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 357

서오릉 (고양시)

고양 서오릉 (高揚 西五陵) 사적 제198호 서오릉은 '서쪽에 있는 다섯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구리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실의 왕릉 군이다. 조선 7대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 (추존 덕종)의 묘를 이곳에 처음으로 조성하였고, 이후 여러 왕과 왕후의 능이 조성되어 5기에 이르렀다. 서오릉 안에는 왕릉 5기 외에 2기의 원과 1기의 묘가 있다. 창릉 昌陵 :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 왕후 한 씨 가 동원 이강 릉 경릉 敬陵 :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인수대비) 한 씨의 동원 이강 릉 익릉 翼陵 :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 씨의 능 명릉 明陵 :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 시 쌍릉**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 씨 (단릉)의 동원 이강 릉 홍릉 弘陵 ..

남양주 사릉

남양주 사릉 南楊州 思陵 사적 제209호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 씨 (1440~1521)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1457년 (세조 3년) 단종이 폐위되자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정업원** (현 서울 종로구 숭인동 소재)에서 생활하였다. 1698년 (숙종 24년)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대면서 정순왕후로 복위되었고,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 하여 능의 이름이 사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를 주변에는 해주정씨 묘역이 있다.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해주 정 씨 집안에서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고, 제사도 지내 주었다. 이후 숙종대에 정순왕후가 복위되어 군부인의 무덤에서 사릉으로 높여지면서 사릉 능역 안에 있돈 해주 정 씨 집안의 묘를 능역 밖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 (사적 제194호)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 太宗 (1362~1422, 1400~1418 재위)과 원경왕후 민 씨 元敬王后 閔氏 (1365~1420)의 능이고, 인릉은 조선23대 순조 純祖 (17901834, 1800~1834 재위)와 순원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헌릉에 모셨고, 2년 뒤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이 조성되었다. 이후 1856년 (철종 7년) 경기도 파주에 있던 순조의 인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이듬해 순원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릉** 의 형태로 능이 조성되었다. *쌍릉 : 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형태. **합장릉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 안에 조성한 형태. 헌릉 獻陵(태종과 원경황후) 헌릉은 조선 3대 태종..

인릉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 (사적 제194호)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 太宗 (1362~1422, 1400~1418 재위)과 원경왕후 민 씨 元敬王后 閔氏 (1365~1420)의 능이고, 인릉은 조선23대 순조 純祖 (17901834, 1800~1834 재위)와 순원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헌릉에 모셨고, 2년 뒤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이 조성되었다. 이후 1856년 (철종 7년) 경기도 파주에 있던 순조의 인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이듬해 순원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릉** 의 형태로 능이 조성되었다. *쌍릉 : 한 언덕에 왕과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형태. **합장릉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 안에 조성한 형태. 인릉 仁陵 (순조와 순원황후) 인릉은 조선 23대 ..

청 황실의 아침 심양 고궁

청 황실의 아침, 선양 고궁 국립 고궁박물관의 중국 선양 고궁박물원과 함께 청나라 초기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특별전 " 청 황실의 아침 선양瀋陽 고궁故宮을 개최합니다. 심양고궁은 청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가 사용했던 황궁입니다. 1625년, 누르하치가 선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궁궐의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1636년경에는 황궁으로서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고, 선양은 성경으로 격상되었습니다. 1644년 청나라가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뒤, 선양 고궁은 강희, 건륭, 가경, 도강 등의 후대 화에 들이 선양에 있는 조상의 능에 제사를 지내러 왔을대 머물렀던 행궁이 되었습니다. 심양 고궁은 청 황실의 근원지로서, 청나라 창건의 기틀을 다졌던 창시자들의 굳건한 다짐을 담고 있습..

조선왕궁 수문장 교대식

수문장 교대의식의 역사 조선시대 수문장제도는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국가방위와 같은 개념이었다. 수문장제도는 조선의 8대 임금 예종이 즉위하던 해 (1469년)에 처음으로 수문장이 배정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9대 임금 성종 시절에 제도화를 거친 후 경국대전에 수문장제도 운영규정이 수록되면서 제 모습을 갖추었다.

양주 관아지

양주관아지 (揚州 官衙地) 경기도 기념물 제167호 양주관아지는 1506 (중종 1년) 현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신둔면 (의정부시 의정부1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 동안 양주목 (揚州牧)을 다스리던 관청이 있었던 곳으로 2000년부터 2017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자. 발굴 조사 결과 건물지 및 담장지, 배수시설, 출입시설 등의 유구 와 평기와 막새기와, 명문 기와 등의 기와류 및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자기류, 상평통보 등 금속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양주 관아의 규모는 어떠하였는지는 [여지도서, 1780][경 기지 1842][경기 읍지 1871]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중 양주목의 규모를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경기 읍지] 오 약 31개의 관아 시설에 그 ..

양주 향교

양주향교 揚州鄕校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 교육기관으로 중. 고등학교 수주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양민 (良民)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수 있었도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 사장학돠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기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또한 향교는 교육뿐 아니라 선선선현 先聖先賢 에게 제사하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양주향교는 조선태종 원년 1401년에 건립된 후 많은 유학자를 양성 배출하던 지방의 교육기관 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소 되었고, 1610년에 재건 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 되었다. 전쟁 후 유럽들이 뜻을 모아 대성전을 먼저 복원하고, 1984년에 명륜당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양주향교에는 고대 중국오성中國五聖 과 송대 宋代 2현을 비롯 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