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불교의 이해 (책소개)/1.불교입문인물

탄허의 예언과 그 불꽃 같은 생애

동방박사님 2022. 2. 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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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고승, 유불도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의 예언과 그 불꽃 같은 일대기를 함께 조명한 최초의 책이다.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탄허 스님의 휘호, 서간문 등 탄허 스님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수록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도 대단히 큰 책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잿더미밖에 안 남은 남한에서, 한민족 웅비의 기상과 미래 비전을 제시한 탄허 스님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진정 위대한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귀결처는 예언과 같은 술수가 아닌 깨침에 있었다. 즉 불교와 민족을 바로 하는 것이 스님의 참된 목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스님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진정한 고승이라 할만하다.

세상 사람들은 예언에 휩쓸리고 가려서 탄허 스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스님의 치열한 수행과 교육에 헌신한 불꽃 같은 삶을 관통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를 제대로 응시하는 진정한 추념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목차

추천사 퇴우정념 ? 004
서문 일우자현 ? 007

1부 탄허 스님은 과연 예언자인가? 013

1. 탄허 스님의 예언과 시대를 보는 눈 ? 015
2. 인도불교의 여섯 가지 신통과 작동원리 ? 031
3. 중국철학의 우환의식憂患意識과 미래 예측 ? 041
4. 화엄 사상과 선수행을 통한 직관적 영지靈智 ? 051

2부 탄허 스님의 위대한 생애와 시대정신 059

1. 민족의 아픔과 탄허 스님 ? 061
2. 부친 김홍규와 탄허 스님의 이름 ? 071
3. 한학漢學의 수학과 결혼 ? 083
4. 진리의 열정과 영원의 스승 ? 093
5.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 그 이끌림의 미학 ? 103
6. 스승을 찾아 상원사로 ? 111
7. 스승의 그늘 아래서 ? 119
8. 삼본사 수련소를 넘어서 오대산인五臺山人이 되다 ? 131
9. 한국전쟁의 참화와 오대산의 한암 스님 ? 139
10. 잿더미 속으로의 귀환과 재건 ? 153
11. 탄허 스님의 오대산 정화, 오대산 수도원 ? 167
12. 교육만이 불교와 국가의 미래다 ? 179
13. 불경의 한글번역과 스님의 제자들 ? 187
14. 『신화엄경합론』의 출판과 은관문화훈장 추서 ? 195
15. 사회를 향한 열린 질주와 광풍 ? 201
16. 탄허 스님의 본의本義와 위대성 ? 211
17. 영원의 빛이 된 위대한 낙조 ? 221

탄허 스님의 주요 찬문撰文 ? 232
탄허 스님의 주요 글씨 - 탄허 서체 ? 251
탄허 스님의 주요 서간문書簡文 ? 257

부록 탄허 스님의 미래인식과 현대사회의 다양성 279

미주 ? 320
참고문헌 ? 330
탄허 대선사 연보 ? 334
 

저자 소개 

저 : 자현 (一雨 玆玄,일우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율장)와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건축) 그리고 고려대학교 철학과(선불교)와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한국 고대사) 및 동국대학교 국어교육학과(불교 교육)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미술학과의 박사과정(회화)을 수료했다. 동국대학교 강의전담교수와 능인대학원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현재 중앙승...
 
 

책 속으로

탄허 스님 예언의 핵심에는 ‘대한민국이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떨치고 일어나리라’는 한민족 웅비의 기상이 강하게 배여 있다. 스님은 미래에는 한국인이 세계를 주도하며,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또 이에 걸맞은 세계적인 정신 지도자가 한국에서 나온다고도 하셨다. 이는 1970년대의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밋빛 환상 같은 말이었다.
--- p.21

탄허 스님 역시 일제강점기를 넘어 해방의 대한민국, 그리고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 및 군부독재와 민주화라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 속 한가운데를 사셨던 선승이자 화엄가이다. 이런 점에서 스님은 도선 국사나 무학 대사에 비견될 만하다.

특히 도선과 무학이 불교의 가치로 미래 비전을 추동하고 새로운 국가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탄허 스님의 삶과 무척이나 닮아 있는 모양새다. 스님은 새 시대의 열림인 개벽開闢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열린 새로운 세상은 한반도가 중심이 되고, 한국인이 최고가 되는 세계라고 역설하고 있다.

