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3.민주화운동

대중과 폭력 : 1991년 5월의 기억

동방박사님 2022. 5. 1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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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 뜨거웠던 1991년 5월 투쟁 30주년

올해는 1991년 5월 투쟁 30주년이 되는 해인 동시에, 1987년 민주화의 성과가 여전히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으며 그 한계에 대해 다시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1987년 이후의 시기 분석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1991년 5월 투쟁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기 중요한 시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87년 6월 항쟁부터 1991년 5월에 이르는 4년여 동안의 기간은 민주화의 힘과 탈민주화의 힘이 교착적으로 대립했던 시기로, 1991년 5월과 6월에 걸쳐 벌어진 60여 일간의 투쟁은 민주화가 확대될 것인가 축소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분수령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화 세력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뒤이은 총선에서 형성된 여소야대 국면으로 위기에 처한 보수 진영은 3당 합당을 통해 제도 내 힘 관계를 뒤집었고, 이를 기반으로 공안 통치와 권위주의 통치로 회귀하려 했는데, 91년 5월 투쟁은 이 같은 흐름의 노태우 정권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다.

1991년 봄, 백골단의 과잉 진압과 폭력으로 명지대생 강경대가 사망하고,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사했으며,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 박승희를 비롯해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차태권, 정상순, 이진희, 석광수 등 학생, 노동자, 빈민 11명이 연이어 분신했다. 불과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14명이 사망하고 전국적으로 2300여회의 집회가 열리는 등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 시위가 벌어지며, 91년 5월은 ‘제2의 6월 항쟁’으로 불리기도 했다.

 

목차

개정판 서문 더 나은 실패를 기다리며 6
추천의 글 왜 대중인가? 12
초판 서문 나는 꿈을 꾼다, 주저 없이 ‘대중’ 속으로 소멸할 수 있기를 20

1장 현재 속의 역사
1. 이론의 정세 27
2. 1991년 5월 투쟁이 던지는 세 가지 질문 34

2장 대중과 대중운동
1. 1991년 5월 투쟁의 시작부터 소멸까지 41
2. 대중, 민중, 계급, 시민 72
3. 대중운동: 대중의 내재적 경향 87

3장 대중과 폭력
1. 1991년 5월 투쟁의 담론 110
2. 폭력과 비폭력 146
3. 대중의 양면성 159

4장 수수께끼를 향하여 170

참고문헌 180
1991년 5월 투쟁 일지 188
찾아보기 191
 

저자 소개

저 : 김정한 (Kim, Jung han,金廷翰)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대중운동의 이데올로기 연구: 5·18광주항쟁과 6·4천안문 운동의 비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문화 과학 편집위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민간조사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현대 정치철학연구회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현대 정치철학을 통해 ...
 

책 속으로

흔히들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 정치’ 또는 ‘대중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대중조작에 의한 정치, 혼란스럽게 제멋대로 운영되는 민주주의라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에서 보이듯,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는 테제도 립 서비스 차원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p.29

1991년 5월 투쟁의 분석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1차 자료와 2차 자료를 활용해 1991년 5월 투쟁에 대한 시계열적 분석을 전개한다. 시계열적 분석은 1991년 5월 투쟁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1991년 5월 투쟁의 발발·소멸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담론 분석이 병행돼야 한다. 담론 분석은 언어로 표현된 이데올로기, 즉 사람들이 갈등과 대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는가를 보여 줄 수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거의 유일한 ‘긍정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에 의거한다.
---p.35

폭력과 비폭력. 1991년 5월 투쟁에서 나타났던 주요 담론은 ‘폭력’이었다. 투쟁이 확산되면서 대중의 생존권적 요구들이 분출하기 시작했고, 대안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대안 권력 논쟁이 제기되었지만, 그것은 사회적 힘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따라서 당시 ‘폭력’은 5월 투쟁 내내 다양한 사회 정치 세력들이 현실을 해석하고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거의 유일한 언어였다.
---p.38

1991년 5월 투쟁은 강경대 타살 사건이 발생한 4월 26일부터 투쟁의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6월 29일까지 대략 60여 일에 걸쳐 전개되었다. 5월 투쟁은 그 발생 초기부터 ‘제2의 6월항쟁’이라는 별칭을 부여받을 정도로 6공화국 이후 최대 규모의 집회·시위들이 이어지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들을 창출했다. 그러나 1991년 5월 투쟁은 제2의 6월항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소멸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p.41

