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2.한국사일반

무오사화

동방박사님 2022. 2. 5.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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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 시대 당쟁이 갖는 의미와 연산군의 행적 변천사
무오사화 인명사전 속 그들의 활약과 상세한 일화 수록


성종때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정계에 새롭게 진출한 사림파는 3사의 언론직 및 사관직을 독점하면서 훈구파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한편 훈구파는 사림파의 이러한 행동에 불만을 갖고,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된다. 그 직접적인 발단은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싫은 것을 빌미로 이극돈, 유자광등이 연산군을 충동질한다. 이는 수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간 「무오사화」의 시작이다.

조선 시대 최초의 사화를 다룬 『무오사화』에서는 이와 같은 당쟁 속 조정의 분위기와 사회 변화를 다루고, 당시 정계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생애와 일화를 집중 조명한다. 양반 계급 사이에서 여러 바벌이 생기고 차츰 반목하게 되자 정치 기장은 약해지고 사족들은 정치를 자기의 당파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연산군이라는 극단적인 성격의 왕의 시대에서 셀 수 없는 희생자를 만들게 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조선 4대 사화는 정치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극명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가 주는 교훈은 우리의 현실에도 큰 영향을 준다. 조선의 4대 사화는 조선 시대의 특별한 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목차

"작가의 말

조선 시대 4대 사화
성종 대까지 걸쳐 완성된 조선왕조의 기틀
세조의 왕위 찬탈 뒤 생긴 네 파벌
훈구파와 사림파의 극단적 대립
거듭되는 사화 속 조선 사회의 변동

조선의 정치 집단
정치를 바로잡았던 조선의 간관 제도
품계가 낮아도 특별한 대접을 받은 대간들
세종도 대간들의 언론을 억압하다
붕당을 예고하는 이준경
동서 분당의 기폭제 심의겸과 김효원
분열에 대해 율곡 이이가 제시한 조정안
직언으로 생사가 오간 사람들
당명을 좇는 신하들
왕권까지 당쟁의 대상으로 삼게 된 조선 후기

무오사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충돌
서얼 유자광의 현실에 대한 불만
훈구파 유자광과 사림파 김종직의 갈등
조의제문

무오사화가 일어나기까지 연산군의 행적
타락한 군주 연산군과 그의 총희 장녹수
사욕에서 발단한 모략
문초의 시작
진실은 의미 없는 일
간언은 연산군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궁중을 뒤흔드는 절규 소리
연산군을 충동질하는 임사홍과 외할머니 신씨
속속 잡혀오는 사림파 선비들
중전의 노력은 힘이 없고
더해가는 연산군의 탈선
형의 집행과 힘을 얻는 유자광 일파
연산군과 장녹수의 태평스러운 사냥 길 거둥
봉원사에서 마시는 곡주
연산군에게 욕을 당하는 여승들
인간 본성의 끝을 보여준 연산군

연산군의 행적을 남긴 [연산군일기]를 따라가 보니
1498년(연산 4) 무오년 5월 23일 무오일의 행적
1498년(연산 4) 무오년 5월 25일 경신일의 어전회의
1498년(연산 4) 무오년 6월 3일 무진일
1498년(연산 4) 무오년 6월 5일 경오일
1498년(연산 4) 무오년 6월 15일 경진일의 어전회의
1498년(연산 4) 무오년 6월 16일 신사일의 기록
1498년(연산 4) 무오년 6월 18일 계미일 어전회의

