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한국정치의 이해 (책소개)/6.대한민국정치인

가족이 있는 삶 (2014) - 힘겨웠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기억, 가족의 추억

동방박사님 2023. 6. 13. 11:12
728x90

책소개

드라마틱한 역사의 기억과 따뜻함이 묻어나는 사람에 대한 추억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연습 없이 태어나서 연습 없이 죽는 걸 지켜보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은 “인생은 초콜릿상자와 같아서 무엇을 집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해진 운명과 우연의 연속에서 사람은 어쩌면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며 다소 달콤한 은유로 인생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는 저자 이재명이 생존을 위해 내달려야 했던 한 80년 인생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치열한 역사에서 더 치열했던 가족, 꿈, 사랑, 불안 등 운명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한 남자는 누군가의 아들에서, 결혼을 하고, 삼남매의 아버지가 된다. 화가의 꿈을 버렸지만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더 큰 꿈을 꾼다. 결국 미군 부대 페인트공, 미제 제품과 메리야쓰를 팔던 광장시장 상인을 거쳐 ‘은행잎표’ 나전칠기 사업을 번창시킨다. 아이들에게는 그 당시에는 흔치 않은 전인교육과 체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한 통찰을 길러주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원했던 나누고 베푸는 삶을 아이들이 체득하도록 교육한다. 그리고 시린 삶을 내달렸던 가장이자 아버지로서의 열정과 추억을 소박하게 얘기한다. 특히 책 전면에 배치된 흑백 사진들은 다큐의 한 장면처럼 서투른 사진이지만 독한 현실의 기억을 넘어 감성적인 추억을 반추하게끔 한다.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자생한 우리 조부모 또는 부모 세대의 진솔한 인생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세대일지라도 삶에 대한 감사와 의미를 반추할 수 있다.

목차

차례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근대사와 함께 읽는 우리 가족의 역사

| 첫째 이야기 | 고향
나의 집안과 아버지 어머니 큰형님과 작은형님 누님 나의 고향 흥남 서호진 나의 오른손 어린 시절의 심한 장난과 영화 주말의 명화 보통학교 생활과 중학교, 화가의 꿈 평양민술학교 낙방 해방 후 북한의 모습 마른 북어와 사상 비판 아내의 기억(어린 시절) 아내의 기억

| 둘째 이야기 | 전쟁 그리고 피난
전쟁의 전조 전쟁과 큰형님의 죽음 기약 없는 타향살이와 어머님의 죽음 흥남철수작전 새고돌이 누이네의 비극 거제도 부산에서의 고생 거제도 미군 부대 누이의 장사 수송부대 페인트공 거제읍으로 이사하다 아버지의 임종 부산 생활 또 좌절

| 셋째 이야기 | 서울
광장시장 이야기 아내를 만나다 신혼살림 아내는 나의 스승 장사를 시작하다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 때늦은 신혼여행 메리야쓰 장사를 시작하다 평생의 은인 처숙부님과 은단집 누이 광장시장과 화재 내 집 마련 누비 솜고쟁이 나전칠기 사업을 시작하다 은행잎표 상표등록 직접 카탈로그 제작 나의 신조와 상도 아버지의 공부 욕심

| 넷째 이야기 | 삼남매와 아내
봉진이의 유난했던 병치레 예지동 집 막내 지영이가 태어나다 지영이가 오던 날 동네 아이들과 우리 남매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긴 안타까움 미아가 된 봉진이 우리 가족의 첫 외식 현주, 국민학교 입학 기특한 봉진이 누이를 기다리는 동생들 현주의 무단결석 낡은 전축의 선율 아버지의 고급 취향 첫 가족 여행 어릴 적의 다양한 경험 창경원 스케이트장 어린이 일요화가회 남산길 놀이 자식들 이야기 아버지와 어머니, 상극의 조화 엄마 도와 드리기 엄마 곁에 누워 어머니 하늘 가시던 날 아내와의 이별

책 속으로

《가족이 있는 삶》 본문 중에서
나는 1933년 음력 8월 29일 함경남도 흥남시 서호진에서 태어났다. 나의 형제는 삼남 일녀로 형님 두 분과 누나가 있다. 두 형님은 아버지의 고향 세포리에서, 누이와 나는 서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마흔이 다 되어 막내인 나를 낳으시니 큰형님과는 15년, 둘째 형님과는 9년의 나이 차이가 났다. 큰형수가 시집을 오니 내가 아직 기어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린 막내를 나이들 때까지 못 봐줄까 봐 항상 나를 안쓰러워하셨다.

