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전쟁연구 (책소개)/8.전쟁기억평화

기념의 미래 (2019 최호근)

동방박사님 2023. 1. 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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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기념의 시대는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서로 엉킨 4중 과거사-동학농민혁명, 일제 치하 친일협력,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독재 시기의 인권유린-와 치열한 기억투쟁 덕분에 대한민국은 세계 최다의 과거사위원회 보유국이 되었다. 하지만 준비 없이 맞이한 기념의 시대는 기억의 불임을 동반했다. 전국 도처에 각종 기념시설이 세워졌지만, 기억에 대한 갈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부실한 기념의 반복에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살아있는 기억을 맛볼 기회를 갖지 못한 젊은 세대가 아예 과거에 대해 무관심해질지도 모른다. 『기념의 미래』는 이러한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구체적인 현장의 관찰과 분석을 통해 되짚고, 그 미래의 방향에 대해 제언한다.

이 책의 의도는 부제 “기억의 정치 끝에서 기념문화를 이야기하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자는 기억의 정치가 이제까지 우리 사회 변화의 견인차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의 정치만으로는 앞으로 세상을 바꾸어갈 기억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강조한다. 기억정치의 역할은 예산과 부지를 확보하고, 큰 방향을 수립하는 데서 끝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문화의 역할이 본격화된다. 기억투쟁을 통해 마련된 기념 공간과 절차에 호흡을 불어넣어 생동하는 기억을 산출하는 것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목차

기념문화 이야기를 시작하며

I 우리 시대 기념의 붐을 진단하다

01 기념의 홍수, 기억의 갈증
02 박제화된 의례, 질식된 기억
03 개념 없는 기념 - ‘국가를 위한 죽음’과 ‘국가에 의한 죽음’의 혼동
04 정치의 과잉, 문화의 결핍 - 이제는 기억투쟁에서 기념문화로 이행할 때

II 우리 기억의 터를 거닐다

05 대한민국 기념문화의 최전선 - 제주 4·3평화공원과 기념관
06 화해와 상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 - 하귀리 영모원
07 팽나무와 올레 길의 말없는 증언 - ‘잃어버린 마을’
08 아름다운 풍광, 서러운 이야기 - 무명천 할머니 집
09 시멘트 벽 총흔의 증언 - 노근리 쌍굴다리
10 식지 않는 집단기억의 불가마 - 구 전남도청
11 등을 맞댄 두 묘역 - 국립5·18민주묘지와 망월동 묘지
12 작지만 견실한 기억의 터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13 자책의 사슬을 풀어준 포옹 - 제37주년 5·18 기념식
14 상설전보다 특별전이 더 좋은 곳 - 세종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5 진부하지만 울림이 있는 공간 - 용산 전쟁기념관
16 질서 속의 무질서 - 동작동 국립 서울 현충원

III 바다 건너 기억의 터를 찾다

17 기억을 새기는 가해자의 방법
- 뮌헨 나치기록센터와 베를린 테러의 지형도
18 작은 전시, 큰 반향
- 베를린 안네 프랑크 센터
19 복원과 보존의 차이
- 아우슈비츠의 두 수용소
20 진묘의 문화, 가묘의 정치
- 예루살렘 올리브산과 베를린 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
21 토포그래피에 새겨진 이스라엘 현대사
- 헤르츨기념관-야드바셈-국립묘지
22 애도의 미디어
-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둑과 워싱턴 홀로코스트기념관의 신발들
23 어린이를 생각하는 전시, 어린이가 이해하는 전시
- USHMM 다니엘 스토리
24 전쟁을 기억하는 미국인의 세 방식
- 이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25 킹 목사가 살아있는 고향
- 애틀랜타 시민인권센터

IV 우리 기념문화를 전망하다

26 기념관의 혈맥, 스토리
27 주검으로 재현되지 않는 죽음의 의미
28 미래 기념의 답을 찾는 자, 온라인에 주목하라
29 교육을 염두에 둔 전시, 전시를 활용한 교육
30 글로벌 시대 한국발發 기념문화를 위하여

 

저자 소개 

저 : 최호근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일 근현대사와 역사이론을 전공하였고,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막스 베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의 문화적 영향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트랜스내셔널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막스 베버와 역사주의》(독문, 2000), 《제노사이드》(2005), 《독일의 역사교육》(2009), 《기념의 미래》(2019)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독일 역사주의》(1992...
 