1991년 5월 투쟁의 주요한 원인은 정치적 세력 관계의 차원에서 설명될 때 좀 더 설득력을 가진다. 1987년 6월항쟁과 이후 1988년 여소야대 정국을 거치면서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정서는 거의 혁명적이었다. 이에 대해 노태우 정권은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을 계기로 공안 정국을 조성해 사회운동 세력에 대한 선별적 대탄압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3당 합당(1990년 1월)을 통해 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출범시킴으로써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1992년 이후의 정권 재창출을 보장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의 힘으로 열렸던 (제도)정치사회는 다시 축소되었고, 민주적 과제들은 변형되거나 유보되었다.
---pp.46,47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년 5월 투쟁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강경대 사건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열사’라는 독특한 집단적 상징의 성격을 살펴봐야 한다.
---p.48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중산층의 미참여-기층 민중의 조직적 진출’이라는 논리가 중산층의 보수화 또는 사회운동 조직들의 이념적 급진성에 대한 논거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즉, 1987년 이후 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중산층은 보수화되고, 사회운동 조직들은 이념적으로 급진화되어 중산층과 사회운동 세력과의 분리·괴리가 심화되었기 때문에 5월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회운동 조직들의 이념적 급진성은 전혀 사실에 기초한 평가라고 할 수 없다.
---pp.56,57

이것은 민주 정부 수립 등의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중의 봉기성을 제거하는 투쟁 아닌 투쟁이었으며, 5월 투쟁을 선도적으로 자체 정리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선거 혁명론에 사로잡힌 1987년 6월항쟁의 전략적 오류가 다시 한 번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범국민대책회의에서는 일단 선거를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현실적으로 선거 국면이 진행되자 산하 단체 중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조직이 많은 이상 이를 막연히 바라만 볼 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며, 가장 큰 대중 동원력을 가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는 6월 1일 5기 출범식을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개최하는 등, 사회운동 세력 주류로부터 5월 투쟁에 대한 실질적인 정리 작업이 진행되었다.
---pp.65,66

이렇게 1991년 5월 투쟁의 수많은 죽음에 대해 다양한 정치사회 세력들은 각기 상반된 해석과 의미를 부여했다. 분명 죽음은 현실로 존재했다. 아무도 그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죽음이 존재했고, 따라서 죽음의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 소재가 밝혀져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자체로 투명하지 않았다. 1991년 5월 투쟁이 전개되면서 현실에 대한 기의signifie는 고정되지 않은 채 대립적인 기표signifiant 밑으로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p.123

죽음과 폭력이 전 시기에 걸쳐 주요 언어였다는 사실은 1991년 5월 투쟁의 재앙이었다. 그것은 5월 투쟁을 촉발했지만, 또한 5월 투쟁을 소멸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투쟁이 확산되자 열린 공간 속에서 짧은 기간 동안 대중의 생존권적 요구가 분출했고,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논의들이 시작되었지만, 죽음과 폭력의 언어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결국 지배 세력에 의한 ‘사회운동 세력의 폭력성과 반反도덕성’이라는 공세적인 의미 계열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한계로 작용했다. 대중이 현실의 갈등과 대립을 보다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저항적인 담론이 부재했던 것이다.
---p.174

대중은 자신을 위협하는 폭력으로부터 공포를 경험하고 그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봉기한다. 그러나 봉기한 대중은 대중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직면해 “더욱 무섭고 통제할 수 없어”진다. 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대중운동이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그 속에서 대중은 또 다른 공포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스로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완화·경감하기 위해 대중운동 이전의 상태로 모든 것을 되돌리고자 한다.
---p.165
 

출판사 리뷰

대중운동·사회운동 연구자 김정한의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에 대한 기억」과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가 새롭게 재출간되었다. 그간 김정한 박사는 대중운동과 폭력/반폭력이라는 문제 설정을 통해, 한국의 주요 대중운동과 정치철학 담론을 분석해 왔다.

# 뜨거웠던 1991년 5월 투쟁 30주년
올해는 1991년 5월 투쟁 30주년이 되는 해인 동시에, 1987년 민주화의 성과가 여전히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으며 그 한계에 대해 다시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1987년 이후의 시기 분석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1991년 5월 투쟁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기 중요한 시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87년 6월 항쟁부터 1991년 5월에 이르는 4년여 동안의 기간은 민주화의 힘과 탈민주화의 힘이 교착적으로 대립했던 시기로, 1991년 5월과 6월에 걸쳐 벌어진 60여 일간의 투쟁은 민주화가 확대될 것인가 축소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분수령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화 세력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뒤이은 총선에서 형성된 여소야대 국면으로 위기에 처한 보수 진영은 3당 합당을 통해 제도 내 힘 관계를 뒤집었고, 이를 기반으로 공안 통치와 권위주의 통치로 회귀하려 했는데, 91년 5월 투쟁은 이 같은 흐름의 노태우 정권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다.
1991년 봄, 백골단의 과잉 진압과 폭력으로 명지대생 강경대가 사망하고,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사했으며,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 박승희를 비롯해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차태권, 정상순, 이진희, 석광수 등 학생, 노동자, 빈민 11명이 연이어 분신했다. 불과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14명이 사망하고 전국적으로 2300여회의 집회가 열리는 등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 시위가 벌어지며, 91년 5월은 ‘제2의 6월 항쟁’으로 불리기도 했다.