무오사화의 인물
간신들에 의해 미움을 받은 김종직
김종직이 만년을 보낸 배천리
거학巨學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
주자학으로 큰 영향을 끼친 고려의 충신 길재
길재와 돌가재 노래
성현聖賢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했으니
조선을 지킨 길재의 후진들
길재의 인맥은 살아 있었다
화석정 자리의 주인 야은 길재
길재가 세상에 미친 고아한 영향
길재의 왼쪽 귀 이야기
간흉들의 흉계에 희생된 서른다섯의 재인 김일손
김일손이 지은 청풍淸風의 치헌고痴軒考
조선왕조 문제의 인물 유자광
비첩의 몸에서 태어난 유자광
하루 3천 자에 나무 3백 짐이 그의 일과
어머니의 죽음과 유자광의 지략
조정으로 진출하는 유자광
악행의 시작
유자광의 말로
유자광은 어떤 사람이었나
무오사화의 주도적 인물 이극돈
화려한 옥 속의 티 이극돈과 이이첨
광주 이씨 인맥
1세조 둔촌 이집의 증손자 이극돈 가계도
항상 정의의 편에 선 정광필
정난종의 인성과 지혜를 물려받은 정광필
유배지에서 노역을 청한 수상
용포에 눈물을 뿌리며 신진 사류를 구하다
열두 서각대의 꿈
증손 정유길을 위해 중종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정광필
정난종과 아들 정광필 묘역
태종의 외증손 남이, 질시하는 자들도 많았다
귀신의 해코지를 받았다는 남이의 혼인
남이의 거짓 자백
강순과 남이는 무슨 인연인가
억울하게 죽은 남이의 진짜 묘, 가짜 묘 논란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은 강순
남공철의 주청으로 누명이 풀린 남이와 강순
세력가의 시종이라는 흑점을 짊어진 권람
국을 식게 만든 사람
중종반정의 주역 성희안의 세 가지 모습
창녕 성씨 인맥
연산군에게 운명을 맡긴 한치형
청주淸州 한씨 한치형의 가계
세상 물정을 잘 파악했던 재상 한치형
존경을 한몸에 받은 노사신, 사화로 오점을 남기다
학문에 조예가 깊은 노사신
상국上國의 사신이 예를 표한 것은 노사신의 조부 노한도 매한가지
교하 노씨 혈맥
옛 제도를 따라 화를 입은 노공필
역사에 부끄러운 반대자로 이름을 남긴 윤필상
후세인들이 적은 영의정 윤필상의 행적
이세좌와 운명이 갈린 허종과 허침
문무를 겸비한 허종
4대 사화를 모두 피한 원만한 품성의 허침
조용히 왔다 말없이 떠난 큰 그릇 정희량
타고난 천진함으로 온전히 산 사람
조선의 신선이 된 정희량
연산군의 추억이 서린 강희맹의 집에 금띠를 둘러 주다
연산의 총신 강희맹의 아들 강구손
기대승의 식무구포食無求飽 철학
행주 기씨 인맥
자손들에게 붕어는 먹지 말라고 한 사연
사공 출신의 후손 이계맹
정승의 마음을 돌려놓은 소년 윤효손
윤효손의 출세 가도
윤효손의 장인 영의정 박원형의 계명시
문학으로 이름을 알린 권오기ㆍ권오복 형제
예천 권씨로 본성을 바꾼 이유
예천 권씨 세계표
냄새나는 심성에 장삼을 걸친 학조 스님
무오사화의 희생자 권경우ㆍ권경유 형제
간신들의 탄핵을 받은 권경우
중세의 밀수꾼들을 처벌한 권경우
능지처사를 당한 권경유
왕王씨에게 양자로 간 권權씨 혈계
연산군이 제일 두려워했던 인물 성준
남효온이 암말을 타고 다닌 이유
남효온의 아내와 며느리
남효온이 좋아했던 소장학자 조신
환관 김처선의 처절한 이야기
연산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최부
그물을 벗어난 학자 강경서
무오사화의 희생자 박한주
연산군의 10가지 폐단을 지적한 홍귀달
결국 지는 해처럼 몰락한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과 그 아들들
왕위를 빼앗긴 제안 대군
명현들의 무고함을 변호한 성중엄
무오사화의 원혼이 된 홍한
거학巨學 김종직의 억울함을 항론한 유정수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며 벼슬을 얻은 민효증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고자질한 제2의 유자광 박경
문종의 외손자 정미수
폭군에게 금표석을 바친 간신 김감
귀양에서 풀려난 정승조
세조의 수족 신숙주의 아들 신준, 연산군에게 시무 10조를 진언하다
임사홍의 간사함을 폭로한 안침
남이의 옥사를 책임진 조익정
주경야독한 소년 유순의 일생
귀양 가는 이를 송별한 벽서로 화를 당한 이종준
무난한 관료 생활을 한 안호
억울한 신하 이극균의 종손자 이수공
매부의 재산을 탈취한 이창신
충신 박팽년의 혈통을 이어 받은 외손자 이원
광인 연산군에게 목을 내놓은 이주
가세가 늘 청빈하였던 이의무
강직함으로 죽음을 맞이한 충신 강겸
김종직의 사위라는 이유로 능지처참을 당한 강백진
무인으로서 군자를 꿈꾼 박영
박영이 자락 잘린 두루마기를 가보로 물린 뜻
문무에 능했던 큰 그릇 유순정
죽음의 문턱까지 간 김종직의 제자
연산군의 비호를 받기도 한 유순정
중종반정과 삼포왜란의 명장 유순정
신용개가 유순정에게 바친 만사 세편
제자 유순정의 시와 스승 김종직의 화답 시"
 

