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7.독립운동이야기

도산 안창호

동방박사님 2021. 12. 29.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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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해방 직후 춘원 이광수에 의해 씌어진 도산의 전기~!
“나는 역사상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로 충무공 이순신과 도산
안창호를 꼽는다”- (춘원)

도산은 참으로 뛰어난 민족의 스승이요, 우리 겨레가 자랑할 만한 위인이다. 그는 첫째 성실과 수양과 사랑으로 일관한 국민교육자요. 둘째, 민족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애국적인 정치가요. 셋째는, 우리 민족의 진로를 밝혀준 뛰어난 사상가였다. 이 책의 전편에서는 도산 생애의 발자취를, 후편에서는 그의 인간상과 사상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부록으로 도산의 명연설문을 실었다.

실천할 수 없는 이론은 먹을 수 없는 양식과 같다. 우리는 오백 년 이래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말만 하고 그 일은 하지 아니하였다. 소에게 무엇을 먹여야 가장 좋다는 토론에 세월을 보내다가 소를 굶겨 죽였다. 풀 한 짐을 베어다가 먹이는 것이 백 개의 이론보다 나았을 것이다. 오늘날 독립운동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도산의 철학은 행(行)의 철학이요, 도산의 인식론은 실증적이었다. 이론은 어찌 갔든지 소가 맛있게 먹고 살이 찌는 풀이면 좋은 풀이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필요한 이론은 도산에 의하면 결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배우면 알게 되니 교육이 필요하였다.

목차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7

제1부 투쟁생애 9
1. 소년시대`―`쾌재정의 웅변 11
2. 미주 유학시대`―`교포의 조직과 훈련 19
3. 신민회시대`―`한말 풍운과 민족 운동 28
4. 망명`―`실국 전후의 극적 사안 54
5. 미주 활동시대`―`살아 있는 태극기와 애국가 76
6. 상해시대`―`임시정부에서 대독립당까지 87
7. 피수 순국(被囚殉國)시대`―`민족정신의 수호자 123

제2부 국민훈련 141
1. 자아혁신 143
2. 송태 산장 163
3. 흥사단 184
4. 동지애 240
5. 이상촌 계획 258
6. 상애(相愛)의 세계 272

부록 / 명연설문 295
1. 나라 사랑의 6대 사업 297
2. 방황하지 마라 324
연보 329
 

저자 소개

저자 : 이광수
소설가, 시인, 사상가. 호는 춘원(春園)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03년 동학에 입도,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단체인 일진회의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타이세이중학교에 입학. 1920년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 오산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소설 집필. 1915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며 1917년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여 근대문학의 개척자가 됨. 1919년 중국 ...
 

출판사 리뷰

이 책은 해방 직후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에 의해 씌어진 전기로서, 춘원의 여러 작품 중에서 소설로서는 [흙], 논문으로서는 [민족 개조론], 전기로서는 [도산 안창 호]를 꼽을 정도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처음에 국한문 혼용으로 출간되었고, 6·25전쟁 이후 부산에서 후인(後人)들에 의해 한글판이 처음 간행되었다.
춘원은 어떤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역사상의 인물로 이순신과 도산 안창호를 꼽았던 바, 그런 연유에 있어서도 이 책은 실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도산 안창호》는 도산의 인격과 사상을 후세에 전하여 우리 민족에게 밝은 등불이 되도록 씌어졌다. 책의 구성은 전후 2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제1부는 투쟁생애, 제2부는 국민훈련, 부록으로는 도산의 명연설문(나라 사랑과 6대사업-1920년 상해/방황하지 마라-1919년 교민단 연설)을 실었다. 본 책에서는 원문은 최대한 살리되, 청소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부분이 있음을 밝혀둔다.
춘원의 글은 간결하고 수식이 별로 없다. 그는 오직 도산의 올바른 인간상(人間像)을 독자들에게 나타내려 힘썼다. 전편에서는 도산 생애의 발자취를, 후편에서는 그의 인간상과 사상 세계를 논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를 깊은 감동과 사색으로 인도해주고 또한 반성과 교훈을 준다. 진실을 삶의 지팡이로 하고, 사랑을 생활화하고, 일에는 진실되게 충성하고, 동족에 대해서는 믿음을 다하며, 조국에 성심껏 봉사하고, 동지에 대해서는 신의를 다하고, 언제나 존엄하고 엄격한 생활을 견지한 뛰어난 민족의 지도자, 도산의 참모습을 이 책은 유감 없이 보여준다.
춘원은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글로써 《도산 안창호》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다.
“도산은 우리 나라를 사랑의 나라, 미소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 자신이 사랑과 미소를 공부하고 또 동지들에게 사랑과 미소 공부를 권면하였다. ‘훈훈한 마음, 빙그레 웃는 낯.’ 이것이 도산이 그리는 새 민족의 모습이었다. 100년이 되거나 1000년이 되거나, 이 모습을 완성하자는 것이 도산의 민족 운동의 이상이었다.” (- 편집부)

