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2.한국사일반

병자호란 47일의 굴욕

동방박사님 2021. 12.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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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조,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三排九叩頭)
굴욕의 역사 병자호란


1636년(인조14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런 사건 중의 하나다. 역사 이래 우리나라는 많은 외적의 침입을 당하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일본에 의해 국권 침탈 등의 수난을 당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왕이 외국의 왕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술잔을 올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조선조의 인조가 유일하다. 물론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영류왕이 당나라에 압송되었다는 설은 있지만, 그래도 머리를 조아린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과 관련된 국내의 출판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일반인이 기억하고 있는 병자호란에 대한 지식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남한산성으로의 피난과 삼전도의 치욕, 최명길과 김상헌, 그리고 삼학사에 대한 어렴풋한 지식이 거의 전부일 지도 모른다. 역사는 늘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파생해낸다. 그렇게 파생되어 흘러넘치는 이야기들이 진실처럼 떠돌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점에 있어서 철저히 객관적이다. 또한 저자는 추론을 삼가고 사실 전달에 주력하고 있다. 온전히 자료에 의존함으로써 독자들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집필 근거를 나만갑의 〈병자록〉, 정약용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고 있다. 특히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옆에서 보좌하며 식량과 물품을 관리하던 양향사라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직접 접하고 가감 없이 기록했을 것이다. 즉 저자가 말하는 〈병자록〉의 진실성에 대한 근거이다. 또한 저자는 조선조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을 철저히 들추어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을 정리함으로써 신뢰를 더해준다.

또한 당시와 오늘의 시대상황을 견주어 음미해볼만 한 대목이 많다. 강대국에 끼어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이나, 국난에 처해 있으면서도 정치인들이 벌이는 탁상공론들이 오늘날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누구의 결정이 옳았는지 나름 주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늘 현재의 잣대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말: 병자호란, 다시 그 전장(戰場)으로 가다


제1부 : 전운이 감도는 조선의 산하
1장,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는가?
-명나라를 받들 것인가, 후금을 따를 것인가
-정묘호란-후금, 형님의 나라가 되다
-청나라 사신을 홀대하다

2장, 용골산 봉수대에 봉화가 올랐는데…
-화의냐, 척화냐
-청군이 질풍처럼 달려오다

제2부 : 남한산성 47일의 일기
3장, 장차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1636년(병자년)
-12월 14일 :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다.
-12월 15일 : 실패한 강화도행, 미끄러지고 엎어지고
-12월 16일 : 적의 머리 하나에 은 30냥
-12월 17일 : 세자, 적진으로 가다
-12월 18일 : 최명길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12월 19일 : 인조, 강화도 방비를 당부하다

4장, 화의냐 척화냐
-12월 20일 : 마부대가 화의를 청하다
-12월 21일 : 심열, 강화를 주장하다
-12월 22일 : 40여 명의 청군을 죽이다
-12월 23일 : 적의 목을 매달다
-12월 24일 : 눈물이 임금의 옷을 적시다
-12월 25일 : 사신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12월 26일 : 지원군은 나아가 진군하지 않고…
-12월 27일 : 고기나 술은 너희나 먹어라
-12월 28일 : 강화를 논의하다
-12월 29일 : 적과 싸워 크게 패하다
-12월 30일 : 곤궁의 나날이 이어지다

5장, 화의로 기울다
1637년(정축년)
1월 1일 : 청의 황제가 조선에 오다
1월 2일 : 대청국 황제는 조선의 국왕에게 조유하노라
-청나라 제1차 조서
1월 3일 : 백성들은 잡혀가고, 민가는 불타고…
-조선의 제1차 상서
1월 4일 : 김상헌, 화친에 반대하다
1월 5일 : 도망치는 병사의 목을 베다
1월 6일 : 하릴없이 하루가 가다
1월 7일 : 도원수 김자점이 장계를 올리다
1월 8일 : 적의 군사는 배가 부른데…

6장, 성의 안과 밖이 끊기다
1월 9일 : 화친에 대해 논하다
1월 10일 : 적의 목을 베어 오라 했더니…
1월 11일 : 최명길, 2차 상서를 쓰다
-조선의 제2차 상서
1월 12일 : 청의 군사가 또 증강되다
1월 13일 : 청의 장수에게 뇌물을 주다
1월 14일 : 고난의 나날은 계속되고…
1월 15일 : 화친과 전투를 병행하다

7장, 무조건 항복하라
1월 16일 : 청, 항복을 요구하다
1월 17일 : 조선의 임금이여, 네가 살고자 하느냐?
1월 18일 : 김상헌, 국서를 찢고 통곡하다
-조선의 제3차 상서
1월 19일 : 어찌 신(臣)이라 일컬으며…
1월 20일 : 척화 주모자를 보내라
-청의 제3차 조서
1월 21일 : 적이 상서에 화답하지 않다
-조선의 제4차 상서