탄허 스님이 대한민국을 긍정적으로 강조하던 60~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떨치고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바로 이때 스님은 가장 아름다운 희망으로, 우리민을 북돋고 한국의 가능성을 크게 높이며 그 당위성을 천명했던 것이다.
--- p.57

탄허 스님의 유년 시기 우리나라는, 전통과 현재가 혼재된 극도의 혼란상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에서도 보수적인 양반이나 경제력이 약한 사람들은 전통 교육을 받고, 중인계층의 신문물에 밝은 사람들은 신교육을 받곤 했다. 서당으로 대표되는 전통교육과 학교로 대변되는 신교육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매우 다른 두 가지 갈래 길이다. 그러나 당시의 과도기에 이러한 양자는, 오늘날의 동등 학력 구조에서와 같이 동일한 측면으로 인정되고는 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학제 간의 이동과 편제에서, 한학을 배운 사람들도 상급학교의 진학이 가능한 것 등을 통해서 단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탄허 스님은 유년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기본적인 한학을 수학했다. 시골의 가난한 형편에서, 지식은 이렇게 전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그렇게 또 다른 지식인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p.84

탄허 스님은 이 시기, ‘사서삼경 등의 한문학을 수백 번이나 읽고 또 읽어, 통째로 외울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는 그의 전통학문적인 터전이 다져진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암기라는 전통교육 방식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터전 위에서 탄허 스님이 끝까지 매진한 것은 『주역』이었다.

탄허는 『주역』을 5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또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집에도 오지 않고 글방에서 춤을 추며 미친 듯이 읽고 있었다.’는 18세 때의 일화는, 탄허 스님에게 있어 『주역』이 차지하는 위상을 잘 나타내 준다.
--- p.89

『노자』와 『장자』의 수학과 자득으로 인하여, 탄허 스님은 더욱더 깊고 은미한 정신 경계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그 너머의 또 다른 갈망과 통하면서 강력한 진리에 대한 갈애를 파생한다. 이 무렵 탄허 스님이 책상을 치면서, ‘문자 밖의 소식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깨우쳐 줄 선생이 없다.’는 탄식을 했다는 일화는 당시의 문제의식을 잘 나타내 준다.
--- p.87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 스님을 알게 된 탄허는, 거스를 수 없는 또 다른 열정으로 인도된다. 이 때문에 20세인 1932년, 탄허는 한암 스님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20세 약관의 전라도 유생과 당시 57세로 조선불교선교양종의 종정(교정)으로 있던 노회한 대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의 나이를 초월한 아름다운 인연은, 1810년 25세의 나이로 연경사절단을 따라간 추사 김정희의 일화를 상기시킨다. 당시 추사는 당대 최고의 학자인 47세의 완원阮元(1764~1849)과 78세의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만나게 된다. 완원과 옹방강 역시 일견 불가능할 것 같은 이방인과의 만남을 수락하고 추사의 기재를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추사는 이후 완원과 40여 년간 제자의 예로써 배우며, 완원을 기리는 완당이라는 호로 사용하기도 한다.
--- p.104~105

탄허 스님이 출가차 오대산 상원사로 온 것과 관련해서, 창조 스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어느 날 나는 참으로 멋진 분을 볼 수 있었어.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높이 쓴 젊은 선비였지. 그분이 바로 탄허 스님이야.” 또 비구니 인홍 스님은 “갓을 쓴 선비 한 분이 올라오는데, 마치 귀공자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탄허 스님은 출가에서부터 뭔가 훤칠하여, 감히 범상키 어려운 푸르른 동방 신사의 창출한 기상이 있었던 것이다.

탄허 스님이 출가하자 동문의 벗인 권중백과 차계남도 이 소식을 듣고 상원사로 출가하게 된다. 탄허는 이미 이들에게 있어, 단순히 친구가 아닌 지남指南(나침판)과 같은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 p.117

공부하는 과정에서 탄허 스님은 때로 한암 스님과 문장의 해석과 관련해서 충돌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충돌은 ‘문법과 같은 한문을 새기는 방법이 우선될 것이냐’와 ‘불교적인 내용이 선행되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이는 당시 탄허 스님의 한문 실력이 매우 정교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유교 글과 불교 글은 내용의 차이에 의해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를 비판할 정도라면 굉장히 날카로운 안목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p.129

탄허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16년 동안 스승인 한암 노사를 모시면서 불교 공부를 하였다. 이로써 유교를 넘어선 3년간의 노장 공부, 그리고 소강절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까지를 통합하는 화엄의 대통일장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즉 화엄학을 통해서 동양학을 아우르는 지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는 탄허 스님이 한암 스님과는 또 다른 일가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암 스님이 선으로서 교학을 보았다면, 탄허는 교 가운데에서 선을 관통시켰던 것이다.
--- p.134

