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2.한국사일반

한국역사학의 전환

동방박사님 2022. 4. 2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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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관점과 태도로서 내재적 발전’에 기반한
한국사 연구의 태동과 형성, 분화의 역사


이 책은 『한국 역사학의 기원』(2016)의 후속편이다. ‘기원’에서 전통의 경학이 문학, 사학, 철학으로 분화하는 시점부터 1950년대까지를 정리했다면, 이 책 『한국 역사학의 전환』에서는 한국 현대 역사학의 이해에 핵심이 되는 ‘주체적·내재적 발전’이란 용어를 가지고 한국전쟁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사 학계의 변화와 모색을 학술사라는 이름으로 살펴보았다. 저자는 ‘기원’과 ‘전환’에 이어 1900년대 냉전이 해체된 시기부터 현재까지를 살피는 연구를 이어갈 예정이다.

 

목차

머리말_ 주체적·내재적 발전의 측면에서 본 한국 현대 역사학의 역사
내재적 발전이란 말의 무게
‘내재적 발전론’의 측면에서 접근한 연구들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내재적 발전’ 연구의 태동·형성·분화의 역사 연구하기

1부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내재적 발전’ 연구의 태동

1장 한국의 문헌고증사학, 관학의 지위에 오르다
학문권력으로서 이병도와 진단학회
1950년대 정체성론이란 지(知)의 식민성을 보장한 동양적 특수성론
미국과의 연계, 더욱 위상이 높아진 학문권력

2장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재생 속에 비판적 조선사학이 싹트다
조선학회, 식민주의 역사학의 재결집
전후 버전의 식민주의 역사학을 주조한 스에마쓰 야스카즈
조선사연구회, 조선인을 주체로 내세운 여러 성향의 결집

3장 북한, 가장 먼저 자본주의 맹아·요소를 발견하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향한 집단적 과제와 정체성론
부르주아 민족의 형성에 주목한 자본주의적 변화
자본주의적 맹아 또는 요소 연구의 본격화

4장 한국에서 새로운 역사학이 싹트다
근대를 시야에 넣은 실학 연구
‘내면적’ 접근을 시도한 사회경제사 연구

2부 근대화론과 ’주체적·내재적 발전’ 연구의 형성

1장 북한과 일본 학계가 각자의 맥락에서 접근하다
북한 학계, 자본주의 요소 찾기
조선사연구회, 치열한 반성적 성찰과 남북한과의 내면적 교류

2장 주체적 ‘근대화’ 열망, 한국사 연구를 더 추동하다
4·19혁명의 경험과 식민주의 역사학의 역사인식 비판
로스토와 라이샤워식 근대화론의 유입과 역사인식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 주체성을 말하는 수용자들
근대의 기점 논쟁과 새로운 시선들

3장 1960년대 후반, 한국사 연구에서 내재적 발전 접근의 안착
근대화의 방향, ‘산업화=공업화’인가 주체적 수용인가
일본 재침략의 위기의식과 식민주의 역사인식 비판
식민주의 역사인식 비판에 대한 거부반응과 내적 한계
시대구분 논의, 기계적 시간 관념과 발전사관의 확산
새로운 연구의 사회화로서 한국사연구회, 한국학, 역사교육

4장 일본과 북한 학계에서도 사회구성사적 연구가 안착하다
북한 학계, 주체사상의 등장과 ‘자본주의적 관계’ 연구의 마무리
조선사연구회, 발전단계설에 입각한 연구 성과들
조선사연구회의 분화,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거리 두기

3부 경합하는 학술장과 ’주체적·내재적 발전’ 연구의 연속 분화

1장 1970년대 들어 관제적 공공 역사인식이 등장하다
한국사 연구 성과의 응집 281
국사교육강화위원회와 ‘주체적 민족사관’의 등장
임시정부정통론의 체계화와 관제적 공공 역사인식
이선근의 관제적 민족주의 역사학과 국난극복사관

2장 민중을 재인식하고 분단을 발견하다
‘주체적 민족사관’에 대한 비판과 신채호의 민중 인식 발견
한국사연구회의 균열과 민족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등장
‘분단시대’의 자각과 ‘비판적 한국학’의 제기

3장 한국사 학계의 거듭된 분화
균열 지점의 재확인, 정치성과 민중
분화의 가속화, 분단시대 국사학의 현재성 논쟁
창비와 문지, 민주적 공공성을 둘러싸고 경합하는 학술장
실천을 강조한 ‘민중적 민족주의’와 세력 배치론의 등장

4장 비판적 계승으로서 ‘민중사학’의 등장
과학으로서 역사학과 실천을 강조한 민중사학의 등장
민중사학의 근현대사 인식

맺음말_ 한국 현대사와 주체적·내재적 발전 연구사의 학술사적 의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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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신주백 (辛珠柏)
 
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옌벤대학·도쿄대학·교토대학·타이완중앙연구원 타이완사연구소 외국인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분과위원, 일제하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심의위...
 

