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인문교양 (독서)/2.에세이

경성에서, 정월. (2024) - 여성, 화가, 지식인 나혜석이 그린 여러 정체성의 나날

동방박사님 2024. 4. 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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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식민지시대 여성 지식인 나혜석,
자아와 행복을 그리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0세대 페미니스트, 최초의 여성 세계 여행가, 교육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여러 소설과 산문으로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작가… 다방면에서 재능을 꽃피우고, 그만큼 다양한 정체성으로 강렬한 발자취를 남긴 정월(晶月)나혜석의 산문집. 그가 남긴 수많은 산문 중에서 화가로서·여성으로서·지식인으로서의 나날들과 그에 얽힌 사색이 잘 드러난 작품을 엄선하였다. 〈경성에서, 정월.〉을 통해 생생하게 펼쳐지는 나혜석의 생각과 일상을 접하다 보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화가로 어머니로

어머니로서
모(母) 된 감상기

부인으로서
이혼 고백장
이혼 고백서(속)

화가로서
미전 출품 제작 중에
나를 잊지 않는 행복
모델

독신자로서
신생활에 들면서

에필로그 잡감
 

저자 소개

저 : 나혜석 (Na Hye-seok ,晶月 羅蕙錫)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

책 속으로

나는 다만 여러 부인들께 이러한 말을 자주 들어 왔을 뿐이었다. “여자가 공부는 해서 무엇 하겠소. 시집가서 아이 하나만 낳으면 볼일 다 보았지!”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언제든지 코웃음으로 대답할 뿐이오, 들을 만한 말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리 만무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것은 공상이 아니라 구미 각국 부인들의 활동을 보아도 그렇고 또 제일 가까운 일본에도 요사노 아키코(?謝野晶子)는 10여 인의 어머니로서 달마다 논문과 시가 창작으로부터 그의 독서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아니하려니까 그렇지? 다 같은 사람, 다 같은 여자로, 하필 그 사람에게만 이런 능력이 있으랴’ 싶은 마음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잘 생각한 것 같았다.
--- pp.23-24

아이들아, 너희들은 일찍부터 역경을 겪어라. 너희는 무엇보다 사람 자체가 될 것이다. 사는 것은 학문이나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야 사는 것이다.
--- p.85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철쇄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하게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혀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 pp.101-102

이와 같이 누가 시키는 일이나 하는 것같이 퉁명스럽게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리라 하고 단념을 해 보기도 하고 ‘이 이상 진보치 못 할까? 아니, 못하리라’ 하고 무재무능을 긍정하여 절망도 하였다. 그러다가도 무슨 실낱같은 인연 줄이 끄는데 당기면 깜짝 놀라 ‘내가 그림 없이 어찌 살라고’ 하는 생각이 난다. 과연 내 생활 중에서 그림을 제해 놓으면 실로 살풍경이다. 사랑에 목마를 때 정을 느낄 수도 있고, 친구가 그리울 때 말벗도 되고, 귀찮을 때 즐거움도 되고, 괴로울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이 그림이다.
--- p.114

여자는 시집가서 자식 낳고 아침저녁 반찬 걱정하다가 일생을 보내는 범위를 떠나면 불행이라 한다. 그러나 그 범위 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행복이고, 한번 그 범위를 벗어나서 그 범위 내에 있는 자를 보라. 도리어 그들이 불행하고 자기가 행복된 것을 느끼나니. 날마다 같은 생활을 되풀이하는 그 침체한 생활에 비교하여 시시각각으로 변천하는 감각의 생활을 하는 자기를 보라. 얼마나 날마다 그 인생관이 자라 가고 생의 가치를 느껴 가는지. 사람은 그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이 사는 시간이 아니요,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사는 것이다.

세상에는 사회에 얽매이고, 친구 가족에게 얽매이고, 생활에 얽매여 그 몸을 옴치고 뛰지 못하는 자 얼마나 많은가. 실로 불행한 자로다. 한번 독신의 몸이 되어 보라. 그 몸이 하늘에도 날 것 같고, 땅에도 구를 것 같으며, 전후좌우가 탁 트여 거칠 것이 없이 그 몸과 마음이 자유롭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들이 못 하는 일, 그들이 못 하는 생각을 해 놓나니 역대의 위인 걸사 명작가들의 그 예가 많다.
--- pp.148-149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로 오거든 네 어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 다오.
--- p.156

출판사 리뷰

“내 앞에는 장차 더한 고통, 더한 희망, 더한 낙담이 있기를 바라며”
여성, 화가, 지식인 나혜석의 가장 입체적인 자화상

나혜석은 가장 혼란한 시대 한가운데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며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여성이다. “남보다 더 한 가지 맛을 봄을 행복으로 안다”고 말하는 그는, 그림을 비롯하여 소설·산문·비평 등의 글로, 교육자로서 가르침으로, 독립운동으로… 자신의 한계와 틀을 만들지 않고 매순간 치열하게 살아갔다.

《경성에서, 정월.》은 정월 나혜석이 조선의 여성으로서 생생한 목소리를 내고, 지식인으로서 인생에 대해 통찰하고, 화가로서 분투한 작업기를 그리며 자신은 어떤 인간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 모습들을 솔직하게 담은 산문들을 엮은 산문집이다. “인생은 가정만도 인생이 아니오, 예술만도 인생이 아니다. 이것저것 합한 것이 인생이외다”라는 정월의 말처럼, 나혜석의 한 가지 면모에 집중하지 않고, 그의 ‘이것저것’을 조명해 나혜석을 더욱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했다.

책은 크게 나혜석의 4개 정체성을 담았다. 어머니로서, 부인으로서, 화가로서, 독신자로서의 그의 일상과 생각을 담아낸 산문을 선별했다. 어머니로서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며 모성에 의문을 던져 당시 조선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나는 좀 더 사회인으로 주부로 사람답게 잘 살고 싶었습니다.” 한 남자의 부인으로 살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고뇌하고, “그림보다도 그것을 그리는 동안에 형형색색으로 당한 사실이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승리자가 된 것 같아 참을 수 없이 유쾌하였다”라며 화가로서 궁리하고 발버둥 치다 마침내 성취감을 맛보고, “독신자처럼 불행하고도 행복스러운 자는 없다”라며 독신자로서 인생과 미래, 그리고 무엇보다 자아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한다.

또한 생일을 맞으면 절에 간다거나, 절이 식사와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었다는 등 나혜석이 직접 말하는 그의 일상을 통해 100년 전 일제강점기 신여성·직업인으로서의 소소한 삶을 엿보는 재미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동기는 사람답게 잘 살자는 건방진 이상이
뿌리가 빠지지 않는 까닭이었습니다.”

정월 나혜석의 내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고민과도 닿게 된다. 여성으로서의 삶, 자아, 인생, 인간관계, 사회, 행복, 성취, 업(業)… 100여 년 전의 그가 치열하게 숙고했던 주제는 여전히 우리도 싸우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00년 전에도 작가는 사회나 성별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런 운명들은 순응하면 자신을 더 옭아매고, 힘껏 부딪치면 능히 깰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으로 그는 매순간 한계에 맞서고 ‘최초’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이렇게 자신답게, 사람답게 잘 살고자 했던 나혜석이기에, 또 그런 분투의 과정을 그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글로 표현했기에, 나혜석은 지금의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공감과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다 운명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순순히 응종하면 할수록 점점 증장하여 닥쳐오는 것이다. 강하게 대하면 의외에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_본문 1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