책 속으로

"‘기억정치’의 한 부분인 ‘희생의 정치’가 희생자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사회·정치적 공인으로 일단락되고 나면, ‘기억의 제도화’ 과정이 뒤따른다. 특별법 제정과 진실·정의·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 구성은 첫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이행의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위원회의 활동은 진실규명, 정의구현, 화해실현을 위한 제안과 더불어 마감되고, 후속 사업 추진을 위해 공적 자금을 통해 운영되는 각종 기념재단과 기념시설들이 설립된다.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사회과 교과과정 수정과 교과서 개편이 일어나는 것도 이즈음이다.

기억정치의 제도화는 전례 없는 기념의 수요를 촉진한다. 각종 기념시설 조성, 국가기념일 제정, 기념교육기관의 신설과 후원이 본격화된다. 이때부터 예전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가 출현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기억의 정치는 기념공원과 기념관과 기념재단을 세울 땅을 마련하고, 그 기관들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예산 확보와 더불어 끝난다. 땅과 돈의 문제는 정치력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기념공원을 ‘어떻게’ 조성하고, 전시를 ‘어떻게’ 설계하며, 전시활용 교육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 ‘어떻게’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문화적 역량이다. 목적 실현을 위한 투철한 의지는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일 뿐,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투사의 시대는 가고, 충분한 역량을 갖춘 전문가의 시대가 도래해야 하는 것이다." --- p.50~51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상황에서 해결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다. 전국적으로 과거사에 대한 기억이 부상하면서 1990년에 하귀발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93년에는 마을 이름이 하귀리로 복원되었다. 4·3 후에 빨갱이 마을의 의심을 떨치기 위해 1953년 동귀리와 귀일리로 개칭했던 이름을 40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이후 10년 동안 마을 구성원들과 타 지역에 나가 살던 사람들은 파괴된 공동체 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그 아름다운 결과가 바로 영모원이다. 죽은 자들을 한자리에 모심으로써 산 자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을 모색하는 영모원의 의미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기 이전인 2003년 5월에 개장된 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오랜 세월 서로 품앗이 하며 밭을 일구고 담 자락을 맞대며 살아온 주민들 사이에 벌어진 대리학살과 보복학살의 경험을 세밀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하귀리 영모원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누군들 그 정도 못하랴?’는 생각을 혹시 품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고향을 모르는 사람이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지독스러운’ 대면공동체에서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사안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과거가 현재고, 과거의 기억이 곧 미래를 방향짓는다. 학살의 상승작용 속에서 이미 처절하게 파괴된 공동체는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과거요, 어떻게든 정리하지 않으면 새 출발이 불가능한 현재다. 어쩌면 제주를 모르는 ‘육지 것’들은, 익명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요즘 것’들은 이 엄혹한 현실을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기에 과거사를 이해하는 일은 같은 민족의 역사라고 해도 어려운 법이다." --- p.94~95

"차이가 있다면, 하나밖에 없다. 예수는 부활했으나, 망월동에 묻힌 사자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이내 사라진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후 그의 뜻이 제자들을 통해 승계되었던 것처럼, 망월동 망자들의 뜻도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을 통해 계승되고 확산되었다. 문제는 기억이고, 기억하려는 의지다. 그리하여 신군부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5·18 기억은 확산되었다. 망월동은 도청과 더불어 그 기억의 발원지로 커왔다. 1997년 이곳에 매장되어 있던 사자들의 유해가 새로 조성된 인근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어도, 망월동의 원본성에는 아무 변함이 없다.

