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5.대한민국대통령

박정희의 자주국방 (2023) -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10년, 그리고 4대 핵공장과 백곰 유도탄

동방박사님 2023. 5. 3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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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기계공업 육성방향’과 유도탄 ‘백곰’ 개발의 비사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10년은 오로지 자주국방이라는 목표 하나에 집중되었다. 북한이 군사적·경제적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 미군 철수가 가시화되자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이때 추진된 것이 유도탄 백곰 개발 사업이고, 이 사업과 동시에 진행된 동전의 다른 면과 같은 사업이 중공업 육성 사업이다. 1970년대 이후 남한은 이 두 가지 사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창조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역사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업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아전인수와 자기변명이 넘쳐나고 있고, 연구자들조차 비밀의 문에 막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기계공업 육성방향’ 수립의 첫 단추를 꿰고, 지대지 유도탄 ‘백곰’ 개발의 전 과정을 책임지고 수행했던 필자의 생생한 육성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새로 그리고 보여준다.

목차

● 프롤로그

제1부 ‘기계공업 육성방향’의 진실

어떤 인연
‘기계공업 육성방향’ 수립의 전말
기적은 있다
오원철 차관보
진실과 거짓이 뒤섞일 때
오원철식 기계공업 육성 정책의 허와 실
유일한 논문

제2부 백곰 유도탄 개발의 막전막후

국방과학연구소로 옮기다
항공공업 육성방안
하늘이 주신 선물들
관성항법장치를 찾아서
진정한 자주 국방

제3부 부러진 화살과 그 책임자들

이만영 박사와 감사원 특별감사
대전기계창장 시절
서울기계창과 진해기계창의 운명
번개사업의 잘못된 교훈
백곰이 날기까지
백곰 이후
비극에 대한 추론

● 에필로그
● 부록
Ⅰ백곰 개발 주역들의 간단한 소개와 소회
Ⅱ백곰의 후예들
Ⅲ 1. 백곰 개발 관련 훈표창 수여자 명단
2. 백곰 개발 추진 조직의 변천
ⅣADD 초기의 화포 개발 약사
 

저자 소개

저 : 이경서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2년 수료 미국 MIT공과대학 기계공학 학사, 석사, 박사 학위 취득 미국 BBN(Bolt, Beranek, Newman)社 선임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ADD) 유도탄 개발 담당 부소장 국제화재해상보험(주) 대표이사 사장 한국중공업(주) 부사장 단암전자통신(주) 회장 現 단암시스템즈(주) 회장 보국훈장 천수장 수훈(국방부...
출판사 리뷰
단군 이래 우리 한민족은 무수한 외침에 시달렸지만 자기 힘으로 자기 나라를 지킨 자주국방(自主國防)의 경험은 매우 적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 고구려 때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경험 외에는 항상 굴욕적인 항복이나 타국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 겪은 전쟁인 6·25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지원 덕분에 간신히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쓰라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까지 우리에게는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나 능력이 태부족이었다. 반면에 북한은 정전 직후부터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군수산업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국방력 재건에도 성공했다. 이 당시 우리는 국방력에서든 경제력에서든 북한에 크게 뒤지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원조에만 매달리는 세계 최빈국 신세가 지속되는 와중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고, 정치 분야의 불안이 어느 정도 제거되자 본격적인 경제 성장의 길을 모색할 여지가 생기게 되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통해 보릿고개의 굶주림을 면하기 시작했고, 경공업이지만 수출에도 조금씩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나라의 모습을 갖추어가던 1969년, 우리나라는 다시 한번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충격은 예기치 못한 외부에서 갑자기 시작되었는데, 새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Richard M. Nixon)이 그해 7월 소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것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으로 기록될지 모르는 베트남전의 마무리를 앞두고 나온 이 선언은 미국인들이 가지게 된, 남의 나라 전쟁에 대한 염증이 투영된 결과물이었다. 당연히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자기 나라를 스스로 지킬 힘이 없던 당시의 우리에게 닉슨 독트린은 일종의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괌에서 발표한 독트린에서 닉슨은 이렇게 표명했다.

“미국은 핵보유국들로부터 동맹국들의 자유가 위협을 받을 경우 방패(핵우산)를 제공할 것이다. 다른 형태의 침략(재래전)의 경우 미국은 필요하고 타당한 경우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것이나, 위협을 받는 당사국이 자국의 방위를 위한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앞으로 아시아 지역의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이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은 직접 참전하지 않고, 북한이 핵 공격을 할 경우에만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은 실제로 당시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철수를 개시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청천의 벽력이고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6·25의 참상을 경험한 우리에게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고, 미군에만 의존하던 국방을 하루아침에 자주국방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미군이 떠난 한반도가 북한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런 화급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지만 자주국방은 하루아침에 달성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 이미 군사력과 경제력 모두에서 북한에 크게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뾰족한 수를 찾기가 참으로 난망했다. 문자 그대로 누란의 위기였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1969년부터 박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10년은 이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는 활로 찾기에 오로지 집중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주국방’의 추진이다. 그런데 이때의 자주국방은 한 국가의 명운을 건 백척간두의 싸움이자 가장 난해한 퍼즐을 맞추어야 하는 고도의 게임이기도 했다. 그저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전쟁이자 한 국가와 국민 전체의 사활을 건 위험한 도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