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일본학 연구 (책소개)/3.일본근대사

일본의 발명과 근거

동방박사님 2021. 12. 2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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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의 근대와 내셔널리즘을 한국의 근대와 민족주의의 ‘대립항’인 동시에 ‘참조항’으로 보고, 근대문화비판의 연장선상에서 근대(국민)국가 일본의 학문·예술·이념을 논구한 ‘일본’ 비평서. 이 책은 10명의 연구자가 자기 전공분야에 따라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집필한 10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자들은 일본의 근대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거창한 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일본에서 서양의 근대 학문과 사상, 예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본에 수용되고 변용되고 내면화되는지를 추적하기도 하고, 신도(神道)와 내셔널리즘과 문화유산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독특한 시각에서 고찰하기도 한다.

국내외 일본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의 일본학 연구자들이 현재의 연구경향을 반영해서 쓴 새로운 ‘일본근대론’으로, 우리나라 일본학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해준다.

목차

윤상인 - 머리말: 일본의 근대학문과 내셔널리즘 7

허우성 - 기억간의 전쟁: 내셔널리즘의 충돌 17

박규태 - 국가신도와 ‘신사비종교론’: 근대일본 국민국가에서 신사의 역할 55

이이화 - 무상과 무상법: 와쓰지 데쓰로의 국가론을 둘러싼 고찰 83

박진우 - 일본 근대국가 형성기의 ‘공론’ 107

임경택 - 야나기타 구니오의 ‘일국민속학’:단일민족론의 민속학적 형성과 전개 127

김용철 - 오카쿠라 덴신과 일본미술사의 성립 157

민경찬 - 일본 근대국민국가의 형성과 근대음악 175

윤상인 - 국민 속의 『마음』: 국민국가에 있어 정전이란 무엇인가 201

조관자 - 제국의 국민문학과 ‘문화=번역’의 좌절: 스스로 식민지가 되는 제국일본 221

배형일 - 신화 속 고토(故土) 복원을 위한 유적 탐색 247

후주 285
 

저자 소개

편저자 : 윤상인, 박규태 외
[윤상인] 1955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비교문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교수이다. 저서로 『世紀末と漱石』(1994)가 있고, 번역서로 『그 후』(2003)가 있다. [허우성] 195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책 속으로

. 결론: 기억간의 전쟁

필자는 일종의 불교심리학의 시각에서 무자각적인 인간의 하의식―본능·생리·습관·공동기억 등―에는 자기 추동적인 형성력이 있다고 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76) 내셔널리즘은 집단적 형성력의 자연적이며 현실적인 발로이지만, 인류역사에 엄청난 비극과 고통[業繫苦]을 초래한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내셔널리즘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본성 자체라고는 부르지 않으련다. 만일 그것이 인간의 본성 자체라면,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발생했던 온갖 침략·착취·억압·폭력을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에 대해 도덕적인 단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사 해체와 국민의 상대화, 그리고 내셔널리즘의 극복을 주창하는 자들은 숙명을 거부하는 자들이고 어느 정도는 낙관적인 자들이다.