나의 고향 흥남은 그저 함흥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1920년대 초까지는 지명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 1927년 일본 재벌 누구치가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의 비료 공장을 세우고, 부근에 장진강과 부전강 수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흥남시라는 대표적인 중화학 공업도시가 되었다. 사실 흥남이 유명해진 것은 한국전쟁 때 많은 북한 사람이 이곳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간 흥남철수 작전 때문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도 바로 그때를 노래한 것이다.
ㅡ ‘나의 고향 흥남 서호진’, 25쪽에서

나의 오른손은 중지와 약지가 손바닥에 붙은 상태여서 나머지 손가락을 펴면 특이하게도 수화의 ‘사랑합니다’의 모습 그대로이다.
요즘은 방송이나 일상에서 손가락들을 접어서 수화의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내게 농담을 할 정도이다.
“아버지, 이제는 오른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내밀고 다니셔야겠네요.”
내 손이 겪은 일말의 불운이 지금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예닐곱 살 때 함흥에 가서 오른손을 펴는 수술을 받았다. 두 살 때도 수술을 받았다고는 하는데 기억에는 없다. 어쨌든 큰형님이 함흥에 있는 제혜병원에서 귀 수술을 한 일이 있어 어머니와 병원에 갔다가 의사와 상담한 뒤에 나도 수술을 받았다.
그때는 마취도 없이 손에 빨간약(머큐로크롬)만 온통 발라놓고 곧바로 칼을 들이댔다. 어찌나 아프던지 조그만 녀석이 어른들한테 온갖 욕을 해대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수술을 다 마치고 손에 나뭇조각으로 깁스를 해주어 붕대를 칭칭 감고 집에 왔다. 나중에 서호 집에서 큰형님이 한번 보자고 해서 붕대를 풀었더니 손이 펴져 있었다. 병원에서 수술 부위에 피부를 이식해야 다시 오그라들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 다시 오그라들어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ㅡ ‘나의 오른손’, 28쪽에서

6.25 한국전쟁은 남쪽에서 벌어져서 우리 가족은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서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이 시작되었고, 10월에는 연합군이 흥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평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낮에는 하늘에서 연합군 비행기가 날아다녔다. 비행기는 함흥 시내 하늘에서 무언가를 뿌려댔다. ‘삐라’였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공산당이 나쁘다는 얘기를 쓴 것 같다. 나는 삐라를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전세가 역전되자 인민군의 상황 또한 많이 달라졌다. 북으로 후퇴를 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흥남공장 노동자들에게 해방 공원에 저장해놓은 양곡을 나눠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쟁과 큰형님의 죽음’, 69쪽에서

우리는 주로 미제 폰즈 크림, 일제 우데나 크림, 스킨 등 화장품을 팔았는데, 대부분 문산, 동두천 등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이었다. 장사를 잘 해 보려고 요샛말로 인테리어를 하기 위해 유리진열대를 장만하려는데 돈이 없었다. 결국 아내의 백금 약혼반지를 팔 수밖에 없었다. 나름 잘해보려는 욕심에 남들보다 훨씬 좋은 고급 진열대로 들였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물건을 팔면 그 돈이 그대로 모두 내 돈이 되는 줄 알 정도로 장사에 무지했다. 물건의 원가를 제한 것이 이득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초보였다. 물건 파는 일은 아내가 전부 맡아 하니 나는 상품을 조달하고 운반하는 일과 나머지 잡일들을 부지런히 해냈다.
아내의 피부가 워낙 좋다 보니 손님들이 어떤 화장품을 쓰냐고 묻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 이런저런 화장품 쓴다고 하면서 상품을 권하면 좋을 텐데, 아내 성품이 그런 시늉을 잘 못했다. 그러다 보니 더 팔 수 있는 것도 제대로 못 파는 일이 많았다. 원래 아내나 나나 장사꾼 기질은 별로 없는 편이라서, 그저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보다 안 입고 안 쓰고 절약해서 한 푼 두 푼씩 모아나갔다.
ㅡ ‘장사를 시작하다’, 149쪽에서