8장, 오직 살 길은 항복뿐
1월 22일 : 척화를 주장한 것이 죄인가
1월 23일 : 장교들이 궁에 들어와 농성하다
-조선의 제5차 상서
1월 24일 : 적이 망월봉에 대포를 설치하다
1월 25일 : 임금은 성에서 나오라
1월 26일 : 차라리 죽고 싶소


9장, 항복, 치욕의 삼전도
1월 27일 : 임금이 성을 나가기로 하다
-조선의 제6차 상서
-김상헌, 자살을 시도하다
-정온도 자살을 시도하다
1월 28일 : 임금의 항복절차를 논의하다
-청나라 제4차 조서
1월 29일 : 척화파 대신을 바치다
-조선의 제7차 상서
1월 30일 : 굴욕의 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예를 표하다

10장, 적군이 돌아가다
2월 1일 : 인조, 서울로 돌아오다
2월 2일 : 청 황제, 북으로 돌아가다
2월 3일 : 역관 정명수에게 벼슬을 내리다
2월 4일 : 종묘사직의 신주가 돌아오자 임금이 눈물을 흘리다
2월 5일 : 무관이 득세하다
2월 6일 : 인조, 청나라 9왕을 만나다
2월 7일 : 포로를 돌려받다
2월 8일 : 소현세자, 인질로 끌려가다

제3부 산성 밖의 전투

11장, 지원군들, 나아가 싸울 생각이 없었다
- 산성 밖 각처에서의 전투
- 유림의 탑골 전투

12장, 강화도 함락
- 검찰사 김경징의 만행
- 자결한 사람들

제4부 전란은 끝났는데…

13장, 척화의 주역들
- 홍익한, 척화의 주역으로 지목되다
- 참수당한 오달제와 윤집
- 척화의 거두, 김상헌

14장, 전란 후의 이야기들
- 인조의 유시
- 광해군을 제주도로 부처하다
- 김류와 윤방의 죄를 묻다
- 조선국왕 책봉서
- 삼전도 전승비를 세우다
- 청나라 군사의 가도 공략
- 청이 파병을 요구하다
- 의주품관 최효일과 의주부윤 황호일 사건

15장, 심양으로 간 인질들의 수난
- 역관 정명수를 제거하라
- 심양에서 날아온 밀서
- 정뇌경, 의연하게 죽다

16장, 비운의 왕세자, 소현
- 8년의 볼모생활
- 스스로 인질을 자처하다
- 아버지 인조와의 갈등
- 소현세자 가족의 의문의 죽음들
- 세자빈 강 씨의 죽음
- 인조의 끝나지 않은 전쟁

부록
주요 인물 사전
 

저자 소개

저자 : 윤용철
순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일어와 철학을 전공했다. (주)두산동아 국제저작권팀장, (주)교보문고 출판부 편집장, (주)정보통신연구원 이사, 월간 〈리눅스메거진〉 발행인 및 (주)SuSe 한국법인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교과서 대표로 있으며, 저서로는 〈조선인물청문회〉가 있다.
 
 

책 속으로

새벽에 임금이 강화도로 가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섰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큰 눈이 내려 산길이 얼어붙고 임금이 타고 가던 말이 미끄러져 엎어진 것이다. 임금은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으나 수없이 자빠지고 엎어졌다. 결국 다시 성 안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훈련도감 대장 신경진이 서울에서 내려오자 성내의 수비를 정비했다. 신경진을 동쪽 망월대를 수비케 하고, 이현달을 중군으로 삼고, 호위대장 구굉은 남쪽을 지키게 하였다. 수원 부사 구인후는 그가 거느리고 온 군사에 본부의 군사를 더해 구굉을 돕게 하였다. 상중에 있는 이곽을 불러 중군으로 삼고, 총융청 대장 이서는 북쪽을 지키게 하고, 수어사 이시백은 서쪽을 지키게 하였으며, 이직을 중군으로 삼았다.
전날, 산성을 영남 군사로 나누어 지키게 하였는데 길이 멀어 미처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체찰사 김류가 경기도 수령들로 하여금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였다. 여주 목사 한필원, 이천 부사 조명욱, 양근(지금의 양평군) 군수 한회일, 지평 현감 박환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데리고 겨우 성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태반의 많은 군사들은 미처 들어오지 못했다. 성 안에 들어온 군사가 서울 병력과 지방 병력을 합해 겨우 1만 2천 명이었고, 문무 관리가 2백여 명, 그 밖의 노복과 사람들이 2백여 명이었다. 이때 최명길과 이경직이 홍재원에서 돌아와 고했다.
“마부대가 강화를 하기 위해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삼전도에 와 있는데, 바람이 불고 날씨가 몹시 추워 인가에 들어가 있으라 했으나 아직 화의가 맺어지기 전이니 눈바람을 맞을지언정 인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과 얼굴빛으로 보아 절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정은 모두 최명길의 말을 믿었지만 임금은 이번에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경은 필시 속은 것이다. 어찌 세 가지 조건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겠는가.” ---pp.45~46 실패한 강화도행, 미끄러지고 엎어지고