출판사 리뷰

1. 주체적·내재적 발전의 시선으로 한국사 연구의 역사를 바라보다

저자 신주백은 2016년 간행한 『한국 역사학의 기원』에서 한국 현대 역사학의 뿌리를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한 바 있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성,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체제가 사학과라는 제도 속에 같이 있지만 사실상 독립된 분과 학문처럼 작동해온 분절성, 그리고 한반도 분단체제라는 결정적 현재성과 그것을 극복할 미래에 대해서는 입과 귀를 막아버린 분단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한국사 학계는 이 세 가지 특징의 기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저자는 이 움직임을 학계에서 검증 없이 흔히 사용해온 ‘내재적 발전론’이란 용어 대신,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움직임 속에서 포착하고자 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 사회를 이해할 때,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이라는 말만큼 꾸준하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온 역사 용어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이것이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들이 열등의식이나 낭패감을 떨쳐내는 데 지적 자극제이자 심리적 보충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학의 전환』은 이러한 맥락에서 1950~1980년대 한국사 연구의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한국사 학계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한국 역사학의 전환』은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문 경향의 ‘형성’이라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형성을 전후한 ‘태동’과 ‘분화’의 학술사도 함께 추적하였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중·후반경까지를 태동, 형성, 분화라는 세 시기로 나누고 각각 1~3부에서 고찰하였다.

여기에서 필자는 한국 현대 역사학의 세 가지 특징을 형성시킨 뿌리, 즉 식민주의 역사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성,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자장 안에 포섭된 증거물인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체제가 사학과라는 제도 속에 같이 있지만 사실상 독립된 분과 학문처럼 작동해온 분절성, 그리고 한반도 분단체제라는 결정적 현재성과 그것을 극복한 미래에 대해서는 입과 귀를 막아버린 분단성을 ‘기원’의 특징이라 규정하였다.

세 가지 특징의 기원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개인과 단체를 불문하고 눈에 띄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움직임은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움직임 속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머리말: 주체적·내재적 발전의 측면에서 본 한국 현대 역사학의 역사」, 29·30쪽

해방 후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자기 역사를 기록하고 연구하면서 형성된 한국 현대 역사학은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에 입각한 연구의 변천사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본인이 주조한 식민주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형성된 한국 현대 역사학은 내재적 발전의 맥락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며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와 관련한 연구와 교육 그리고 대안 모색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머리말: 주체적·내재적 발전의 측면에서 본 한국 현대 역사학의 역사」, 28·29쪽

내재적 발전의 시선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접근은 그 영향력이 학술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한반도 거주자의 지나온 시간을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 과정으로 보려는 움직임은, 한국인의 내면세계를 은연중에 규정하며 우리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끼쳐왔던 열등의식 내지는 낭패감을 떨쳐내는 데 지적 자극제이자 심리적 보충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1960년대부터 세계화의 흐름에 휩쓸려 들어간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사회를 이해할 때, 이 말만큼 꾸준하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온 역사 용어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만큼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역사학계와 그 이외의 여러 학문 분야, 더 나아가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접근이자 용어라고 볼 수 있겠다. ―「머리말: 주체적·내재적 발전의 측면에서 본 한국 현대 역사학의 역사」, 18쪽

2. 태동, 형성, 분화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 한국사 연구의 역사

저자 신주백은 한국사 연구의 역사를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의 맥락에서 분석하면서, 태동(1950년대), 형성(1960년대), 분화(1970~1980년대)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맺음말(434~435쪽)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태동: 한국전쟁 이후 이병도를 필두로 한 문헌고증사학이 한국사 학계의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관학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학계의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일본과 북한 그리고 서구 학계 등의 동향과 일제강점기 조선학운동의 흔적에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사를 ‘내면적’으로 파악하려는 흐름이 태동한 것이다.

