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2.부산시 관광

부산초읍 성지곡수원지의 역사

동방박사님 2014. 11. 3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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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적 답사 : 2014.11.30(일)

답사장소 : 성지곡수원지-복병산배수지

 

성지곡 수원지(부산시 초읍동)

어린이 대공원이 있는 성지곡 수원지는 부산의 이름난 경승지로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지리에 뛰어난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자인 지광 성지(聖知) 라는 지관 (혹은스님이라고 함)이 전국명산을 찿아 다니던중 철장(鐵粧)을 을 찿아 꽂았다는 데서 "성지곡'이라는 이름이 붇여졌다

이시설은 1907년에 착공하여 1909년 9월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수로용의 수원지로 제방높이가 27m 길이112m 에 이르는 철근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축조됐다.저수량이 61만제곱미터에 수심이 22.5m이다.

착공당시 부산의 인구가 4만명 남짓 이었는데 30만명가지 늘어날것을 대비하여 댐을 건설했다.

수원지가 준공 되면서 서면에서 수정동 지역가지 수돗물을 공급했으나, 1972년 낙동강 상수도 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1985년 1월부터 용수공급량을 중단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돌붙임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거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성지곡수원지다. 또 한일 합작품으로 만들어진 댐은 대한제국 융희3년에 완공하였고, 등록문화재제376호로 지정되었다.

 

부산의 상수도가 처음 만들어진것은 1876년 개항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지금의 광복동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생기면서 식수문제가 생겨났다. 그결과 1894년 6월 보수천에 숯과모래를 이용한 자연여과장치를 만들고 송수관을 설치한다. 이것이 전국최초의 근대상수도 시설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때 많은 일본일들이 부산으로 건너온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전관거류지에 거주했던 일본인은 4천여 명에서 러일전쟁이 끝난 후 1만6천 명으로  4배정도 늘어난다. 자연히 늘어난 인구의 식수 공급을 위해 보다 큰 수원지 개발이 필요했다.

 

식수난에 시달리던 일본인들이 눈을 돌린 곳이 성지곡이었다. 수량이 풍부한데다가  도심에서 떨어져 땅값이 저렴한 것이 일본인들의 구미에 맞았다. 급수인구를 5만 명으로 예상하고 축구장 크기의 8배에 달하는 거대한규모의  수원지를 만든다.1908년 4월부터 1910년 9월 수도시설 공사가 이뤄졌다. 

성지곡 수원지는 당대 최고의 댐 기술이 동원되었더.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중력식 땜이다.

콘크리트의 댐은 물위 힘에 의해서 댐이 무너지거나 밀리지 않게 해준다. 또한 지진등 천재지변에도 콘크리트의 무게가 물의 압력을 받아주도록 만든 댐이다 .

 

 저수지 댐 안의 물은 아래의 침전지 댐으로 이동하는데 이곳에서 물 속의 토사들이 가라앉게 된다. 침전지 댐의 맑은 물은 12m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것은 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낙차를 하면 산소와 접촉하면서 물에 산소가 흡수되면서 훨씬 좋은 수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하나 주목해야 할것은 저수지 상류에 위치한  "사방수로" 이다. 사방수로는 비가 올 때 흙과 모래가 저수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고 빗물을 한데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1900년대 초반에 이런 상수 처리 기술을 도입해서  이곳에 설치 했다는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다.

 

성지곡 수원지는 상수로 확보의 유기적인 시스템인 집수,저수, 침전, 도수로 등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 되어 있으며 여수로 (저수지에서 물이 일정량을 넘을때 여분의 물을  빼내기 위하여 만든 물결) 는 당시 하루에 거주하는 농민에게 수원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한 이시기에 축조된 영국식 댐에서 볼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징수과정을 보면 수원지내에 거미줄 처럼 사방수로 (砂防水路)를 라 흘러든 물을 저수지에 가두고 이를 침전지 댐으로 보내 도시를  가라 앉힌 다음 그곳에 고인 맑은 물을 임거수로를 통해 여과지로 운반한다. 이런 전체과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 마치 상수도 박물관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댐 마루엔 또다른 볼거리가 있다. 영어로 새겨진 석판이 있는데  여기에는 성지곡 수원지 공사에 참여한 일본인 기술자 명단이 있다. 그중에 눈에 띄는 이름은 댐의 설계자인 "사노 토지로"이다. 도쿄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댐을 배워온 엘리트 기술자이다. 그가 일본에서 만든 "누노비키댐"은 선진 상수도기술이 녹아있는  일본의 최초 콘크리트 댐이다. 이 기술을 성지곡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 콘크리트댐의 원조격인 성지곡 댐은 지금의 기술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이다.   