봉진이는 한참 무더운 1962년 7월 20일에 태어났다. 종로구 예지동에 살 때였는데 셋집의 환경이 열악하고 돌봐주는 식모도 열다섯 살 아이에 불과했으니 돌 전부터 병치레가 많았다. 어느 날 더위를 먹어서인지 배탈이 나서 배가 수박처럼 부풀어올라 울어댔다. 요즘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아기처럼 비쩍 말라 머리만 크고 팔다리는 살이 하나도 없이 배만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유명한 방소아과까지 찾아가 약을 지어 먹였어도 차도가 없었다. 좋다는 방법은 다 써봤지만 여전히 울어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애가 탄 나머지 어른 설사약을 조금 물에 타서 먹여보았다. 봉진이 배에서 부륵부륵 소리가 나면서 설사를 하더니 부푼 배가 가라앉으면서 회복하기 시작했다.
젖을 먹이기 힘든 상황에서 미제 분유라도 구해서 먹였으면 좀 나았을 것을, 당시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다.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글로벌 SPA 패션 브랜드 ‘ZARA’
이봉진 지사장의 아버지와 가족 이야기

역사는 상처투성이였고, 사람들은 몹시 고달팠던 시대의 우리 가족 이야기

식민지 지배, 공산주의, 전쟁과 피난, 혁명, 발전, 경쟁……
부모님 세대들의 겪었던 ― 무엇을 선택할 수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닥쳐왔던 새로운 정치와 사회체제, 변혁들, 고향을 버리고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바꾸어야만 하는 운명을 강요당했던 ― 그 수많은 사건들이 바로 지금의 나에게 닥친다면 나는 과연 그분들만큼 운명을 이겨내면서 온전히 삶을 이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흡하나마 이 자서전을 통해 우리의 동료나 가족들 모두와 진정한 삶의 가치와 용기, 사랑과 지혜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나누어보려 합니다.
― 들어가는 말에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과거, 잊히지만 기록하고 기념해서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과거가 있다, 그것이 역사이다. 이 책은 하루 앞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격변의 역사에서 고단한 삶을 단단하고 따듯하게 엮어온 근대 시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한 끼 식사조차 절실했던 시대를 건너 한 사람이 인간다운 삶의 행복을 꾸리기까지의 여정을 통해서 삶의 소중함과 의미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삶을 지켜낸 우리 시대 부모님(조부모님)들의 이야기
저자 이재명은 1930년대 흥남에서 태어나, 특급 회오리를 겪어낸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관통하여 인간의 한계를 이겨내며 한 가족의 막내에서, 아내와 삼남매를 거느린 한 가족의 주축으로서 삶을 영위한다. 이 책은 개인의 회고록이고 가족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80년 역사는 식민지, 전쟁, 쿠데다 등 상처를 거듭했던 부침으로 우리나라의 운명도 바람 앞에 초와 다름없었던 시절이었다. 이 책에서는 이재명의 인생을 세 시기로 나누어 역사의 소용돌이를 관통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열망과 가족의 탄생 과정을 잔잔하지만 깊게 이야기한다.
첫째, 출생에서 흥남철수선을 타기 전까지(식민지배-공산치하)의 유년기
둘째, 피난민 시절부터, 결혼과 첫 아이를 낳고 다시 인생을 출발할 때까지의 청년기
셋째, 아버지로서 한 여인의 지아비로서의 열심히 달렸던 장년기까지로, 광장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고, 삶의 터전을 일구어내기까지의 이야기

