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본혼슈 동경.오나교 (여행지)/3.교토.나라.아라시

교토 귀무덤

동방박사님 2010. 7. 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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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풍신수길은 일본 장병에 명하여 다시 조선을 정벌하였다. - <중략> -

장병이 적의 목을 베어야하나 바닷길이 너무멀어 조선군의 코를 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냈다. 풍신수길은 이들을 원수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가엾다는 마음을 깊이하여 친한 사람에게 하듯 공양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고 코무덤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글은 풍신수길의 어용학자인 상국사 주지 쇼다이가 쓴것으로 "풍신수길을 자비심이 넘치는 인자스러운 장군으로 왜곡한다. 조선인의 코를 벤것이 풍신수길의 명령이 아니라 일본군 병사의 자발적인 충성심에 서 벌어진 양 거짓으로 표현하고 있다. 풍신수길의 잔인성으로 볼때 코무덤이 야말로 일본열도를 통일한 장군의 영원한 힘의 과시로 남기고 싶은 그릇된 욕망일 뿐 결코 비명횡사한 조선인을 안타가이 여기고 한 짓이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수 있는 이야기이다.

풍신수길의 심복조차도 코무덤이라고 밝힌 무덤이 어째서 귀무덤이 되었는가?

명백히 상국사주지인쇼다이는 코무덤이라 밝혀두었는데, 이것이 귀무덤이 된 까닭은 풍신수길 뒤에 정권뒤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막부의  23살 참모인 하야시 라잔이 "코무덤은 잔인하다. 귀무덤으로 완화해서 부르자! 라고 한데서부터 귀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

풍신수길의 "코베기명령"을 내린것은 정유재란때이며 조선인의 코를 베어와 묻은 까닭은 후세에 자랑하기 위한것이다. 코를 베었으면 코무덤이요. 귀를 묻었으면 귀무덤이다. 이문제는 잔학성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다라서 위의 정리된 사료를 종합해보건대 풍신수길의 의도적 코베기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코무덤을 귀무덤이라고 불리는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렁게 베어진 코는 조선에서 일본에 어떻게 운반되었을가? "베어진 코는 일단 배편으로 나고야까지 보내졌고, 나고야에서는 오사카까지 다시 배편으로  그리고 오사카에서 교토까지는 육로를 이용하였는데 길가에는 개선장군처럼 큰수례를 싣고 지나가는 조선인의 베어진 코를 보려고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나와 구경했다.

위 내용은 교토시에서 작성한 표지석 내용이지만 한국인입장에서 본다면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은 정유재란때 전장에서 사우다 죽은 조선병사 뿐 아니라 부녀자, 생후 갓태어난 아기까지 가차없이 죽여 그 코를 베게 하였다. 그리하여 소금통에 절여오사카로 보낸뒤 교토까지  육로로 베어진 코를 싫어나르며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는 만행을 자랑하였다. 그리고는 쿄토시에 커다란 코무덤을 만들어  봉분 위에는  수십 톤 무게의  돌 덩어리를 눌러 놓았다. 죄없는 조선인들의 영혼들은 지금도 먼 이역 땅에서  쓸쓸이 귀향할 날만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고 있다. 임진 정유재란이 끝난지 400여 년이 넘었다.

어떻게하든  이 통한의 코무덤 주인공들의 귀국을 서둘러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무르 익지못해 우선 안타까운 마음으로 코무덤의 흙 한 줌을 파다 이곳에 묻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풍신수길의 잔학성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우리는 교토의 귀무덤을 반드시 이곳에 모시고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그길만이 풍신수길이 죽어서도 공적을 자랑하려는 저의를 깨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영혼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 코무덤 비석은 슬픔의 징표로만 잠시 세워두는 바이다. 삼가 숨진 영령들에게 깊이 가슴 조아리며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우리 후손들에게 보여야하는 현실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한다" 

 

우리는 임진 정유재란은 몰론 일제강점기로 인해 무수히 많은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온겨례는 죽임을 당하고 온겨례는 엄청난 고통속에 신음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통신사 부사로 다녀왔던 김성일이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 사실만 왜곡시키지 않았어도 통한의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그 죄탓에 무고한 양반들이 죽이고 목이 잘리고 코를 베이게 된 전쟁의 후유증인 코무덤!

 

과거의 굴절되고 왜곡된역사를 낱낱이 파혜치고 바로잡지 않은  민족은 역사라는 큰 무대위에 서지못하고 뒤안길로 쓰러질수 밖에 없다. 교토의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려다 이총이라는 비석하나만 만들어 놓은것으로 이문제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400년이 아니라 4천년이 흘렀다 하더라도 잘못된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오늘 이후 우리 입에서 더는 "귀무덤"이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코무덤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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