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본혼슈 동경.오나교 (여행지)/3.교토.나라.아라시

교토 헤이안신궁

동방박사님 2010. 7. 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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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의 개막

나라(奈良) 시대 후기에는 공지공민제가 무너지고 귀족들의 싸움이 격해졌으며, 불교 승려가 정치에 진출하는 등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덴무 천황계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제50대 간무(桓武) 천황(재위 기간 : 781년~806년)은 율령 정치를 재건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기존의 헤이조쿄(平城京 : 710년에서 784년까지 도읍지였던 지금의 나라 지방)에서 나가오카쿄(長岡京 : 784년부터 794년까지 도읍지였던 지금의 교토 서남부 지방)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새 도읍지 조성을 맡은 책임자가 암살되고 사와라(早良) 친황의 원령-사와라 친황은 간무 천황의 남동생으로, 황태자로 옹립되었으나 간무 천황 암살을 모의한 것으로 드러나 폐위되었다. 폐위 후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는데, 그 후 간무 천황의 측근이 잇따라 죽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수해와 방화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런 사건들을 사와라 친황의 원령 탓이라고 생각했다-에 의한 불길한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자, 간무 천황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 : 794년부터 1868년까지 도읍지였던 지금의 교토 중앙부)로 다시 천도했다. 새로운 도읍지의 이름을 헤이안쿄(平安京)라 정한 데에는 모든 갈등과 혼란이 종식되고 국가가 평안하기를 염원한 간무 천황의 의지가 들어 있다. 헤이안 시대의 개막이다.

 

간무 천황은 덴치 천황의 손자에 해당하는 제49대 고닝(光仁) 천황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백제계 도래인 출신인 다카노노 니이카사(高野新笠 : 생년 미상~790년)다. 간무 천황이 불교 세력과 덴무 천황계 세력을 일소하고자 나가오카쿄와 헤이안쿄에 도읍지를 조영한 것은 야마시로(山背, 후에 山城, 나가오카쿄와 헤이안쿄를 포함한 일대)가 덴치 천황계 세력이 강성한 곳이기도 하면서 백제계 도래인 하타씨(秦氏)와 관계가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간무 천황은 귀족 세력을 결집하여 왕권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가오카쿄 궁전과 헤이안쿄 궁전 조영을 담당한 사람이 모두 하타씨와 인척 관계에 있었다.

 

794년 헤이안쿄로 천도한 뒤 신도읍지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도카(踏歌) 연주가 이루어졌다. 도카는 원래 당나라에서 전래된 음악으로, 이때의 연회에서도 중국 음으로 연주되었다. 간무 조정에는 도래인 출신인 신하가 많았으며, 후궁-일본에서 '후궁(後宮)'이란 천황의 정비들과 후비들, 그들을 보위하는 사람들 집단(조직)까지 아울러 총칭하는 말이다-에는 백제왕계 여성이 진출해 있었다. 간무 천황의 율령제 재건 2대 사업 중 하나였던 동북 지방의 에미시(蝦夷 : 야마토 중앙 정부로부터 이민족으로 취급받은 민족) 평정에 중심적인 구실을 한 것도 도래 씨족계였다. 간무 천황은 804년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풍 문화를 직접 수용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헤이안쿄로 천도한 간무 천황은 이처럼 백제계 도래인 씨족의 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당풍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당풍 문화는 제52대 사가(嵯峨) 천황에 의해 더욱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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