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5.대한민국대통령

이승만과 제1공화국 (2007)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동방박사님 2023. 5. 3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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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을 위한 역사교양서. 20세기는 한국역사의 최대 격동기였다. 개항 이후 일제의 폭압을 경험했고, 해방과 더불어 한국전쟁이란 민족의 비극을 맞았다. 식민지 경험과 전쟁의 참화는 다시 독재의 암흑시대를 낳았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는 결코 좌절되지 않았다. 이제 100년에 걸친 한국역사의 역동적인 드라마 속에서 오로지 자유와 진실의 힘을 믿고 힘차게 걸어온 한국인의 발자취를 정직하게 기록한다.

목차

책머리에- 이승만 시대를 다시 조명하며

1장 출범하자 시련 맞은 이승만 정부
남북협상과 5·10선거 / 대한민국 정부 만들기 / 소장파 전성시대의 반민법과 농지개혁법 / 핏빛으로 변한 평화의 섬 / 국가보안법 시대의 개막 / 일민주의와 ‘두령국가’

2장 이승만 정권의 6월공세와 5·30선거
1949년 6월 첫 공세 / 조작 여부로 논란 많은 국회프락치 사건 / 김구 살해 / 감옥소는 ‘빨갱이’로 초만원 / 최초의 선거 바람 5·30선거

3장 개헌 또 개헌, 영구집권을 향하여
명의를 도용한 최초의 여당, 자유당 / 포성 속의 대권 싸움, 부산정치파동 / 유권자가 모르는 부통령 당선자 / 족청계를 제거하라! / 이승만 후기체제의 구축 / 이승만 권력 강화의 비결 / 〈스페셜 테마〉 ‘한강 기적’ 일군 한글세대 대량 탄생

4장 1956년 5·15정부통령 선거
새 야당 탄생? 민주당과 진보당추진위 / “못살겠다 갈아보자!” /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 / 상처 입은 대통령 / ‘장면 부통령 죽이기’ / 조봉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 자유당, 5·2총선에 총력 돌입하다 /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향해 / 여성들 경제 제1선에 나서다 / 〈스페셜 테마〉 성 모럴의 변화와 ‘자유부인’

5장 아! 4월혁명, 백색독재 무너뜨리다
최인규, 부정선거를 기획하다 / 학생들 시위에 나서다 / 제2차 마산항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 맞아 / ‘피의 화요일’ 4·19 / 대학교수 시위로 학생·시민항쟁 다시 불붙어 / ‘승리의 화요일’

글을 맺으며- 왜 이승만 권력은 쉽게 무너졌나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 이승만 권력과 박정희 권력의 유사성과 상이점 / 이승만 정권은 왜 쉽게 무너졌나

부록 : 주요 사건 일지 / 참고문헌 / 이 책에 쓰인 사진의 출처 /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서중석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3사건...

기획 : 역사문제연구소

1986년 2월 21일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는 ‘우리 역사의 여러 문제를 공동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반 대중에게 보급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하는 민간학술연구단체이다. 전문연구자와 일반대중이 만나 토론하는〈한국사교실〉강좌, 역사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역사기행〉등 정기적인 외부 행사뿐 아니라, 중국·일본의 여러 대학과 국제 학술 교류를 통해 해외의 한국학 연구성과를 국내에 소...
책 속으로
람들은 대개 4.19하면 서울을 떠올리지만, 4.19는 서울의 4.19일뿐 아니라 광주의 4.19, 부산의 4.19이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4월 19일 오전 11시 15분경 경남공고생 6백여 명이 뛰쳐나와 부산진경찰서로 행진했다. 얼마 후 데레사여고생들이 합세했다. 무장경찰이 사정없이 학생들을 구타해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남공고생 일부는 시내로 향했고,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자성대 앞에서 1백여 명의 무장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시위대는 소방차와 경찰 지프차를 뒤엎어 불을 질렀다. 3시경 경찰이 정면에서 사격을 했다. 7~8명의 젊은이가 쓰러졌다. 시위대는 더욱 분노했다. 구두닦이·껌팔이·실업자 등이 합류했다. 학생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부르며 싸웠다. 군중들이 동부산경찰서로 몰려들었을 때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오후 5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부산에서 이날 시위로 인해 죽은 사람은 22일까지의 집계에 의하면 13명(부상자 사망 포함), 부상자 60여 명이었다.
광주에서는 19일 오전 10시 40분 광주고생들이 “협잡선거 다시 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뛰쳐나갔다. 그중 80여 명이 먼저 도옥 판자문을 넘어뜨리고 거리로 나섰고, 그것에 호응해 광주여고생도 나섰다. 약 5백 명의 광주공고생, 전남대부고생, 광주상고생도 합류했다. 학생들은 금남로 일대에서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이 와중에 학생들이 경찰 백차를 부쉈다. 금남로는 조선대부고생과 숭일고생까지 합세해 꽉 들어찼다. 5천 명쯤 되는 시위대를 향해 시민들은 물을 나르며 성원했다. …… 대구에서는 19일 오후 3시경 경북대생 2천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경북도청 앞에 도착해 농성을 벌였다. 5시 조금 지나 도지사가 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 말했다. 청구대생 야간부 약 1천5백 명은 오후 7시 10분경 시위에 들어가 경찰과 충돌했다. 9시 통금시간이 되자 경찰이 뒤따르는 시민들을 해산시켰고, 학생들은 11시 지나서 교정에서 해산했다. 19일 농기구를 든 청주농고생 5백여 명도, 인천공고생 3백여 명도 시위를 했다. ‘피의 화요일’ 4월 19일은 무척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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