탄허 스님의 수도원 교육은 수업교재의 필연성을 더욱더 절감케 한다. 이로 인해 1958년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번역하여 1960년 3월 이를 출간하기에 이른다. 이후 1963년 9월에는 『보조법어普照法語』가 발간된다. 이후로 71세로 돌아가시게 되는 1983년까지, 스님은 불교와 동양학의 전적 총 14종 73권을 번역·출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탄허 스님의 번역 작업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입적 후 채 2달이 지나지 않은 7월 30일에 미발간 원고인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2권이 간행된다. 이후로도 2001년에는 번역 유고인 『영가집永嘉集』 1권과 『발심發心·삼론三論』 1권이 발행되며, 마지막으로 2004년 4월 10일에는 『장자남화경莊子南華經』 1권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총 18종 78권을 번역하신 것이다. 이는 중국불교의 3대 역경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kum?raj?va, 344~413)·진제眞諦(Param?rtha, 499~569)·현장玄?(602~664)을 잇는 한국불교사의 기념비적인 성과라고 이를 만하다.
--- p.177
 

출판사 리뷰

탄허의 예언과 그 불꽃 같은 생애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고승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의 예언과 그 불꽃 같은 일대기를 함께 조명한 최초의 책이다.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탄허 스님의 휘호, 서간문 등 탄허 스님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수록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도 대단히 큰 책이다.

탄허 스님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 총 4차례나 종정(혹 교정)을 역임하신 희대의 선승 한암 선사의 수제자이다. 또 탄허 스님은 화엄 사상과 『주역』 및 『장자』에도 능통했던, 살아 있는 동양학 자체였던 분이다. 이렇다 보니, 암울한 시대를 살던 우리 민족에게 종종 등불과 같은 비전의 말씀을 하시곤 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잿더미밖에 안 남은 남한에서, 한민족 웅비의 기상과 미래 비전을 제시한 탄허 스님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진정 위대한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귀결처는 예언과 같은 술수가 아닌 깨침에 있었다. 즉 불교와 민족을 바로 하는 것이 스님의 참된 목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스님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진정한 고승이라 할만하다.

세상 사람들은 예언에 휩쓸리고 가려서 탄허 스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스님의 치열한 수행과 교육에 헌신한 불꽃 같은 삶을 관통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를 제대로 응시하는 진정한 추념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1. 탄허의 생애와 삶의 모습
─예언자로 인식된 탄허 스님─


탄허 스님은 불승으로서는 유일하게 유불도 삼교의 사상을 종합시키고[一以貫之] 회통시킨 고승이다.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불교를 가장 우위에 두고, 유가, 도가의 사상을 회통시켰다. 조선 시대 이후 근현대까지 많은 유학자와 고승이 출현했지만, 유불도 삼교를 종합하고 회통시킨 이는 오직 탄허 스님뿐이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유학자로서 불교에 해박한 이가 없었고, 불승으로서 유가와 도가의 철학에 대하여 해박한 이도 탄허 스님 한 분뿐이었기 때문이다.

또 탄허 스님은 선승 특유의 직관력과 주역(周易), 정역(正易) 등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미래 등에 대하여 예언·예측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향후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었다.

탄허 스님이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예언·예측을 한 것은 1977년이다. 조선일보 1월 18-20일자 선우휘 주필과의 3회에 걸친 대담에서 탄허 스님은 이상과 같은 예언을 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예언·예측을 하셨다.

1975년 12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우리나라 인구 1인당 국민소득은 531달러였고, 76년은 600달러 정도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60-170여개국 가운데 60위 수준이었다. 당시 탄허 스님의 이러한 예언·예측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해프닝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88년 올림픽을 계기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했고 IMF를 겪기는 했지만 지금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되었다. 또 K-POP 등 한국문화는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의 문화를 주도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는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 한국이 초대되었다. 이런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과거와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사회 곳곳에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탄허 스님의 예언은 적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2. 탄허 스님의 생애
─유생(儒生)에서 불승(佛僧)으로─


탄허 스님은 기호학파인 이극종(李克宗) 선생으로부터 유가의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주역(周易)』 · 『예기(禮記)』 · 『춘추좌전(春秋左傳)』 등 5경을 비롯한 유가의 여러 경서를 수학했다.

그는 20세를 전후하여 노장(老莊)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특히 ‘도(道)’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 마침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주석하고 있던 한암 선사(1876~1951)의 명성을 듣고, 입산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30여 통의 서신을 보내어 도(道)와 불교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1934년 22세 때 탄허 스님은 한암 선사가 주석하고 있는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다.