우리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무자각의 내셔널리즘이 침략과 억압을 가져온 역사를 기억하며 그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국가로 회수되기 이전의, 또는 국가를 넘어선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고바야시 류의 ‘국가의식’=주체성은 사이비 주체성이다. 공(公)의 제약을 넘어가는 개(個)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식’=주체성은 초국가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개인을, 국가의 공(公)을 넘어가는 보편을 꿈꾸는 개인을, 그리고 니시다식의 국가·도덕·종교의 삼위일체를 넘어가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개인을 인정할 수 없다면 국민의 상대화와 ‘국사’의 대연쇄 고리의 단절에 대해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국가간의 아진 분별 위에 성립한 근대국가에는 무지와 폭력이 내재해 있다. 여기에 내재한 무지와 폭력의 역사적인 기원을 찾기 위해서라면 인류가 지구상에서 집단으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태고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제 국가의 무지와 폭력의 뿌리는 국민 개개인의 심신에까지 깊이 뿌리 박혀 있다. 내셔널리즘은 국가간이나 민족간의 역사적·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셔널리즘에서 집단과 개인의 속박과 해방을 보는 자에게는 종교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이라는 국민국가가 오늘날 진정으로 성숙해지려면, 과거 쇼와기에 내셔널리즘의 돌출·과도·파행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반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오늘날 상당수의 일본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공동의 기억, 무자각적 자연주의를 내세워 내셔널리즘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보수우익에 맞선 한국인의 내셔널리즘도 그 강고성에 있어서 단 한치도 밀리지 않는다. 아니 우리의 내셔널리즘이 더 단단하고 더 뜨겁고 그래서 더욱 맹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고구려’를 열렬히 찾아 나서고, 실제로 무인도에 가까운 독도를 위해 나라 전체의 존망까지 걸기도 하고, 일방적인 국사교육을 강화한다면, 이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이런 행위가 장기간 지속되면 당연히 일본이나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해서 결국에는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런 긴장·갈등·대립은 전쟁의 위험을 낳을 수 있으므로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외교적인 설득을 앞세워 독도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독도를 두고 전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전쟁을 하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일본을 이길 만한 해군력도 없다. 미국이 은밀하게 일본을 돕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해전은 그만두고 외교전에서나마 승리할 수 있을까? 애국심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것이 해전이나 외교전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외교전의 승리도 외교만이 아니라 군사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승산 없는 전쟁이라면 처음부터 벌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오히려 후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기억간의 전쟁은 다차원적인 것이다. 어느 차원의 전쟁이든 모두 국가간에 벌어지는 정치적·역사적·생물학적인 싸움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일본 내부에서는 과거의 전쟁 책임을 둘러싸고 기억과 증언의 의무를 강조하는 그룹들이, 대동아전쟁을 찬미하고 ‘공=국’을 부르짖는 세력과 격돌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분단의 반세기 동안 서로 다른 기억을 축적해온 남과 북이 싸우고 있다. 남한 내부에서도 과거사를 정리하는 방법에 대해 시비가 일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간의 아진 분별을 완화하기 위해, 국사와 국민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내셔널리스트들과의 싸움에서 공동전선을 펴고 있다. 이 싸움은 정치와 역사, 교육, 스포츠 그리고 문화 전반에서 벌어지는 전면전이다. 우리 개개인의 마음속에는 아진 분별심과 자타불이의 자비심이 싸우고 있다.77) 기억은 강고하고 싸움은 지구전이다. 기억간의 전쟁이라고 해도 우리가 말법(末法)의 시대에 사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인지도 모른다.

다차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억간의 전쟁 앞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첫째, 다수 대중의 국민이 공유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은 대단히 이기적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는 점, 둘째, 국민이 무자각의 내셔널리즘이 초래할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고 두려워하기 전에는, 그리고 무연의 자비를 어느 정도나마 배우기 전에는 국민-중생의 위치를 상대화할 수 없다는 점, 셋째, 일본의 초국가주의 아래에서 그리고 한국의 군사 파쇼 아래에서 개(個)의 확립이 중요했듯이,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매체가 생산하고 전파하는―획일성을 강요하는 파쇼적―국민정서나 국민감정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을 확립하는 것이 아주 긴요하다는 점, 넷째, 국사 해체를 위한 연대는 국민의 본능과 생리에 대해, 그리고 국민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상의 어느 것도 아주 어려운 작업임을 고백해야 한다.

아(我)와 진(塵)을 분별하는 것, 곧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은, 인간 본성에 가까운 욕망의 표현이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비를 가르치는 불교는 국민-중생이 아진 분별의 형성력으로 조작해낸 내셔널리즘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78)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일체의 아진 분별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을 무연지비(無緣之悲)라고 불렀다. 그 사랑은 부처가 중생 모두를 자식으로 삼아 자타의 분별을 떠나 사랑하는 대비심이다.79) 대비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아진 분별력을 연(緣)으로 삼고 있는 국민은 지극히 왜소한 중생이다. 앞에서 뜨거운 애국심을 지닌 국민-중생은 하릴없는 중생이고 부처로부터 한없이 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했다. 말법의 시대에 국민이 집단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2천 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불교와 인연을 맺어온 동아시아 사람들이 자비심을 조금이라도 내어 극히 왜소한 중생의 지경은 되지 말아야만, 지금보다는 좀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라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우리 국민이 애국적인 열정과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아둔한 존재다.

