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한국정치의 이해 (독서)/3.한국좌파정치

좌파는 어디 있었는가? (2015) - 메르스와 탈-이데올로기적 좌파의 가능성

동방박사님 2023. 5. 26.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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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삶의 문제 다루며 철학 입문서로도 유효

저자가 책을 집필하며 쓴 말에 따르면 삶의 문제와 철학의 문제는 서로 간에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오히려 이 둘은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으며, “철학자는 삶에서 유래하는 문제를 개념 속에 포착함으로써 더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철학과 삶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특히 언젠가 이후 철학자의 능숙함은 도가 지나쳐서 철학의 개념이 삶의 구체적인 언어로 재번역이 안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 작은 책은 이제 독백이 되어버린 철학이라는 로고스를,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삶의 언어로 재번역해 보려는 한 시도이기도 하다. 메르스로 인해 생겨난 적대감의 과잉에서 왼쪽인 줄 알았던 옳은 쪽이 결국 피하고자 했던 오른 쪽으로 귀결되고 마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으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정신분석적 통찰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 그리고 레비나스의 처방들을 두루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의 타자인식,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리된 사회,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 레비나스의 타자를 향한 사유 등이 그 핵심을 드러낸다. 메르스를 계기로 삶의 의미와 좌파의 가능성을 탐구한 작은 책은 독자를 철학적 사유의 길로 이끄는 가이드로도 손색이 없다.서의 의미도 지닌다.

저자 소개

저자 : 장의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레비나스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이데이아 홍릉 시민대학원 소속으로 대안연구공동체 및 기독교대안지성에서 가르치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방법론과 현상학적 방법론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여 왔으며, 관념과 실천을 화해시키기 위한 매개의 단초를 미학 속에서 탐구해 보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 미학적 사유야말로 그저 능숙한 독백이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출판사 리뷰

“2015년 초여름에 발생한 메르스 사태를 통해 삶의 의미 그리고 좌파의 의미를 묻기 위해 작성되었다. 합리적으로 해명 불가능하며 바로 그렇기에 무의미한 폭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묻고자 했으며, 이에 대한 대답을 정신분석적 통찰과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의 왜곡이라는 아도르노의 진단에서 찾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인식의 왜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이와 더불어 왜곡되지 않은 실천의 가능성을 레비나스의 처방, 그러나 무한한 과제 그 자체로서의 처방 속에서 구하고자 시도했다. 그러자 이러한 시도들 자체가 삶의 의미로 드러났다.” - 저자의 말 -

적대감과 패륜적 독설... 좌파는 어디 있었는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 사태를 통해 삶의 의미, 그리고 좌파의 의미를 묻는 책이다. 이 책의 대화 상대자는 좌파다. 메르스 사태의 와중에 사람들은 그 본질이 아직 규명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한 여성 정치인(박근혜 대통령)과 보건 당국을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분노하며 패륜적 독설을 쏟아 부었다. 당혹한 저자는 묻는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 이들이 좌파인가? 좌파의 유일한 장점이자 최상의 무기는 바로 도덕적 진정성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좌파는 어디에 있었는가?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의 왜곡이 폭력의 근원

저자에 따르면 이런 적대감은 역사적인 선례가 있다. 중세 유럽의 페스트가 그것이다. 14세기 유럽에서 2400만 명이나 사망한 페스트 상황 속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찾았다. 희생양이 된 이들은 유태인, 외국인, 순례자, 나병 환자 등의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소수 인종이나 소수민족, 동성애자, 특정종교인, 장애인, 노숙자, 윤락녀, 노인 등의 거의 모든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증오범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 이유 모를 적대감은 왜 생기는 것일까?

여기서 저자는 정신 분석적 통찰에 기대어 내 안의 타자성에서 적대감의 기원을 찾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두려움을 타인에게 ‘투사’하며 타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투사의 과정 속에서 왜곡되어지는 것은 단지 타인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하다. 내 안의 타자를 타인에게 덧씌워버림으로써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한 내 안의 타자를 내 스스로가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내 안의 타자를 스스로 떠맡는 것을 회피하는 가운데 참된 자기 인식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또한 타인에게 나의 모습을 덧씌우는 가운데 타인을 타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의 왜곡은 흔히 적대감과 폭력으로 이어진다.

관리 사회, 위기뿐 아니라 평소에도 타자 적대시

특히 메르스나 페스트처럼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사회구성원들은 일종의 편집증적 조현증(paranoid-schizoid) 상태에 처한다. 이렇게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게 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타인들에게 열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들을 적대시한다. 즉 이들은 열광과 매혹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타인들을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 영적 지도자로서 간주하는 반면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타인들을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른바 숭배-희생의 변증법이다.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를 신의 저주라고 믿고 자신들에게 채찍질을 하며 죄를 고백하는 고행을 했던 ‘채찍질 고행단’은 영웅 취급을 받은 반면, 유태인, 외국인, 순례자, 나병 환자 등은 전염병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박해를 받은 것이 그 사례다.

사회적 망상의 피해자가 반드시 사회적 약자였던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왕정시대에 왕은 평화시기에는 숭배의 대상이었던 반면에 기근, 역병,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 책임을 지고 희생되기도 했다. 중세 유럽에서 성자들로 추앙받았던 ‘채찍질 고행단’이 나중에는 병을 옮기는 도적떼 취급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서도 희생자들은 기존 체제의 지배 계급이었다. 정부와 대통령이 주된 희생양이 되었던 메르스 사태의 사례도 숭배-희생의 변증법에서 빗나가지 않는다.