 

"사노토지로"의 능력을 잘보여주는 것이 여수로(餘水路)이다.

여수로는 장마 때 물이 댐을 넘치는 것을 막아 물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으로 댐 몸체에 붙어있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사토 토지로는  성지곡의 여수로 댐에서 부터 수원지아래의 마을까지 곡선으로 길게 내었다.

 당시 수원지 아래의 마을 에는 주민 3천명이 살고 있었는데, 수리권을 이유로 공사에 필요한 부지 매각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논에 필요한 시기에 물을 풀어 주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여수로를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은 하류에 거주하는 농민들에게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성지곡 상수도 사업은 처음부터 일본인 들의 필요에 의해, 일본인들이 주도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재미있는것은 이사업에 대한 제국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댐마루끝에 붙은 표지석에는 융희(隆熙) 3년 준공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옆 글씨는 지워진 자국이 선명하다.

1909년을 일컫는 융희 3년은 대한민국이 마지막 연호이고 메이지 42년은 일본의 연호이다.이것을 통해 대한제국과 일본이 함께 상수도 사업을 진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대한제국은 자본주의에 겨우 눈을  뜰 때였다. 하지만 대한제국 재정이 열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간의 자본을 동원해 할 수 있는 국가 사업이라면 얼마든 추진할 의사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돈을 주고 물을 산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조선보다 앞서 상수도가 보급되었기 때문에 돈을 주고 물을 사먹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보면 대한제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인들은 물을 팔 수 있는 고객이었다. 대한제국은 상수도 사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데 광복동에 탁지부 산하의 상수도 사무소를 개설해, 일제 강점기 전까지 성지곡 상수도 공사를 관리하게 된다. 성지곡 상수도 사업의 자금으 일본거류민단에서 대고, 관리는 대한제국이 하는 방식으로 타협이 됐다. 결국 대한제국이 마지막까지 당과 토지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지곡 수원지 가을 모습

 

성지곡 편백나무길. 부산시민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복병산 배수지(부산시 대청동)

성지곡 수원지의 물은 중구의 복병산 배수지로 운반되었다. 복병산 배수지는 물을 시내의 여러 구역으로 보내기 전에 잠시 보관 해두는 곳이다. 이곳 입구에는 당시 일본인 들이 물을 얼마나 간절히 필요로 했는지를 보여주는 현판이 있다. 요지무진(瑤池無盡) 은 선경(仙境)의 물처럼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뜻으로 배수지의 중요성을 적은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성지곡 수원지에서 복병산 배수지까지 송수관을 설치해 물을 끌어 왔다는 것이다. 도로를 따라 땅 밑으로 철관을 깔았는데 그 거리가 대단했다. "성지곡에서 복병산 까지 직선거리가 10km된다. 그러나 도로를 따라온 곡선거리를 따지면 약 1.5배 된다고 봤을대 15km라고 예상 할수 있다. 이지역은 암반이 많은데

당시 장비나 토목기술로 봤을 때 지하에 송수관을 묻어서 여기까지 연결한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공사로 여겨진다. 

복병산 배수지엔 4만 5천 명이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이  저장돼 인근 일본인 거주지에 공급되었다.

성지곡 수원지가  조성되자 수도보급이 본격화 되면서 이전보다 수도 보급률이 2배 정도 늘어나게 됐다.

도시가 만들어지고 그에 걸맞는 기반 시설들이 점점 필요해 졌다. 상수도 시설은 도시형성에 있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요소였고 성지곡유원지를 시작으로 일본인은 본격적인 상수도 사업을 펼친다. 100년전, 성지곡 수원지야말로 부산 상수도의 역사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 

 

 

 

가을비가 종일 내렸지만 부산의 근대유적답사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낄수 있는 하루였다. 

 

 

 

복병산 배수지는 부산 중구청 뒷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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