# 1987년 체제인가, 1991년 체제인가
그러나 연이은 분신에 배후가 있다는 음모론과 검찰의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계기로 1980년대의 급진적 민중운동은 급격히 소멸했고, 그 효과는 민주화 과정의 왜곡과 봉쇄로 나타났다. 곧 민중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과 배제가 본격화되었고, 뜨거웠던 5월 투쟁은 급속히 시들어 버렸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상정된 민주적 개혁 법안들은 하나 둘 폐기되거나 개악되었다.
특히 이 시기를 기점으로, 1980년대 민주화 세대는 이른바 ‘후일담’을 통해 혁명의 미망에 대한 고백과 청산으로 나아갔고, 민주 정부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도했으며, 기성 정치인들보다 더 탈민주적이고 무능력한 ‘정치 계급’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의 새로운 운동 주체들은 민중운동 내의 군사 문화, 위계적 조직 질서, 과도한 중앙집중화, 정당 의존성, 명망가 중심성, 남성 중심주의와 성차별 등을 반성하고 성찰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점에서 오늘날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힘은 1987년 체제가 아니라, 1991년 체제라는 분석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대중과 폭력』은 1991년 5월 투쟁을 직접 경험한 연구자의 빼어난 사례연구이자, 대중 운동에 대한 개념화와 그 메커니즘, 폭력과 비폭력, 반폭력 등을 둘러싼 이론적 쟁점을 논한 정치철학 연구서이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당시 뜨거웠던 대중투쟁의 흐름과 그 주요 변곡점들을 차분하게 정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 같은 현실의 흐름과 운동의 쟁점들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현대 정치철학의 다양한 이론틀을 제시하고 있다. 현실과 이론을 병행 배치하고 있는 이 같은 구성은 현실에 매몰되지 않은 채 그 안에서 이론적 쟁점을 잡아내고, 이론을 살피면서도 현실을 이론 틀에 맞춰 재단하지 않으려는 연구자의 치열한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이 책은 1991년 5월 투쟁에 대한 최초의 분석서이자, 지금까지도 1991년 5월 투쟁을 논하는 자리에서 언제나 제일 먼저 거론되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991년 5월 투쟁 30주년이 되는 올해, 1991년 체제가 남긴 열망과 좌절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91년 5월 투쟁의 실패라는 시점에서 보면, 1987년 6월항쟁이 민주화의 승리라는 관점은 지나치게 신화화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6월항쟁의 승리가 5월 투쟁의 패배로 이어진 것인데, 6월항쟁은 그 주역이라는 이른바 86세대가 제도 정치에서 입신양명할수록 그들과 함께 더욱 신화화되고 5월 투쟁은 사실상 잊혔다. 물론 그 패배의 일면에는 1980년대 운동 문화에 내재해 있던 군사적/위계적/엘리트적/남성 중심적 한계들도 존재했고, 이는 1980년대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극복·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겼다.
정치철학적으로 보면, 1991년 5월 투쟁은 한편으로 대중들의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가 어떻게 출현하고 소멸하는지에 관한,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의 폭력이 지배자들만이 아니라 대중들 자신에게도 공포를 불러일으킬 때 어떻게 정치적 힘을 보존하고 확대할 수 있는지에 관한 사유를 제기한다. 이는 수많은 대중들이 거리의 정치를 전개할 때 항상 반복되는 논쟁점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중들의 운동 방식이 촛불이라는 형태로 변화하는데, 여기서도 어떻게 촛불이 켜지거나 꺼지는가, 또는 대항 폭력이나 비폭력, 반反폭력 가운데 어떤 실천이 적합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중들의 운동이나 봉기가 새로운 질문을 던질 때 그에 대해 미리 선택할 수 있는 정답은 없겠지만, 1991년 5월의 실패를 복기하면서 더 낫게 인식하고 사유할 수는 있다고 믿는다. - 개정판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