김용섭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연구할 때는 전환기적 붕괴라는 측면과 함께 내적 발전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그는 주체의 움직임과 그 기반으로서 사회경제적 변화를 함께 보아야 하며, 더 나아가 그 과정을 근대와 연결하여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김용섭의 주장은 정체 상태에 빠져 있던 조선사회가 일본에 의한 개항과 침략으로 봉건제를 해체당하고 자본주의적으로 바뀌어갔다는 식민주의 역사학 및 그것을 내장한 1950년대 문헌고증사학의 주류적 역사인식과 상당히 달랐다. 1950년대 한국사회가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이고 숙명적인 원인을 해명하는 이론이자 동양특수담론의 하나로서 정체성론에 입각해 있던 학계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매우 보기 드문 도전이었던 것이다. ―「1부 4장 한국에서 새로운 역사학이 싹트다」, 108·109쪽

- 형성: 1960년대 들어 한국사 학계에는 문헌고증사학과 다른 경향인 내재적인 발전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흐름이 새롭게 안착하였다. 로스토와 라이샤워식 근대화론의 유입과 주체적 수용 노력, 4.19혁명으로 촉발된 민족주의 열기 속에서 한국사를 새롭게 연구하려는 경향은 1967년 한국사연구회라는 학술공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일본인이 주조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역사인식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며 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연구를 구체화하였다.

결론적으로 한국사연구회는 ‘내재적 발전’에 관한 하나의 학문 경향을 가진 연구자들만이 모인 단체는 아니었다. 다만 적어도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으로 대변되는 식민주의 역사인식에 동조할 수 없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하면, 한국사연구회는 조국 근대화 자체를 반대하지 않으면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 과정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체계화하는 과제에 동의하는 사람들 가운데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는 취지에 공감하며 반일민족주의를 지향하는 해방세대와 그 이후 세대의 역사학자들이 모인 단체로 출발하였다. ―「2부 3장 1960년대 후반, 한국사 연구에서 내재적 발전 접근의 안착」, 246·247쪽

- 분화 1: 197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박정희 정부가 주창한 관제적 민족주의 역사학의 국난극복사관(=주체적 민족사관)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내재적 발전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연구해왔던 사람들, 특히 한국사연구회 회원들은 이들과 어떻게 관계 설정을 해야 할지를 놓고 내부균열을 일으켰다. 한편에서 박정희 정부의 관제적 공공 역사인식과 친연성을 유지해가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분단을 발견하여 분단시대(분단체제)를 자각하고 민족 속의 민중을 주체로 재인식하며 민주적 공공성을 추구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후자는 다시 두 흐름으로 나누어져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란 ‘학술장’을 통해 서로 경합하면서 각자의 공공 역사인식을 다듬어갔다.

그 과정에서 창작과비평 그룹은 ‘민중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분단시대라는 역사의 현재성을 망각하지 않고 역사의 주체로 민중에 초점을 둔 ‘비판적 한국학’을 제창하였다. ‘주체적?내재적 발전’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구체적 자기화’로 ‘독자적인 해석’의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80년 ‘서울 봄’과 5.18민주화운동을 거치며 한국의 현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민중사학’을 제창하며 민중을 변혁의 주체로 내세우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한국사회의 현재적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사적 유물론을 역사연구의 방법으로 도입하여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 과정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려는 새로운 흐름이 1970년대 중반경에 이르러 분화하였다.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는 문제, 즉 유신체제를 인정하고 국가주의 역사인식과 타협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한 차례 균열이 있었다.…… 이후 일어난 더 큰 근본적인 분화는 분단과 민중을 학문의 영역으로 수용하는 문제, 근대 사학사에 대한 이해의 차이, 그리고 현재성과 역사 연구의 관계 등을 둘러싸고 연이어 생겨나는 차이를 복합적으로 확인하면서 일어났다. …… 양측은 ……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을 거점으로 각자의 사론을 펼쳐갔다. 역사학 분야에서 두 흐름을 대변하는 책이 앞서 계속 언급한 『한국의 역사인식』(상?하)(창작과비평사, 1976. 11)과 『역사란 무엇인가』(문학과지성사, 1976. 8)였다. ―「3부 3장 한국사 학계의 거듭된 분화」, 384·385쪽

3. ‘동북아시아의 지적 연계망’이라는 시야에서 한국사 연구의 역사를 해명하다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의 맥락에서 접근해온 연구는 한국의 한국사 학계에서만 개별적으로 고립된 채 진행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학사적인 분석은 사실상 국가 단위로 이루어져왔다. 단일 국가에 시선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시선이 특정 시대로 제한된 경우도 많았다.