드라마틱한 역사의 기억과 따뜻함이 묻어나는 사람에 대한 추억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연습 없이 태어나서 연습 없이 죽는 걸 지켜보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은 “인생은 초콜릿상자와 같아서 무엇을 집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해진 운명과 우연의 연속에서 사람은 어쩌면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며 다소 달콤한 은유로 인생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는 저자 이재명이 생존을 위해 내달려야 했던 한 80년 인생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치열한 역사에서 더 치열했던 가족, 꿈, 사랑, 불안 등 운명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한 남자는 누군가의 아들에서, 결혼을 하고, 삼남매의 아버지가 된다. 화가의 꿈을 버렸지만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더 큰 꿈을 꾼다. 결국 미군 부대 페인트공, 미제 제품과 메리야쓰를 팔던 광장시장 상인을 거쳐 ‘은행잎표’ 나전칠기 사업을 번창시킨다.
아이들에게는 그 당시에는 흔치 않은 전인교육과 체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한 통찰을 길러주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원했던 나누고 베푸는 삶을 아이들이 체득하도록 교육한다.
그리고 시린 삶을 내달렸던 가장이자 아버지로서의 열정과 추억을 소박하게 얘기한다. 특히 책 전면에 배치된 흑백 사진들은 다큐의 한 장면처럼 서투른 사진이지만 독한 현실의 기억을 넘어 감성적인 추억을 반추하게끔 한다.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자생한 우리 조부모 또는 부모 세대의 진솔한 인생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세대일지라도 삶에 대한 감사와 의미를 반추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함께 읽는 우리 가족의 역사
고단한 역사에서 저자는 행복이 꽃피기도 하고, 무난한 역사에서 저자는 생사를 고민하기도 한다. 저자는 세월에 휘말리기도 때로는 세월에 비켜 서 있기도 하다. 역사와 함께 가기도, 따로 가기도 해서 그의 인생에도 쉼표가 있다. 역사와 함께 지치지 않았기에 저자도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꿈을 향한 열망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이렇게 역사는 흐르고 사람은 살아내는 것이다.

1933년. 일제, 조선금융조합 연합회령공포. ⇒ 이재명 태어남.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우승.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후 사진 개제로 무기 정간 당함. ⇒ 이재명 4세.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강령 발표 및 대일 선전 포고.
이재명 9세. 서호보통학교 입학.
1945년. 일제 패망으로 광복. 남한, 미군정 실시. 북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 이재명 13세. 보통학교 5학년. 8월 15일 해방을 처음에는 실감하지 못함.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 이재명 18세. 큰형님, 인민군 검문에 걸려 총살당함. 어머님 피난 바로 전에 운명. 흥남철수작전으로 LST를 타고 거제도 장승포 도착.
1951년. 한국군, 중국군 개입으로 서울 빼앗기고 부산으로 철수(1.4후퇴). 굳세어라 금순아 유행.
이재명 19세.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자형 별세. 거제도에서 피난민 생활.
1956년. 이승만 대통령 당선. 최초의 TV방송국 (HLKZ) 개국.
이재명 24세. 의정부 미군 영내 한국민예품 판매점에서 근무하며 초상화 그리는 일도 계속함.
1960년. 3.15 부정선거. 4.19 혁명.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재명 28세. 맏딸 현주 동두천에서 태어남.
삼칠일 지나고 서울로 올라와 광장시장에서 외래화장품 장사 시작.
1961년. 5.16군사쿠데타 발생. 어린이날 공식 제정.
이재명 29세. 예지동 단칸 문간방 시절. 외래품 판매금지법 강력 시행으로 부산, 경주로
때늦은 신혼여행. 메리야스 장사 시작.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이재명 30세. 장남 봉진 태어남.
1964년. 이재명 32세. 막내 지영 태어남. 1963년 박정희, 대통령 당선. 한국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 판매.
이재명 31세. 충신동으로 이사.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경부선 새마을호 운행 개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 피살. 오리온 초코파이 첫 출시.
이재명 42세. 아내의 몸무게가 40kg까지 빠지면서 병색이 완연. 나전칠기 사업으로 사업전환을 검토하면서 메리야쓰 장사 정리.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민방위대 창설.
이재명 43~79세. 우석공예사 창업으로 나전칠기 도매업 시작.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일어남. 언론통폐합 조치 발표.
이재명 48세. 나전칠기 브랜드 ‘은행잎표’ 상표 등록.
1994년. 북한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완간.
이재명 62세. 아내가 유방암 진단 받음.
2001년. 한국, IMF 빚 모두 갚고 경제주도권 회복. 인천국제공항 개항.
이재명 69세. 아내, 63세로 운명. 막내 지영이네가 사는 가락동으로 맏딸 가족과 함께 이사. 아들네도 부근으로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