오히려 원본성과 현존성에 기인한 망월동의 아우라는 묘지의 연속성과 확장성 때문에 점점 더 확대되는 중이다. 1980년 5월 27일 126기의 시신이 이곳에 묻힌 이후 망월동은 기성 질서와 시류時流에 거세게 저항하고 역류逆流를 꿈꾸다 스러진 이들의 무덤이 되어왔다. 1987년 박종철과 더불어 자기 죽음을 통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청년 이한열이 이곳에 묻혔다. 박종철과 더불어 이한열의 죽음은 5·18에 대한 우리의 부채감과 직결되어 있다. 그뿐인가? 저항의 시를 통해 5·18을 고발하고 잠든 우리 기억을 일깨웠던 김남주도 1994년 이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 p.156~157

"많은 방문객이 비르케나우에서 기대하는 것은 역사적 현장에서 시간의 거리를 느껴보는 것이다. 1945년 1월 1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기 전 수용소의 일상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세대가 넘게 지난 지금 남아있는 잔해 속에서 두 세대 전의 일상을 가늠해 보고자 함이다. 부재의 현장에서 존재의 과거로 들어가는 단서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그 먼 곳을 일부러 찾아가는 것이다. 녹슨 철조망보다, 낡은 플랫폼보다 스산한 과거를 우리에게 더 잘 그려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없다. 추리와 상상이 없다면, 학습과 공감의 준비가 없다면,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서는 기억을 기대할 수 없다. 기념비적 규모의 가시적 복원은 이 모든 것을 돕기보다는, 방해할 확률이 훨씬 더 크다.

그럼에도 아우슈비츠 일대를 예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려는 강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한 가지 이유가 기억의 정치에 있다면, 또 다른 이유는 행정에 있다. 유럽 각지에서 후원이 잇따르면서, 조직으로서 박물관은 존재 이유를 입증하고 몸집을 키울 기회를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비르케나우는 그 자체가 기념물로서 남아있을 때 가장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시설에 대한 복원은 신기루를 좇는 욕망의 발걸음, 허망한 절규에 가깝다. 이 문제가 비단 아우슈비츠에서만 나타나는 일일까? 서양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지금 여기 우리나라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 p.282

"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이 베를린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장 빈번하게 제기된 비판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길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텅 비어있는 가묘도 허무하지만, 더 공허한 것은 그 가묘들이 주인이 실종된 이름 없는 무덤이라는 것이다. 기념물 이름에서 가해 주체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거센 비판 때문에 본 계획에 없었던 내용이 조성 과정에서 추가되었다. 기념물 지하에 신축된 정보학습실Ort der Inform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공간에 이스라엘 야드바셈으로부터 제공받은 300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인적 사항이 보관됨으로써, 비판은 다소 수그러들었다.

지상의 기념물이 집단의 운명과 익명성을 통해 학살의 구조적 성격과 체계성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지상의 기념물 지하 동쪽 끝에 위치한 정보학습실은 개개인의 비극적 운명에 초점을 둔다. 강제 이송 당하던 유대인들이 기차 창밖으로 던진 편지를 전시하거나, ‘가족들의 방’에서 유대인 열다섯 가정의 기구한 운명을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름들의 방’에서는 야드바셈에서 제공받은 명부 속 희생자의 이름을 들려준다. 이와 동시에, 네 개의 전시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지상에 있는 석관 모양을 재현함으로써, 지상과 지하의 연계성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킨다." --- p.295

