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미술의 이해 (책소개)/3.서양미술사

한 눈에 보는 서양 미술

동방박사님 2021. 12. 27.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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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눈에 보는 서양미술』은 서양미술을 단순히 보고 즐기는 데에서 나아가 인문학적 입장에서 작품을 자세히 읽고 이해하는 방식을 시도한다. 작품을 이해하는 유일한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해석이 모이면서 합당한 해석이 만들어지고 이를 통해 작품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의 해석을 바탕으로 그림을 읽고 이해하는 또 하나의 진전된 해석을 제공한다. 서양미술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자신만의 해석을 위한 인문학적 해석의 한 예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양미술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미술을 통해 보다 폭넓은 지적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 008

14-15세기 / 010

애도(조토) / 012
수태고지(마르티니) / 016
베리 공작의 기도서 중 1월(랭부르 형제) / 020
성 삼위일체(마사치오) / 024
아르놀피니의 결혼(반 에이크) / 028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판 데르 베이덴) / 032
산 로마노 전투(우첼로) / 036
장미 넝쿨 아래의 성모(로흐너) / 040
고기잡이의 기적(비츠) / 044
예수의 세례(피에로) / 048
골고다 언덕(만테냐) / 052
최후의 심판(멤링) / 056
포르티나리 제단화(판 데르 후스) / 060
비너스의 탄생(보티첼리) / 064

16세기 / 068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보스) / 070
모나 리자(레오나르도) / 074
아테네 학당(라파엘로) / 078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미켈란젤로) / 082
동방박사의 경배(뒤러) / 086
폭풍우(조르조네) / 090
이젠하임 제단화(그뤼네발트) / 094
바쿠스와 아리아드네(티치아노) / 098
율법과 은총(크라나흐) / 102
이수스 전투(알트도르퍼) / 106
대사들(홀바인) / 110
긴 목의 마돈나(파르미자니노) / 114
시간과 사랑의 알레고리(브론치노) / 118
눈 속의 사냥꾼(브뤼헐) / 122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엘 그레코) / 126
최후의 만찬(틴토레토) / 130

17-18세기 / 134

엠마오에서의 식사(카라바조) / 136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 가족(엘스하이머) / 140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젠틸레스키) / 144
파리스의 심판(루벤스) / 148
시간의 음악에 맞춰 추는 춤(푸생) / 152
참회하는 막달레나(라 투르) / 156
야간경비대(렘브란트) / 160
정물, 인생의 허무에 대한 알레고리(스텐베이크) / 164
시녀들(벨라스케스) / 168
시바의 여왕이 승선하는 항구(로랭) / 172
회화의 예술(베르메르) / 176
키테라섬의 순례(와토) / 180
유행에 따른 결혼: 결혼 계약(호가스) / 184
앤드루스 부부(게인즈버러) / 188
그네(프라고나르) / 192

19세기 / 196

나폴레옹의 대관식(다비드) / 198
대 오달리스크(앵그르) / 202
1808년 5월 3일(고야) / 206
뤼겐의 석회암 절벽(프리드리히) / 210
메두사호의 뗏목(제리코) / 214
건초 마차(존 컨스터블) / 218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들라크루아) / 222
전함 테메레르(터너) / 226
만종(밀레) / 230
화가의 아틀리에(쿠르베) / 234
올랭피아(마네) / 238
인상, 해돋이(모네) / 242
발레 수업(드가) / 246
뱃놀이 일행의 점심(르누아르) / 250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쇠라) / 254
아를의 침실(반 고흐) / 258
큐피드 석고상이 있는 정물(세잔) / 262
절규(뭉크) / 266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고갱) / 270

20세기 /274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클림트) / 276
최후의 만찬(놀데) / 280
춤 II(마티스) / 284
구성 IV(칸딘스키) / 288
거리, 베를린(키르히너) / 292
사회의 기둥들(그로스) / 296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II(몬드리안) / 300
파르나소스를 향하여(클레) / 304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호퍼) / 308
가을의 리듬(폴록) / 312

찾아보기 / 316

작품 제목 / 316
작가 이름 / 318
 

저자 소개

저 : 김홍섭
 
전남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독일문학은 물론 유럽의 문화와 예술, 미술사 등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교육우수상’, ‘탁월한 강의상’ 등을 여러 차례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새롭게 읽는 유럽 미술사』(2003), 『독일 미술사』(2004), 『미술로 읽는 독일문화』(2012), 『독일문학 깊이 ...
 