저자 소개

저자 : 한국인물사연구원
한국인물사연구원은 원장 이은식 박사를 중심으로 한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과 사건을 통해 진실된 역사를 반추하고, 잊혀지고 왜곡된 과거를 밝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문을 열었다. 현재 『이야기 고려왕조실록』상하권과 『읽기 쉬운 고려왕 이야기』, 『신라 천년사』를 출간하였으며 앞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알려 주는 지침서가 될 다양한 역사서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원장 이은식 박사는 현재 한국인물...
 

책 속으로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조世祖(수양首陽 대군)가 왕위를 찬탈하고 나서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양반계급 사이에 여러 파벌이 생겨 반목하고 대립함으로써 차츰 정치 기강이 약해지고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 조정을 극심한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현상은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조에서는 쉬는 듯하다가 문란한 통치를 하던 연산군燕山君 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처세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 어진 충신들을 많이 죽여 많은 백성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반면 그 치적은 매우 훌륭한 것이 많았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한층 더 굳건히 한 왕이었다고 본다. ---「성종 대까지 걸쳐 완성된 조선왕조의 기틀」 중에서

그러나 태종의 이런 생각과 달리 조선의 대간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관리들의 규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왕에 대한 간쟁에 있다고 믿었기에 간쟁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세종은 흔히 백성들의 여론을 잘 수렴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역시 대간들의 언론을 억압하는 데서는 태조나 태종 못지않은 임금이었다. 대간들에 대한 세종의 억압이 얼마나 심했던지 『세종실록』 15년 조인 1433년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의금부 옥졸들의 말이 있다. “대간들이 오늘은 헌사(사헌부)에 앉아 있으나 내일이면 반드시 하옥되어 나의 제어를 받을 것이다.” 해동海東의 성군聖君으로 불리는 세종마저 이럴 정도였으니 국왕이 직언에 귀를 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케 한다. ---「세종도 간관들의 언론을 억압하다」 중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당쟁이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개입하는 등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게 된다. 거유巨儒 송시열이 83세의 나이로 사형당하게 된 배경도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한 때문이었다. 숙종肅宗은 재위 15년 만에 희빈 장張씨에게서 고대하던 왕자가 탄생하자 이 갓난아이를 원자元子 책봉하고 종묘宗廟에 고묘告廟까지 마쳤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려 끝내 사약을 마시게 된 것이다. 송시열이 죽음을 무릅쓰고 원자의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이유는 희빈 장씨가 자신과 반대 당파인 남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남인 집안 여인의 몸에서 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극력 반대한 것이다. 당론이 격화되면서 신하들이 넘봐서는 안 되는 왕권까지 당쟁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가 노론 4대신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경종 독살설 끝에 영조가 집권한 뒤 이번에는 김일경이 사형당하고 말았는데, 이 역시 원칙을 잃은 당쟁의 비극이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언관들도 공론이 아니라 당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조선의 사대부 그 누구도 더 이상 언관들이 공정하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왕권까지 당쟁의 대상으로 삼게 된 조선 후기」 중에서