| 도산 안창호 연보 |

1878년 11월 12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에서 태어남.
1884년 평양 대동강면 국수당으로 이거(移居), 가정에서 한문 수학.
1886년 한문서당에서 수학하는 한편 15세까지 목동생활. 이 무렵 1890년 전후 황해도 구월산을 만유(漫遊)함.
1889년 부친 별세.
1890년 평양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거, 서당에서 황해도 안악 출신의 청년 선각자인 선배 필대은과 교류.
1894년 상경하여 서부대정동 소재 구세학당(일명 원두우학교)에 입학. 이 예수교 계통의 보통학교에서 공부하며 예수교 장로회 입교. 필대은을 신앙으로 인도함.
1896년 구세학당 졸업 후 조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조부의 주선으로 전 훈장 이석보의 장녀 이혜련과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파혼을 주장하나 관철되지 않음.
1897년 동생 신호와 약혼녀 혜련과 함께 상경, 이들을 정신여학교에 입학시킴. 독립협회에 가입. 이것이 후에 만민공동회로 발전함에 따라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동(同) 관서지부를 발기하게 됨. 여름, 평양 감사 조민희 등 수백 군중이 참석 운집한 평양 쾌재정에서 첫 열변. 18조의 쾌재(快哉)와 18조의 불쾌(不快)를 열거하며 민중의 새로운 자각을 호소함.
1898년 11월, 서울 종가(鐘街)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을 탄핵, 6개조의 정치혁신안 건의.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사학의 효시, 최초의 남녀공학) 설립, 하천 매축공사(埋築工事)로 황무지 개간사업에 종사.
1902년 서울 제중원(세브란스)에서 약혼녀 이혜련과 결혼. 다음날 부부 동반으로 인천항을 출발,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도미(渡美). 하와이 근해에서 아호를 도산으로 함. 그해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가정 고용인으로 일하며 미국 소학교에 통학.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근교 리버사이드로 이거. 아내를 학교에 보냄. 9월 23일 재미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 조직, 회장에 피선됨.
1904년 기독교 경영의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수업.
1905년 4월 5일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 창립, 초대회장이 됨. 11월, 공립협회 회관 설립. 11월 20일 순 국문판 《공립신문》 발행, 장남 필립 태어남.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나 퍼시픽 가에 있는 공립협회 회관이 불타 오클랜드에 임시 본부 설치. 이듬해에 돌아옴.
1907년 동경을 경유하여 귀국. 동경 체류 중 한국인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에서 애국웅변으로 청중을 감격케 함. 귀국 후 이갑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 평양에 대성학교 설립. 평양·서울·대구에 태극서관을 두고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 설립, 이토 히로부미와 회견하고 소위 안도산 내각의 조각(組閣)을 일축함.
1908년 교육에 몰두하는 한편 경향 각처를 순행하며 유세, 국민조직화 운동 전개.
1909년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 창설. 육당 최남선이 중앙총무로 도산을 도와 실무 담당.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용산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 만에 석방됨.
1910년 총독부의 내각 조직 제의를 다시 일축하고 해외 망명의 길을 떠남.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독립 운동가들과 합동하고 청도회담을 개최했으나 그 결과는 암담. 한일합방으로 청년학우회 해산.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지방총회 망라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 조직, 초대회장에 선임됨. 한편 민족 운동의 핵심체로서 민족성 부흥 운동을 위한 청년 엘리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흥사단 조직에 착수. 《공립신문》을 《신한민보》로 개칭하여 속간. 차남 필선 태어남.
1913년 청년학우회 후신으로 ‘흥사단’ 창립. 발기인은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의 동지로 구성함.
191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국민회’가 정식 사단법인 인가 받음. 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이거.
1917년 송종익·임준기 등과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 설립. 장녀 수선 태어남. 주로 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를 다니며 흥사단 조직 운동 강화. 차녀 수라 태어남.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 국무총리 대리. 연통제, 독립운동 방략 제창.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발간.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강화, 독립운동 중심 세력의 통합에 주력. 흥사단 원동위원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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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1월 10일 도산 95회 생신과 흥사단 창립 60주년을 맞아 관민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도산공원(서울 강남구 소재)에 망우리 공동묘지의 도산 유해와 미국의 이혜련 여사 유해를 옮겨 안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