백불(百佛)이 출현해도 우리 속에서 역동적으로 그리고 종종 광포하게 움직이는 집단적인 형성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힘의 결과인 군사력과 경제력이 판치고 있는 이 냉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의 생존마저 재대로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형성하고 지속하려는 욕망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 속에서 저들의 욕망을, 저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보아야 한다. 욕망에 대한 이런 통찰은 우리를 반드시 희생이나 자비로 인도하지는 않더라도 공존으로는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힘 그리고 상대방의 욕망과 힘을 알아서 공존하자는 것이다. 비록 모든 국가들이 전부 국민-중생의 집단이라고 해도 욕망과 분노, 아견을 적절히 통제하고 식혀서 공존하는 편이 공멸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국사’ 해체론자들은 아진 분별에 기초를 둔 애국심의 진상을 폭로하고 힐문하는 과정에서 국적(國賊)이나 매국노로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심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내셔널리즘을 깨닫고 그것을 개인적 차원에서나마 극복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에 대해서는, 한국인 와카(和歌) 시인이었던 고(故) 손호연(1923∼2003)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일본정신의 상징 사이에서 거의 평생 갈등했던 그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었다. “절실한 소원이/나에겐 하나 있지/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 pp. 50~55
 

출판사 리뷰

근대 국민국가와 그 전통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명의 결정체라는 통념을 깨고, 그것이 비교적 최근에 와서(기껏해야 150년 전쯤) 발명되었다(만들어졌다)는 주장과 연구가 나오면서 서양의 근대와 내셔널리즘, 나아가 서양을 모방하여 근대에 진입한 비유럽세계에 대한 이해 또한 심화되고 다양해졌다. 따라서 이른바 근대화에 성공한 최초의 비유럽국가인 일본에 대한 연구경향 역시 달라지고 있다. 단순한 선악이분법적인 제국주의 비판에서 탈피하여 국민의 관점, 민족의 관점이 아닌 일상의 관점에서 일본의 근대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은 국내외 일본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의 일본학 연구자들이 이런 연구경향을 반영해서 쓴 새로운 ‘일본근대론’이라고 할 수 있다.


* 내셔널리즘이란 아진 분별의 집단적 표출

이 책은 10명의 연구자가 자기 전공분야에 따라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집필한 10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필자들은 일본의 근대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거창한 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일본에서 서양의 근대 학문과 사상, 예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본에 수용되고 변용되고 내면화되는지를 추적하기도 하고, 신도(神道)와 내셔널리즘과 문화유산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독특한 시각에서 고찰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주로 일본의 근대를 특징짓는 정신과 이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근대일본의 내면에 대한 고찰인 것이다. 비록 여기서 한일관계나 두 나라의 비교는 주된 관심대상이 아니지만 각 글에 담겨 있는 공통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염두에 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 관계설정은 ‘국사’(國史)의 관점에서 조금 빗겨나 있다. 일본은 대립항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참조항이기도 하다는 것을 사고의 한 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인식의 전환을 선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그 대신 필자들은 치밀한 학문적 정지작업에 집중하여 세부적으로 의미 있는 글들을 내놓았다.

여기서는 하나하나의 글을 다 일별하기보다는, 그 중에서 근대의 최대 화두라고 할 수 있는 내셔널리즘을 정면으로 다룬 「기억간의 전쟁: 내셔널리즘의 충돌」을 통해 인식의 전환을 위한 첫발을 내딛어보자. 허우성(경희대 철학과 교수)의 「기억간의 전쟁: 내셔널리즘의 충돌」은 내셔널리즘의 본질을 원효의 불교사상을 통해 해부한 아주 유니크한 글이다. 내셔널리즘이 서양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필자도 그것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저자는 내셔널리즘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능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원효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진(我塵) 분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남(적)과 나(동지)를 구별하고 나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가 확장되어 민족이나 국가를 형성함에 있어서 그 민족은 대립항을 설정하여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더욱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내셔널리즘이란 아진 분별의 집단적 표출”이라고 정의한다. 사실 이 정의는 대단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내셔널리즘이 역사적 산물이고 국민/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에 대한 해석 내지 설명일 뿐 내셔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상상의 공동체’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머릿속에서는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여야’ 하면서도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가대항전만 열리면 거의 광적으로 내 나라 내 민족을 응원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내셔널리즘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에서 간과되어온 내셔널리즘의 심정적 측면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극우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동시에 한국방송공사가 만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기획의도도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이순신의 불멸성은 곧 한국 내셔널리즘의 불멸성을 의미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연쇄적으로 중국 내셔널리즘도 일본 내셔널리즘도 불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립과 충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당장 간디처럼 적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공존을 모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갖고 있는 아진 분별의 욕망을 솔직히 인정하고, 아진 분별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표출될 때는 공멸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때, 한국과 일본의 미래에 공존의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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