책 속으로

토마스 게인즈버러 Thomas Gainsborough, 1727-88
토마스 게인즈버러는 영국 잉글랜드 동부 서퍽주의 서드베리에서 방직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740년 런던으로 가 화가이자 판화가인 위베르 그라블로(Hubert Gravelot) 밑에서 그림을 배웠고, 호가스와 프랜시스 헤이만(Francis Hayman) 등 유명화가들과도 교류하였다. 1748년 고향인 서드베리로 돌아왔다가 더 많은 고객을 찾아 입스위치와 바스 등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반 에이크의 초상화를 연구하며 주로 지역 상인과 지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1769년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창립회원으로 초대되었고, 1774년에는 런던으로 이주해 귀족들과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리며 아카데미 전시에 참여하였다. 1780년에는 조지 3세와 왕비의 초상화를 그렸고, 이후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게인즈버러의 초상화는 로코코의 미적 감각에 정교한 자연주의를 결합해 하나의 화폭에 초상과 풍경을 동시에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그는 초상화에 풍경화를 결합시킴으로써 전통적인 초상화에서 벗어나 인물과 배경, 허구와 자연을 결합한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의 혁신적인 그림은 살아생전에는 상업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영국 풍경화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앤드루스 부부〉(1748-49)는 게인즈버러가 런던에서 미술 수업을 마친 후 고향인 서드베리로 돌아와 앤드루스 부부의 주문을 받고 그린 것이다. 로버트 앤드루스와 그의 아내 프랜시스 메리 카터는 1748년 각기 스물두 살과 열여섯 살의 나이에 결혼하고, 그 직후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의뢰하였다. 게인즈버러는 이 신혼부부를 유년기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남편 앤드루스와 게인즈버러는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앤드루스는 대지주이자 선주의 아들로서 졸업 후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했지만 게인즈버러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진학을 포기하고 미술 수업을 받았다. 또한 게인즈버러의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신부 카터의 집안에서 도와준 적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 신혼부부는 자신들이 물려받은 넓은 장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달리 배경이 되는 풍경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화폭의 반은 초상화에, 반은 풍경화에 할애하고 있는데, 이는 넓게 펼쳐진 신혼부부의 장원을 통해 그들의 부유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게인즈버러의 풍경화에 대한 열정과 풍경과 초상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던 그의 예술관을 읽을 수 있다.