"부담스러운 과거사와의 결별은 오직 적극적 가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적극적 가공은 기억의 활성화를 의미한다. 사회적 기억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살아있는 기념이 필수적이다. 이런 지속적 노력을 통해 과거사의 지긋지긋한 망령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만드는 작업이 바로 기념이다. 불신의 망령, 저주의 망령, 비난의 망령은 햄릿이 부왕의 사연을 경청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가 과거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한다. 핵폐기물을 충분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처리해야 하는 것처럼, 난지도 일대에 쌓여있는 그 엄청난 생활 쓰레기들을 적절한 비용과 최신 기술을 활용해 우리 손으로 가공했던 것처럼, 과거사도 철두철미한 가공 없이는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자연이 초래한 재앙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이 거둬가지만, 인간이 초래한 재앙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거둬들여야 한다. 가해자와 생존자가 생물학적으로 소멸되고 나면, 과거사가 그 시신들과 함께 공동묘지에 더불어 안장될까? 그렇지 않다. 그런 무책임한 무관심이 이 나라를 유령의 집, 귀신들의 동산으로 만들어버렸다. 앞선 세대가 모질게 저지르고 강퍅하게 모른 척했다면, 후손이라도 그 뒷수습을 해야 한다. 엎질러진 물이라도 주워 담는 성의를 보일 때, 불신과 저주의 망령들은 자기 갈 곳을 찾아 떠나고, 우리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차비를 차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담스러운 과거사의 기념은 미래에도 불길한 기억들의 영원한 안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런 취지가 모든 방식의 기념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의도가 선해도 과정이 미흡하면, 오히려 비판과 냉소를 초래할 수 있다. 기억의 투쟁은 공적 기념에 필요한 부지와 예산 마련에 기여했다. 기억의 정치는 그 기념의 공간과 절차를 국가주의적 방식과 공화주의적 방식 가운데 어떤 것으로 채워갈지를 좌우한다. 그렇게 마련된 공간과 절차에 심미적 완성도를 부여하고, 울림이 있는 기억의 공간과 절차로 만들어주는 것, 곧 기억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기억투쟁과 기억정치가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기념의 문화다. 방향만큼은 정치적 투쟁이 결정한다. 그러나 색조와 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문화적 안목과 역량이다. 부담스러운 과거사의 당사자들이, 그들을 대변했던 정치세력이 이 영역에 깊이 개입하면 할수록, 오히려 기념은 경직되기 쉽다." --- p.447~449

"기념의 문화란 기억의 정치가 작동하고, 기억의 경제가 흥망하며, 사회적 기억이 뿌리내리는 무대요 토양이며 풍토다. 요컨대, 기념문화는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의 매트릭스다. 이러한 주장은 부담스러운 과거사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내켜하지 않는 부담스러운 기억을 활성화해서 공동체의 유익한 공적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화 메커니즘의 적극적 활용이 필요하다. 전시의 기본개념 없이 개관한 기념관, 타성에 젖은 기념물, 엄숙하기만 한 공적 의례가 문제라면, 경직된 기념문화, 왜소한 기념문화, 뿌리 없는 기념문화, 배타적 기념문화, 폐쇄적인 민족주의적 기념문화가 문제다.

기억의 활성화를 도모한다면, 탄력성과 융통성이 넘치는 기념문화의 진작이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문화는 기획이다. 기념문화 역시 기획이다. 창의적 기념은 풍요로운 기억을 낳고, 그 다산의 기억들 가운데 일부는 역사를 자식으로 낳는다. 그 역사는 다시 상상력 넘치는 기념을 재촉한다. 이 사이클은 자동으로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마중물을 필요로 하고, 창의적 기획을 필요로 한다. 부담스러운 과거를 기념하는 문화는 자동으로 육성되지 않는다. 민간의 경제가 부담스러운 과거의 진작을 책임질 리는 만무하다. 이것을 책임져야 할 것은 공적 영역이다. 그러나 공적 영역의 주축인 국가는 기본적으로 경직되어 있다. 게다가 우리 국가는 국가폭력의 가해 주체이기까지 했다. 이 국가에 부담스러운 기억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없다!
국가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책임 표명과 제도적 장치의 마련과 기념의 공적 기구들을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재정의 안정적 조달뿐이다. 그 외의 영역은 시민사회의 몫이다. 수축을 거듭해서 탄력성이 결핍되어 버린 기념문화를 어떻게 다시 펴고, 어떻게 바람을 불어넣으며, 어떻게 생기를 발휘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생동하는 공적 기억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 p.453~455
 

출판사 리뷰

『기념의 미래』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시대 기념문화에 대한 진단(I부)은 국내와 국외 주요 기념시설에 대한 관찰과 분석(II, III부)을 거쳐, 한국발 기념문화에 대한 전망과 제안으로 끝난다(IV부).