숭배- 희생의 변증법이 유효한 것은 위기나 재난 상황뿐 아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질적 가치를 박탈당하고 ‘물화’되는 현상은 ‘문화산업’에 의해 심화된다. 이 때문에 인간은 평상시에도 병든 정치적 행동과 건강한 정치적 행동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왜곡된 타자 인식에서 기인하는 병든 정치적 행동과 참된 타자 인식에서 기인하는 건강한 정치적 행동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관리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타자들을 적대시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혁명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한 모든 노력이, 현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올바른 정치적 견해를 갖기 위한 모든 노력이 부질없고 무의미한가? 메르스 사태에 대해 정치적으로 침묵하는 것이 최선인가?

삶의 의미, 건강한 좌파는 가능한가?

저자에 따르면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 문제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올바른 실천은 올바른 인식을 전제로 하는데, 사회적 주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는 언제나 타자 인식이 포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윤리는 어떻게 가능할까? 휴머니즘에 기반한 좌파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러한 인식의 왜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왜곡되지 않은 실천의 가능성을 레비나스의 처방에서 찾는다. 인간은 의미, 존재 이유, 삶의 목적을 찾는 동물이다. 하지만 의미는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쉽게 찾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의미가 어려운 것만큼이나 무의미도 어렵다. 즉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완전한 무의미를 발견해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의미와 무의미 간의 틈새 속에서 의미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레비나스는 무의미와 의미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대표적인 사상가다.

태어나자 마자 사라지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와의 만남은 죽음과도 같이, 주체로부터 그 자신에 대한 지배 자체를 박탈하는 사건, 즉 주체의 능동성을 수동성으로 역전시키는 사건이다. 타자와 만나는 주체는 순수한 수동성이자 타자를 위한 책임이며, 또한 타자로부터(a partir d’autrui) 혹은 타자 덕분에(grace a autrui) 발생하는 주체이다. 자기 자신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 이러한 주체는 타자를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와 관계하는 주체이며, 바로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태어나는 주체다. 그렇기에 주체는 타인을 향한 파열(eclatement vers autrui)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기호가 되는 주체, 즉 ‘타인을 위하여(pour auturi)’ 사라지는 주체이다. 나는 타인에 의해 생겨나지만, 타인을 위해 기호로서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타인과 나와의 관계 속에는 주체에게 가해지는 일종의 폭력이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이 유한한 주체를 탈-주체화시키러 온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레비나스의 주체는 태어남과 동시에 사라지는 주체이다. 요컨대 주체는 타인에 의해서(par autrui) 그리고 타인을 위해서(pour autrui) 자신의 내재성과 존재 속에서 해체되거나(se defaire) 방출되는(se deverser) 자, 즉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사라져버리는 주체, 타인에 의해 고통 받는 주체는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 태어난단 말인가?

주체는 누군가를 ‘위해’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만나는 주체는 그냥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pour)’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타인 때문에, 또는 타인에 의해서 주체가 겪는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다. 타인에 의해 내게 부과된 이 고통스러운 책임을, 즉 제삼자에 의해 무한히 증폭되어 버리는 무의미할 정도로 무한한 과제로서의 책임을 나는 ‘타인을 위해(pour auturi)’ 겪으며 감내하기 때문이다. 바로 타인을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이기에 주체의 고통은 의미 있는 고통이다. 만일 타인을 위한 주체의 희생을 번제의 제물에 비유될 수 있다면, 타인을 위한 제물이 되어 번제의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주체는 불에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자신이 연기처럼 사라져가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의미를 구하는 우리 앞에는 의미를 자유롭게 골라서 구매할 수 있는 일종의 상품 카탈로그와도 같은 것이 놓여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물화로 인한 관계의 왜곡과 내 안의 타자성의 타인에 대한 투사는 의미를 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왜곡된 시선으로 왜곡된 희생자를 만들어내곤 한다는 것이다. 상대편보다 더 잘하는 것보다는 덜 못하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삼는 진영논리의 담지자들이 예언자로 추앙받게 되며, 막상 사건의 진정한 피해자들에 대한 배려와 위로의 기회는 상실된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찾고자 했던 정의 따위의 의미는 총체적인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추락하고 진정한 혁명과 해방의 가능성은 다시 멀어진다. 저자가 탈-이데올로기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저자의 처방은 “총체적 무의미라는 착각으로 인도하는 자잘한 무의미들을, 이데올로기들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떠나기는 끝도 없고 중단도 없이 무한한, 그리고 영원히 무거운 과제이다. 떠나는 순간 바로 떠남은 배신당하고 영원처럼 또 다시 새로운 무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의미를 구하고자 하는 저자가 탈-이데올로기적 좌파에서 찾는 의미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삶의 문제 다루며 철학 입문서로도 유효

저자가 책을 집필하며 쓴 말에 따르면 삶의 문제와 철학의 문제는 서로 간에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오히려 이 둘은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으며, “철학자는 삶에서 유래하는 문제를 개념 속에 포착함으로써 더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철학과 삶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특히 언젠가 이후 철학자의 능숙함은 도가 지나쳐서 철학의 개념이 삶의 구체적인 언어로 재번역이 안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 작은 책은 이제 독백이 되어버린 철학이라는 로고스를,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삶의 언어로 재번역해 보려는 한 시도이기도 하다. 메르스로 인해 생겨난 적대감의 과잉에서 왼쪽인 줄 알았던 옳은 쪽이 결국 피하고자 했던 오른 쪽으로 귀결되고 마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으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정신분석적 통찰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 그리고 레비나스의 처방들을 두루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의 타자인식,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리된 사회,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 레비나스의 타자를 향한 사유 등이 그 핵심을 드러낸다. 메르스를 계기로 삶의 의미와 좌파의 가능성을 탐구한 작은 책은 독자를 철학적 사유의 길로 이끄는 가이드로도 손색이 없다.서의 의미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