유자광이 일을 꾸며 왕에게 무고한 지 한 달도 못되는 7월 26일이었다. 연산 군주는 유자광의 상소에 의하여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은 것이다. 이미 그렇게 결론지을 것을 정해 놓은 결과라 해야 옳을 것이다. 억센 장정들이 괭이를 들어 김종직의 무덤을 순식간에 파헤쳤다. 그 안에서 새까만 옻칠을 한 관 하나가 나오자 형리들은 즉시 김종직의 관에 톱을 대고 쓱쓱 썰기 시작했다. 잠시 뒤 형리들은 관 안에서 김종직의 시신을 꺼내 뼈를 추려 맷돌에 갈아 강물에 띄웠다. 죽은 김종직은 이같이 해서 참혹한 부관참시의 형을 당했다. 다음은 이어서 탁영자,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 권경유의 사지가 토막이 났다. 살을 찢고 뼈를 토막 내는 능지처참의 형을 받은 것이다.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의 사지는 토막이 나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인경각 앞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이목, 허반, 강겸은 목을 베는 참형에 처해졌으며 표연말, 홍한, 정여창 등 나머지 1백여 명은 곤장 1백 대 혹은 80대를 맞고 3천 리 밖이나 1천 리 밖으로 각각 유배형이 가해졌다.
---「형의 집행과 힘을 얻는 유자광 일파」 중에서
 

출판사 리뷰

사족의 이익 추구로 변절한 당쟁과 패륜 연산군이 결합한 결과

사림파를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감정은 폭발하여 1498년(연산 4)의 무오사화가 발생하였다. 그 직접적인 발단은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사림의 반대파인 훈구파에게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조의제문〉은 초나라 의제義帝(회왕懷王)를 죽인 항우項羽에 비유해 단종을 죽인 세조(수양 대군)를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본 이극돈, 유자광 등 훈구파는 〈조의제문〉을 빌미로 평소 선비들을 싫어하던 연산군을 충동질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는 사화로 발전하게 된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양반계급 사이에는 여러 파벌이 생기고 차츰 반목하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 기강이 약해지면서 사족들은 정치를 자기 당파의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게 되었고 그러한 분위기는 연산군이라는 극단적 성격 파탄을 가진 왕을 만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버린다. 그 뒤에는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며 성숙하지 못한 왕을 조종하고 자신의 사욕을 채운 임사홍이라는 간신이 있었다.

품계가 낮아도 자신의 명예를 걸고 간쟁을 하던 간관들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었고 조정에서 바른말하는 선비는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당쟁이라는 것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대의를 위하는 길을 합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사족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전락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
조선 시대 최초의 사화를 다룬 『무오사화』에서는 이와 같은 당쟁 속 조정의 분위기와 사회의 변화를 다루고, 당시 정계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생애와 일화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조선 전반의 삶까지도 아우르도록 하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조선 4대 사화는 현실 정치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극명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인간이 공의公義를 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현실을 사는 우리들은 잘 알 것이다.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믿는 각각의 진실들은 대의를 향한 합의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현실에서 갖는 것이 많게 될수록 또 현실에서 원하는 것이 분명해질수록 인간들은 사심을 버린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인간 사회 속에서 폭발한 조선의 4대 사화는 각자의 권력을 확장하고 분명히 하기 위한 싸움의 결과라 보여진다. 그렇지만 또한 권력 싸움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변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정치 현상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4대 사화는 조선 시대의 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그것이 역사이다. 그렇지만 또한 역사의 원인과 결과를 잘 알면서도 그것을 반추하기보다 유사한 실수를 저지르기가 더 쉬운 것이 우리들 인간의 모습이다.

“올해 2010년은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맺으며 국권피탈을 당했던 때로부터 100주년이 지난 해이다. 이와 함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지는 동족상잔의 혈전을 벌였던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어언 회갑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 4대 사화의 첫 번째 사화가 발생한 지 512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비통한 역사의 깊은 골의 흔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작가의 말은 귀담아 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