 다르게 저자만의 독자적인 관점과 해석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을 재구성하는 한편, 기존 자료와 김대중 자서전에서 볼 수 없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려내 새로운 김대중 평전을 완결했다.

김대중의 숨은 이야기가 새롭게 밝혀지다

자서전 집필을 준비하며 김대중 대통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관련 자료도 가장 많이 섭렵한 만큼, 평전에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도쿄 납치 사건에 가담한 주일 김재권 공사의 아들 성 김(현 주한 미국 대사)이 6자회담 대표로 방한하자, 아버지 일과 아들의 일은 다르다며 묻어둔 일화나, 노벨상 위원회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이 한국의 특정 지역에서 노벨상 수상에 반대하는 수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고 언급한 것이나 대통령 취임 이전 안기부 내 노벨상 방해공작팀이 실재했다는 사실은 이번 평전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다. 이명박 정부에서의 민주주의 후퇴를 보면서 목숨을 걸고 쟁취한 직선제를 회의했다거나, 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을 압박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을 중지시켰다는 사실도 김대중 대통령의 풍모를 새롭게 전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