I부는 진단의 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기념의례가 늘어나고 기념물, 기념공원, 기념관이 속속 생겨나고 있음에도 기억의 갈증이 심해지는 이유는 박제화된 의례와 기본 개념의 궁리 부족 때문이다. 흐릿한 청사진, 느슨한 로드맵, 모호한 전략은 그 필연적 결과다. 이 문제점들이 정치 과잉과 문화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면,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는 문화의 색을 입히고 문화의 숨결을 불어넣는 노력을 다채롭게 펼쳐가야 한다. 이런 진단에서 저자는 기억투쟁에서 기념문화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II부 ‘우리 기억의 터를 거닐다’에서는 제주, 광주, 영동, 서울이 등장한다. 1948년 제주 4·3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의 중요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12개의 장소들이 다뤄진다. 이 중 네 개가 제주에 있다. 봉개동 언덕의 4·3평화공원, 공동체 붕괴와 개인 삶의 파괴를 고발하는 ‘잃어버린 마을’과 무명천 할머니 집, 그 파괴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조성된 하귀리 영모원이 그것이다. 광주에서는 구 전남도청,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국립 5·18민주묘지와 망월동 묘지에 주목한다. 의거와 죽음, 매장과 기억으로 이어지는 이 네 개의 장소는 아직도 식지 않은 우리 현대사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한 기념의 복합공간이다.

충북 영동에는 한국전쟁기에 피난길에 올랐던 어린아이들, 부녀자들을 포함해 250-300명의 민간인이 3일 동안 철교 아래 쌍굴에 갇혀 미군의 기관총에 목숨을 잃은 통한의 장소 노근리 쌍굴다리가 있다. 서울에서는 현대사 100년을 이야기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쟁의 서사를 전개하는 전쟁기념관, ‘국가를 위한 죽음’의 현창하는 국립 서울현충원을 비판적 시각에서 조명한다.

III부 ‘바다 건너 기억의 터를 찾다’에서는 독일, 폴란드, 헝가리, 이스라엘, 미국에 있는 15개 기억의 처소를 다룬다. 국내에서 발견되는 문제점들을 해외 사례들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치기가 저자의 동기는 아니다. 벤치마킹도 탐방과 서술의 이유가 아니다. 저자는 호평 받는 해외 사례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치열한 논의와 궁리, 기본 개념을 도출하기 위한 숙고와 개념화의 자세라고 밝힌다. 여기서는 가해 책임 재현에 충실한 독일인의 기억방식을 뮌헨 나치기록센터와 베를린 테러의 지형도를 통해 살펴본다. 어린이를 위한 저자의 관심은 베를린 안네 프랑크 센터와 워싱턴 홀로코스트기념관에 대한 관찰에서 드러난다. 아우슈비츠를 통해서는 복원의 강박만이 기억 전승의 지름길이 아님을 강조한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상기기념물을 통해서는 높이 솟은 수직의 석제기념물이 애도의 유일한 방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가 꿈꾸는 기념은 신발을 소재로 비극의 과거를 재현하는 ‘애도의 미디어’에서 잘 드러난다. 1987년 6월 연세대 앞 시위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 이한열의 신발, 1944년 유대인들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둑에 놓인 60켤레의 철제 신발,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전시된 2,000켤레의 나치 희생자 신발은 정서적 거부감 없이 희생자들과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정서적 가교다.

IV부 ‘우리 기념문화를 전망하다’에서는 이제 한국형 기념문화의 소박한 꿈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그 대신 한국에서 시작되어 온 세계가 향유하는 한국발 기념문화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 미래로 나아가는 로드맵의 핵심을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전통의 샘에서 영감을 얻고, 글로벌 기념문화를 면밀하게 살펴보자. 어두운 과거 속에서도 사람 향기 넘치는 스토리 발굴과 가공에 힘쓰자. 죽음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폭력의 과거를 재현하는 왕도는 아니다. 교육을 염두에 둔 전시, 온라인 세계를 개척하는 전시야말로 세대 간 기억전승의 지름길이다.

이런 로드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례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상비 위주의 예산 배정, 학예전문가에 대한 옹색한 처우, 토목과 건축 중심의 사고도 그 덫의 일부이다. 이 덫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은 이 모든 현실이 문제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