1956년(43세) 4월, 탄허는 월정사 조실로 추대되었고, 승속을 아우르는 지도자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오대산 월정사에 ‘대한불교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하였다.

1975년 8월에는 그의 대표적 역서(譯書)인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47권)을 현토 · 번역하여 간행하였고, 이어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우리나라 전통 강원의 텍스트인 사교(四敎) · 사집(四集) · 사미과 교재를 모두 현토 ·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그가 번역 출간시킨 책은 모두 18종에 77권이나 된다.

1983년 6월 5일(음력 4월 25일), 탄허는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입적하였다.

3. 탄허의 교육이념과 철학
─청출어람(靑出於藍), 교육은 인간 형성의 길이다─


탄허 스님은 20세기 한국불교 지성사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그는 ‘화엄학의 3대서’라 불리는 『화엄경』 · 『화엄론』 · 『화엄경소초』를 현토 · 역해하였고, 한국불교 전통강원 교학의 교재를 완역·집성했으며, 승속을 초월한 훌륭한 인재양성에 매진하였고, 유불도(儒佛道, 유교·불교·도교) 삼교의 철학을 일이관지(一以貫之)시켰던 이다. 또 불승(佛僧)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미래사회에 대한 통찰력도 갖고 있었던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을 추구했다. 줄여서 ‘불세사업(不世事業)’이라고도 하는데, 자신의 목적은 인재양성, 인재교육으로서, 한 세대에 걸친 사업이 아니고, ‘세(世)’나 ‘대(代)’로는 계산, 혹은 산출할 수가 없는 ‘영세(永世) 사업’이라는 뜻이다. 인류에게 끼친 공로가 매우 커서 ‘한 시대를 통해서도 보기 드문 일’,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사업(永代의 事業)’을 뜻한다.

송대의 학자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은 공자가 만년에 주유천하(周遊天下)를 그만두고 고국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를 육성하는 일에 전념했던 것을 가리켜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이라고 정의했는데, 탄허 스님이 추구한 불세사업도 그런 뜻이다.

4. 도의적 · 도덕적인 인재 교육
─불세사업(不世事業, 영원한 일)의 종을 울리다─


탄허 스님은 44세(만 43세) 때인 1956년 4월 1일, 오대산 월정사에 ‘대한불교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한다. 당시 월정사는 6·25 전란으로 8각 9층 석탑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전소되고, 겨우 두 채를 신축하여 대중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또 당시 월정사 역시 정화(대처측과 비구측의 분쟁)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고, 경제 사정도 좋지 못해서 아침에는 죽을 먹을 정도였다. 최악의 환경과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탄허 스님은 30명을 모아 수도원을 개설했다. 그가 최악의 상황에서 오대산 월정사에 수도원을 개설한 것은 교육과 인재양성이라는 대명제 때문이었다. 이 대명제와 사명감이 그에게 ‘발분망식(發憤忘食)’의 동력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오대산 수도원은 ‘강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승속을 가리지 않고 한국사회에 불교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급 인재를 양성해 보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특히 탄허 스님은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과 고전(古典, 화엄경, 노장, 주역 등)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 가치관과 도덕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그의 인재양성의 이상은 향후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인격적인 인재였다. 그 인재양성은 내성외왕지도(內聖外王之道, 도덕과 지도력을 겸비한 훌륭한 인격자)의 인물이었다.

5. 『화엄경』 현토 · 번역 · 간행
─인생을 건 불후의 업적에 도전하다─


탄허의 업적 가운데서도 특필해야 할 불후의 업적은 1975년에 간행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이다(『화엄경』으로 약칭). 이 책을 간행하기 위해 그가 손으로 쓴 원고지(200자)만 해도 약 62,500매에 달한다. 탄허는 이 방대한 원고를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하던 1956년 말부터 시작하여 1966년 말에 탈고했다. 현토 · 역해(번역)하는 데만 꼬박 9년 반 가량이 걸린 생애를 건 작업이었다. 하루 14시간씩 집필에 매달렸다는 그의 회고를 상기해 본다면, 그는 10년 가까이 거의 온종일 『화엄경』 현토 · 역해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탄허는 『화엄경』 탈고 후 오른팔에 마비증세가 와서 심하게 고생했다. 그리고 『화엄경』이 간행된 지 8년 만에 입적하였다.

『신화엄경합론(화엄경)』은 그의 나이 63세 때인 1975년 8월에 완간되었는데, 번역에서 간행까지 약 17~18년이 걸렸다. 『화엄경』의 전체 권수는 47권(초판 한장본 기준)이고, 총 페이지는 약 12,400여 쪽에 달한다.