장 앙투안 와토 Jean Antoine Watteau, 1864-1721
장 앙투안 와토는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지역 발랑시엔에서 지붕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역화가인 자크 알버트 재랭(Jacgues-Albert Gerin)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1702년에 파리로 가 무대 미술가였던 클로드 질로(Claude Gillot)의 공방에서 1705년부터 1708년까지 일했다. 여기서 그는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노래와 춤, 곡예 등을 중시하는 가벼운 희극)’의 익살스러운 연극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볼 기회가 많았는데, 이는 나중에 그의 예술 세계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어 장식화가 클로드 오드랑(Claude Audran)의 조수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오드랑은 당시 뤽상부르궁의 궁정화가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 궁전에 있는 루벤스나 플랑드르계 명화들을 접할 수 있었고, 16세기 베네치아파에서도 영향을 받아 점차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립해나갔다. 그는 연극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목가적이고 환상적인 그림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지병인 폐병으로 37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키테라섬의 순례〉(1717)는 와토가 1717년 아카데미 정회원이 된 기념으로 출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비너스의 성지인 키테라섬을 찾은 일단의 남녀를 주제로 그린 것으로 당시 아카데미의 모든 규범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주제 역시 기존의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는 와토를 위해 ‘페트 갈랑트(Fete galantes)’, 즉 ‘우아한 향연’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개설하였다. 야외에서 펼쳐지는 우아한 사교 장면을 일컫는 이 새로운 범주는 마치 공원 같은 분위기를 배경으로 상류사회 사람들이나 희극배우들이 등장하는 와토의 그림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의 ‘페트 갈랑트’는 특히 질로의 공방에서 보았던 코메디아 델라르테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와토는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루벤스의 중후함이나 건강한 생명력보다는 섬세하고 경쾌한 세련미와 우아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베네치아 화풍과 루벤스의 편안한 색채를 이용해 상류사회 여성들의 취향에 맞는 감미로운 로코코 미술을 유행시켰다.
〈키테라섬의 순례〉에서 볼 수 있는 경쾌한 주제, 인간과 자연의 조화, 파스텔 색조 등은 로코코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다른 로코코 화가들과는 달리 꿈꾸는 듯한 동경과 더불어 덧없는 삶에 대한 정서가 깔려있다. 이는 그의 허약한 건강과도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렘브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 1606-69
렘브란트 반 레인은 네덜란드 남서부 레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여 일찍 학교 공부를 그만두고 1620년 역사화가 야콥 반 스바넨부르흐(Jacob van Swadenburgh) 밑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그 후 암스테르담으로 가 역사화가 피터 라스트만(Piter Lastman) 밑에서 공부한 후 1626년 고향으로 돌아와 공방을 열었다. 1631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고,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으면서 1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1640년 이후에는 바로크적 역동성이나 신비적 체험보다는 인간의 내면적 심리상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면서 쉽고 편안한 그림을 원하는 당시 고객층과 멀어지게 된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어려워져 1656년에는 파선선고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오히려 예술세계는 더욱 원숙해졌는데, 오늘날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부분은 164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렘브란트는 인간의 심리적 갈등, 번뇌, 사색, 존엄성과 같은 신앙심을 표현하는 데 있어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사실주의적 경향과 바로크적 특징을 적절히 이용하고 뛰어난 명암 효과를 통해 새로운 회화 영역을 개척하였다. 특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그의 자화상은 일종의 자서전이라 할 정도로 그의 인간적 면모와 예술적 편력을 반영하고 있다. 가식 없는 그의 자화상들에는 자아성찰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야간경비대〉(1642)의 원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렘 반 로이텐부르크의 민방위대〉이다. ‘야간경비대’라는 제목은 18세기에 붙여진 것이다. 실제로는 그림의 배경이 대낮이지만, 겹겹이 쌓인 먼지와 바니시(니스) 등으로 인해 작품이 검게 변색된 것을 보고 밤에 행사가 열린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제2구역 민병대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단체 초상화이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인물들을 한 줄로 배열하는 단체 초상화의 기존 관례를 깨고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해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새로 탄생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번영을 이끌고 있는 상업 중심지 암스테르담의 독립적인 기개와 시민적 긍지를 압축해서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본래 387×502cm의 거대한 크기였으나 1715년 암스테르담 시청 내부로 옮겨지면서 현재의 크기로 축소되었다. 2021년에는 남아있는 복사본을 토대로 AI의 도움을 받아 그림 왼쪽의 누락된 부분을 재현해 보았는데, 그 결과 구성이 훨씬 역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아담 엘스하이머 Adam Elsheimer, 1578-1610