저자 신주백은 김인걸, 김정인, 이영호 세 사람의 선행 연구를 분석하여(18~21쪽) ‘관점과 태도로서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발전’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연구해온 역사를 동태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만 기존 연구들이 한국에서의 ‘내재적 발전론’과 북한의 새로운 역사 지식과의 연관성 그리고 조총련 연구자들의 움직임을 포함해 일본 조선사학계(조선사연구회)의 비판적 조선사연구까지를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말 자체가 일본에서 들어왔는데, 선행 연구는 한국사 학계의 새로운 움직임과 일본의 조선사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 사이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내재적 발전에 입각한 새로운 한국사 인식은 일국 차원의 연구 결과가 아니며, 1960~1970년대 지역으로서 동북아시아 차원에 이루어진 지식 연계망을 간과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었다.

한국사 학계에서 내재적 발전에 입각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인데,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가 한국에서만 조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이미 그러한 접근법이 연구에 적용되고 있었고, 일본에서 비판적 조선사학을 지향한 사람들은 1960년대 들어 북한과 한국에서의 연구를 파악하여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사람 간 직접 접촉이든 글을 통해서든 아니면 사람과 글을 동시에 대면하든, 시대적 상황에 따라 국제 교류와 접촉 방식은 다양하였다. 저자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이 과정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지적 연계망’이라는 시야에서 해명하고자 했다.

1957년의 시점에 김용섭의 문제의식 형성에 영향을 준 일본의 두 가지 연구 동향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 역사학계는 세계사의 기본 법칙, 즉 역사 발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역사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접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유물사관에 동조하지 않는 한국의 역사학자도 왕조를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는 데 공감할 정도였다.

또한 김용섭은 침략을 받은 한국인의 처지에서 갑오농민전쟁을 분석한 박경식의 논문, 동학사상과 농민전쟁의 내적 연관성을 파악하며 새롭게 종합한 강재언의 일본어 논문에 동의하고 있었다. 강만길도 사회경제사학에 관한 자신의 학문적 이론 토대를 쌓는 과정에서 일본과 서구 학자들의 이론서를 많이 읽었다며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1부 3장 북한, 가장 먼저 자본주의 맹아·요소를 발견하다」, 110쪽

북한 학계가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사 연구를 선도하며 체계화를 적극 시도한 이유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을 현실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맥락에서 조선사를 연구하여 합법칙적인 발전을 해명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된 역사적 정당성과 필연성을 밝혀야 했다.

북한 학계는 그들만의 역사적 해명을 바탕으로 한국의 문헌고증사학에 내재한 식민주의 역사인식을 적극 비판하였다. …… 정체성과 타율성 등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장 자체를 직접 분석했다기보다 그것을 극복한 조선사를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규명해가고, 이를 바탕으로 점차 기초 소양 수준을 높이면서 조선사 연구에 더 몰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1960년대 들어 동북아시아에서 조선사의 주체성과 내재적 발전에 관한 해명을 선도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2부 1장 북한과 일본 학계가 각자의 맥락에서 접근하다」, 127쪽

식민주의 역사인식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일본과 한국에서 달랐다. 일본의 조선사 학계는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반성적 시각을 확보하고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비판적으로 검증하였다. 일본조선연구소와 조선사연구회를 이끌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집담회는 자기 허물을 스스로 벗겨내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1945년 이전의 관학 아카데미즘을 추구한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인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잠복하며 작동하고 있는 식민사관에 대해 다양하고 구체적인 분석, 예를 들어 연구 방법, 정치 제도와 구조 그리고 정치주의까지를 포함하는 정치성, 분석의 결과로서 ‘한국사관’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비판자들이 말하는 식민사관이란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이 주조한 역사인식만을 가리켰다. 한국인 학자가 연구한 결과물은 식민사관의 범주에 포함하여 분석하지 않았다. ‘식민사관’이라는 명칭 자체의 경계선이 민족이기 때문이었다. ―「맺음말: 한국 현대사와 주체적·내재적 발전 연구사의 학술사적 의미」, 4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