『신화엄경합론』은 『화엄경』과 관련된 중요한 문헌들을 총망라한 것으로, 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유는 무엇보다도 80권본 『화엄경』만 해도 방대한데, 그 해설서인 이통현의 『화엄론』 40권까지 현토 · 완역했기 때문이다. 또 『화엄경』의 주석서로 유명한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청량소초)』를 번역하여 사이사이에 수록함으로써(양적으로 70% 번역 수록), 이른바 ‘화엄철학의 3대서’라고 하는 『화엄경』과 『화엄론』, 『화엄경소초』를 혼자서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의 해제에 해당하는 『화엄현담』 8권을 현토하여 첨부하였고, 화엄경의 서론에 해당하는 송대 계환의 『화엄요해』와 고려 보조국사 지눌이 『화엄론』 40권의 요지를 강술한 『원돈성불론』도 모두 번역하여 수록했다. 이렇게 방대한 양(量)을 한 사람이 현토 · 번역하여 간행까지 했다는 것은 한국불교사에서 보기 드문 일일 뿐만 아니라, 전 불교사를 통틀어도 흔치 않은 일이다.

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 간행은 탄허의 대표적 업적이며, ‘탄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준 책이다. 특히 『신화엄경합론』 간행으로 인하여 ‘화엄철학’, ‘화엄경’, ‘화엄교학’에 대한 연구가 보다 진일보할 수 있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화엄경』이나 ‘화엄철학’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전국 강원을 비롯해 학자들과 재가불자들도 보다 용이하게 화엄경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원전 중심의 강원 교학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화엄교학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일인 것이다.

탄허 스님은 이 책 간행으로 1975년 10월 동아일보사 주최 인촌문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승려로서 학술상 수상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1983년 6월 5일(음력 4월 25일) 71세의 일기로 탄허 스님이 입적하자, 정부에서는 교육과 『신화엄경합론』을 현토 · 역해·간행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6월 22일).

6. 탄허 스님의 존재 가치
─육신은 죽어도 정신은 죽지 않아야 한다─


탄허는 1956년 『신화엄경합론』 현토·번역을 시작으로, 1983년 6월(음력 4월 25일)에 입적하기까지 약 27년 동안 전통 강원의 교과서이자 한국불교에서 중시하는 소의경전들을 현토 · 번역하고, 간행까지 하였다. 이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혼신의 힘을 다한 길고도 고된 작업이었다.

탄허가 현토·번역한 불교경전은 『신화엄경합론』 · 『능엄경』 · 『대승기신론』 · 『금강경』 · 『원각경』 · 『서장』 · 『도서』 · 『선요』 · 『절요』 · 『치문』 · 『초발심자경문』 · 『육조단경』 · 『보조법어』 · 『영가집』 · 『발심삼론』으로 총 15종이다. 이 가운데 전통 강원의 교재는 『신화엄경합론』, 『능엄경』 등 11종이고, 선어록은 『육조단경』 · 『보조법어』 · 『영가집』 3종이고, 기타가 1종이다. 그 밖에 불교경전은 아니지만 『주역선해(周易禪解)』(3권)와 『도덕경』(3권) · 『장자남화경』(1권)까지 합하면, 탄허 스님이 현토·번역한 책은 총 18종 78권이나 된다.

이 책들은 출간 직후부터 불교계 및 전통 강원에서 매우 중시했다. 이것은 당시까지 강원에서 활용할 만한 권위 있는 번역본들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탄허의 현토 · 역해본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 즉 정확한 현토와 한문 문법에 의한 번역, 즉 축자역 덕분이다. 이는 지금까지 불교 전문 학자들과 강원 학인들이 탄허 현토 · 역해본들을 많이 보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탄허 스님이 중요한 경론들을 현토 · 번역하여 간행한 목적과 배경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용이었다. 그는 승속을 아울러 불교와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인 인재, 도의적 · 도덕적인 인재 양성에 목표를 두고, 자신의 교육이념에 맞는 텍스트를 개발하는 데 전심전력했다.

탄허는 공자가 만년에 고국 노나라로 돌아와 교육과 제자 양성에 전심했던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을 매우 흠모했는데, 그가 걸었던 발자취는 공자의 불세사업, 불타의 중생구제사업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추천평

탄허 스님의 웅건한 노력과 실천행은 남송의 주자를 넘어섰고, 활달한 정신 경계는 당나라의 이통현 장자에 필적한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이 책을 꼭 한 번 일독하셔서, 영혼의 금강석과 같은 스승과 조우해 보시길 부처님께 기원 드려 봅니다.
- 퇴우정념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주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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