아담 엘스하이머는 독일 중부 프랑크푸르트에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지역 화가인 필립 우펜바흐(Philipp Uffenbach)에게서 미술의 기초를 익혔다.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미술에 매료되어 1598년 베네치아로 가 소품의 동판 세밀화로 유명한 독일화가 한스 로텐함머(Hans Rottenhammer)의 조수로 일했다. 또한 틴토레토와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였고, 이들 회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1600년에는 로마로 이주해 플랑드로 풍경화가 파울 브릴(Paul Bril)을 알게 되고, 그의 소개로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와 그의 제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고전적인 주제와 풍경을 다룬 그림을 주로 그리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과학과 이상을 포괄하는 강한 표현주의적 독창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엘스하이머의 그림들은 대부분 작은 동판에 그려진 것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세부묘사와 표현력을 보여준다. 그는 작은 크기의 작업을 통해 사건의 핵심을 작은 공간 속에 압축해 넣었다. 특히 여러 가지 형태의 빛을 연구했고 태양, 달, 횃불, 벽난로에서 나오는 각기 다른 빛의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였다. 그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세세한 표현에 강박증적으로 집착하는 성격 탓에 작품 수도 많지 않은 편이다. 그의 작품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에 중점을 둔 사실적인 풍경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루벤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등이 그의 작품을 영감의 원천으로 여길 정도로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 가족〉(1609)은 엘스하이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마지막 작품으로, 동판에 유채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유대의 왕 헤롯이 갓 태어난 아기들을 살해하자 이를 피해 요셉이 한밤중에 가족을 이끌고 베들레헴을 빠져나와 이집트로 피신한다는 성서(마태복음 2장 14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룬 이전의 작품들이 밤이 아닌 낮을 배경으로 묘사한 반면, 이 작품은 성서 내용 그대로 밤 풍경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다. 미술사상 최초로 달밤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경화로 평가된다. 엘스하이머는 자연에서 직접 관찰한 세세한 현상들을 화폭에 담았는데, 밝은 달과 은하수가 흐르는 광활한 하늘, 호수 위에 드리워진 밤하늘 등 신비스러운 밤 풍경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피테르 브뤼헐 Pieter Bruegel the Elder, 1525년경-69
피테르 브뤼헐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성이 ‘브뤼헐(Bruegel)’인 것으로 미루어 네덜란드 북쪽 브라반트주 스헤르토헨보스 근방의 브뤼헐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두 아들도 화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 ‘대(大) 피터 브뤼헐’이라 부른다. 그는 피테르 쿠케 반 알스트(Pieter Coecke van Aelst)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였고, 알스트의 공방을 나온 후 화가이자 판화가인 출판업자 히에로니무스 코크(Hieronymus Cock)를 위해 일했다. 1551년 안트베르펜의 화가조합에 등록하고, 다음 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4년가량 머물렀다. 이 시기 그는 플랑드르 전통의 풍경화에 이탈리아적인 요소들을 결합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1555년에 귀국한 후 여행 중 알프스 풍경을 그린 소묘를 12장의 동판화집으로 간행하여 풍경(동판)화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563년 결혼과 함께 브뤼셀로 이주해 활동했으나 당시 네덜란드 미술의 한 주류인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고, 죽기 직전 가족에게 해가 될 것을 우려해 자신의 급진적인 그림 일부를 소각하도록 유언하였다. 브뤼헐은 순수한 풍경화를 그린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이자 ‘농부 브뤼헐’로 불릴 정도로 네덜란드 소작농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부의 화가’였다. 그는 농민과 서민들의 애환을 해학적이고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풍속화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눈 속의 사냥꾼〉(1565)은 사계절을 주제로 제작한 달력화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안트베르펜의 부유한 은행가 니컬러스 용헬링크로부터 일 년 열두 달의 계절의 변화를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린 것이다. 브뤼헐은 열두 달의 정경을 연작으로 제작했는데, 두 달마다 바뀌는 달력 그림 중 첫 번째 그림이 겨울철을 위한 〈눈 속의 사냥꾼〉이다. 원래는 용헬링크의 거실 벽을 따라 여섯 점을 같이 붙여서 걸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한 점이 소실돼 다섯 점만 남아있다. 〈눈 속의 사냥꾼〉은 폭설이 내린 뒤의 마을 풍경을 배경으로 사냥을 끝내고 귀가하는 사냥꾼들과 일하는 장면, 한겨울 놀이 문화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풍경화이지만, 세부에서 발견되는 풍속화적 특성으로 인해 관람자에게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왼쪽에서부터 시작해 오른쪽을 향해 천천히 세부로 내려가다 보면, 대자연 속의 자그마한 마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