조선의 제3차 상서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엎드려 절하고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밝으신 뜻을 받자오니 간곡하신 타이름을 내리셨습니다. 그 책망하심이 엄하신 것은 곧 가르치심이 지극하심입니다. 가을 서릿발 같이 매운 가운데 봄날이 소생하는 뜻이 들어 있어, 엎드려 읽고 황감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국의 위엄과 덕이 멀리 미쳐서 모든 번방이 입을 모아 하늘과 사람이 귀의하여, 크신 명령이 바야흐로 새로운데, 소방은 10년 형제의 나라로서 도리어 흥운의 시초에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반성하여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는 뉘우침이 있습니다. 지금의 소원은 다만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지난날의 습관을 깨끗이 씻고, 온 나라를 들어 다른 모든 번방과 같이 명을 고자 할 뿐입니다. 진실로 뜻을 굽히시어 위급을 안전하게 하심을 입어 스스로 새로워짐을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절차에 응당 행할 의식이 있을 것이니, 그렇게 행하겠습니다.
오늘에 있어 출성(出城)하라는 명령은 실로 인복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그러나 아직 겹겹이 둘러싼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의 노여움이 대단하시어, 여기 있어도 죽고, 성을 나가도 역시 죽을 것이므로 용기를 멀거니 바라보고 자결하고 싶을 뿐이니 정상이 부끄럽습니다. 옛날 사람의 말에 “성 위에서 천자를 뵈는 자는 예를 그만둘 수 없고 병위 역시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방의 소원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으니, 이는 아뢸 말씀을 다 아뢴 것입니다. 이는 깨달아 경계함이요, 마음을 기울여 귀순함입니다.
황제께서는 바야흐로 천지의 모든 생물까지도 마음에 두시는데, 소방이 어찌 온전하게 살아 후하신 보양 가운데 듦이 부당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히 여겨 용서하실 것이라 감히 진정을 토로합니다. 삼가 은혜로운 말씀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글은 이조 판서 최명길이 쓴 것이다.---pp.134~135 김상헌, 국서를 찢고 통곡하다

오달제, 윤집은 척화파가 되어 적진에 가게 되었는데도 기색이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고 의연했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이날 저녁에 윤집과 오달제는 하직 인사를 하러 임금을 뵈었다.
“그대들의 식견이 얕다고 하지만 그 원래의 의도를 살펴보면 본래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윤집이 아뢰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이어 오달제가 말했다.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임금이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단지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시게 된 것을 망극하게 여깁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대들의 뜻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지키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 그대들에게 부모와 처자는 어디에 있는가?”
윤집이 먼저 대답했다.
“신은 아들 셋이 있는데, 모두 남양(南陽)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부사(府使)가 적을 만나 몰락하였다고 하니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이어 오달제가 대답했다. ---pp.190~191 임금의 항복절차를 논의하다

햇빛이 나지 않아 날씨가 암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임금이 빨리 나오기를 재촉했다. 임금이 푸른 옷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으며, 그 뒤를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처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또한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목 놓아 슬피 울었다. 임금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기병 수백 명 달려 왔다. 임금이 물었다.
“저들은 뭐 하는 자들인가?”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소위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가 임금을 위로하자 임금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용골대는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임금은 단지 삼정승 및 판서, 승지 각 5인, 한림, 주서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 익위사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청의 황제가 황금빛 천막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들이 좌우에 옹립해 있었다.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임금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른 뒤 평지의 차가운 진흙 위에서 절을 했다. 그리고는 임금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한 뒤 용골대가 황제에게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청 황제의 말을 전했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그리고 임금은 용골대의 뒤를 따라 단 아래로 갔다. 임금은 북쪽을 향해 마련한 자리 위에 앉아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그 뒤에 용골대는 임금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혔다. 강화도에서 잡혀온 두 대군과 신하들이 단 아래 서쪽에 죽 늘어섰다. 용골대가 청 황제의 말을 받아 임금에게 단에 오르라 명령했다. 청의 황제는 남쪽을 향해 앉고 임금은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그 옆으로 청나라 왕 3명이 차례로 나란히 앉았다.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 4명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달아 앉았다. 우리나라 대신들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화도에서 잡혀 온 신하들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 잔을 올린 뒤 청 황제는 용골대를 시켜 조선의 여러 신하들에게 고했다.
---pp. 197~199 굴욕의 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예를 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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