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4.인천시 관광

인천지역 근대유산 답사3

동방박사님 2018. 10. 30.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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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1884년 일본인 호리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호텔  대불 (大佛)은 주인 호리의   별명 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고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1883년 인천이 개항하자, 수많은 서양의 외교관, 여행가, 선교사, 상인들이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사진과 기록으로 당시 인천 개항장의 모습을 담아냈고, 조선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 땅을 밟은 각국의 외교사절과 여행객들의 주목적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개항 당시는 인천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데 12시간 이상 걸릴 정도로 교통수단이 열악하였다. 오랜 향해를 마치고  제물포에 도착한 여행객들이 이 거리를 이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중간 기착지인 인천에서 이들이 머므룰 수 있는 숙박시설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나가사키 출신의 무역상인 호리 히사타로와 그의 아들인 호리 리키타로는 이 점에 주목하여 호텔운영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大佛) 호텔이다. 처음에는 2층의 일본식 목조 가옥이었으나, 곧이어 3층의 서양식 벽돌 건물을 신축하고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추어 본격적으로 서양인 고객들을 맞아 들였다.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영국인 탐험가 새비지 랜도어 등이 대불호텔에 투숙하고 남긴 기록을 통해 대불호텔의 전성기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의 호텔업은 쇠락하게 되엇고 대불호텔 또한 극심한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이후 중국요리집으로 운영 되었다가 결국 시대의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건물이 철거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동방의 횃불

한국 최초 선교를 기념하는 공원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흉상 (좌우)과 중앙에 성령의 불길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운다. 한국과 아시아 선교를 갈망하여 헌신하신 두 분의 뜻이 오늘날 전 세계에 실현되고 있음을 목도한다. 주님의 지상명령인 선교와 이웃사랑의 정신은 이 조형물과 더불어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2009년 5월17일.


지금 내 눈 앞에는 새로운 조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장차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사랑과 화목과 협동의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치는 학교들이 보이고, 도시와 마을마다 자비량으로 운영되는 기독교병원들이 보입니다. 이 아라의 모든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긍휼을 베푸는 기관들이 세워져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섬기고 여기저기, 죽어가는 자들에게 빛과 기쁨을 주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나라가 힘 있고 복된 감화의 두 팔을 내밀어서 한 팔로는 중국을 , 다른 한 팔로는 일본을 겨 않아, 세나라가 다 기독교국가가 되어 모두 손에 손잡고  한 큰 원을 그리어, 어린양을 영원토록 찬송하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를 소리 높여 찬양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언더우드의 '조선의 부름"중에서)


우리는 부활절 날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사망 권세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게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1885년 부활 주일에)








9.인천 화교교회

1917년 데밍 선교사에 의해설립된  인천 최초의 화교교회






의선당

1883년 청나라 영사관이 인천 선린동에 설립됨에 다라 선린과 북성 두 동은 화교들이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점차 차이나타운 (청관) 거리가 되었다. 그 해, 인천에 체류하던 화교들은 후에 고향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작은 묘당을 건립하였고 "의선당 " 이라고 불렀다. 

대웅전은 호산할아버지 (산신령), 용왕신, 부처님의 광명이 두루 비추는  관세음보살, 의를 중하게 여기기를

천년을 이어 간다는 관공, 삼신할머니등 5좌 신상을 모시는 것 외에도 다양한 민간 신앙의 신을 모셨다.

의선당은 중국인들이 현지에 거주하고 바다에서 향해하며 무역 교류나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평안과 희망을 기원하고 더욱 화교가 단결하고 정의가 가득하도록 살기위해 건설한 것이다.













10.극동방송국 터 (조미수교 통상조약이 이루어진 곳)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곳 이자 1968년 인천 최초 방송국인 극동방송이 세워진 장소








11.대불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1884년 일본인 호리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호텔  대불 (大佛)은 주인 호리의     별명 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고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1883년 인천이 개항하자, 수많은 서양의 외교관, 여행가, 선교사, 상인들이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사진과 기록으로 당시 인천 개항장의 모습을 담아냈고, 조선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 땅을 밟은 각국의 외교사절과 여행객들의 주목적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개항 당시는 인천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데 12시간 이상 걸릴 정도로 교통수단이 열악하였다. 오랜 향해를 마치고  제물포에 도착한 여행객들이 이 거리를 이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중간 기착지인 인천에서 이들이 머므룰 수 있는 숙박시설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나가사키 출신의 무역상인 호리 히사타로와 그의 아들인 호리 리키타로는 이 점에 주목하여 호텔운영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大佛) 호텔이다. 처음에는 2층의 일본식 목조 가옥이었으나, 곧이어 3층의 서양식 벽돌 건물을 신축하고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추어 본격적으로 서양인 고객들을 맞아 들였다.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영국인 탐험가 새비지 랜도어 등이 대불호텔에 투숙하고 남긴 기록을 통해 대불호텔의 전성기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의 호텔업은 쇠락하게 되엇고 대불호텔 또한 극심한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이후 중국요리집으로 운영 되었다가 결국 시대의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건물이 철거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3.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인천기독교계가 인천기독교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86년 세운 조형물로 아펜젤러 선교사의 기도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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