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5.대한민국대통령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다 (2022) -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동방박사님 2023. 5. 30.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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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인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Syngman Rhee, 1875-1960)의 생애를 그가 살았던 시대(時代) 상황에 비추어 서술한 전기(傳記)이다. 필자는 그의 생애에서 우리 국민이 참조해야 할 귀중한 경험(經驗)과 유산(遺産)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조선왕국의 가난한 백성으로 태어나 청년기에 나라까지 잃었던 “불쌍한” 조선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국적 없는 망명객 신분으로 나라를 찾는다며 낯설은 외국 땅을 헤매며 갖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얻은 교훈은 간단했다. 약소민족의 운명은 강대국(强大國)들의 국제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따라서 군사력이 없는 한(韓)민족이 독립을 찾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독립운동은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으로 나타났고, 독립 후의 국가수호 전략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는 한미동맹론(韓美同盟論)으로 구현되었다.

목차

책머리에

1. 서양문명과의 만남

(1) 위정척사파 나라에서 성장
(2) 배재학당에서 만난 선교사들

2. 애국계몽운동

(1) 민주주의 첫 학습
(2) 언론인으로 출발

3. 왕조에 대한 저항과 감옥생활

(1) 황제에 대한 반역
(2) 5년 7개월의 감옥생활
(3) 기독교는 문명개화의 도구

4. 유학길에 맡은 정부밀사

(1) 선교사들 도움으로 미국유학
(2) 미 대통령 만나 독립보전 호소
(3) 조지워싱턴대학 시절

5. 외교전문가가 되기 위한 길

(1) 하버드대학 석사과정
(2) 프린스턴대학 정치학 박사

6. 잠시 귀국해 YMCA 활동

(1) 조심스러운 애국계몽운동
(2) ‘105인 사건’으로 미국 망명

7. 외교독립론의 정립

(1) 독립운동 기지가 된 하와이
(2) 무장투쟁론자와의 첫 충돌

8. 제1차 대전과 외교독립론의 실험

(1) 윌슨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 임시대통령 자격으로 외교·홍보활동

9. 상해에서 당한 수난

(1) 무장투쟁론자들로부터의 공격
(2) 좌우합작론자들의 비협조

10. 워싱턴 군축회의와 임시정부

(1) 시험대에 오른 외교독립론
(2) 탄핵으로 잃은 임시대통령직

11. 국제연맹에서 펼친 외교독립론

(1) 임시정부 전권대표로 복귀
(2) 동지이기도 한 아내 프란체스카

12. 임시정부 승인 투쟁

(1) 미국 대통령 설득이 목표
(2) 제2차 대전과 독립의 희망

13. 바뀌기 시작하는 미국의 태도

(1) 한국독립을 도운 미국인들
(2) 미 대통령에 전달된 독립의지

14. 한국독립 약속의 기적

(1) 1943년의 카이로 선언
(2)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

15. 소련과 반드시 협의하려는 미국

(1) 소련의 한반도 개입을 우려
(2) 샌프란시스코 연합국회의로부터 소외

16. 해방 후 소련과 미국의 점령정책

(1) 해방 당시의 이승만
(2) 소련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3) 좌·우파에 중립적인 미군정

17.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

(1) 모스크바 의정서의 파장
(2) 소련에 대한 미국의 헛된 기대

18. 자율적 정부수립으로 방향 전환

(1) 남한 과도정부의 추진
(2) 미군정은 좌우합작 추진
(3) 대한노총 위원장이 된 이승만

19. 대안 제시를 위한 미국 방문

(1)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 건의
(2) 트루먼 선언에 대한 감사
(3) 귀국길에 중국의 장개석 방문

20. 유엔으로 넘긴 한국독립 문제

(1) 다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2) 유엔의 남북한총선거 결의

21. 유엔 결의 실행을 둘러싼 대립

(1) 좌파와 중도파의 선거저지 운동
(2) 총선거를 못하게 될 위험성

22. 남한만의 선거를 허락한 유엔

(1) 남한만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
(2) 평양에 간 남북협상파

23.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국 305

(1) 1948년의 5·10선거
(2) 자유민주주의 제도들의 도입

24. 신생국의 불안한 출범

(1) 건국세력의 분열
(2) 힘들게 받은 유엔의 국가승인

25. 신생국의 취약한 국가기반

(1) 극심한 내부분열
(2) 서두른 농지개혁

26. 미군철수와 안보위기

(1) 1949년의 미군철수
(2) 북한의 오판을 부른 애치슨 발언

27. 6·25전쟁과 호국투쟁

(1) 대한민국 소멸의 위기
(2) 통일의 기회가 된 38선 소멸
(3) 중공군 참전과 통일의 좌절

28. 전쟁 중의 정치적 위기

(1) 국회와 대통령의 충돌
(2) ‘부산 정치파동’과 대통령 직선제

29. 휴전과 한미동맹

(1) 재침략의 위험을 남길 휴전
(2) 동맹확보를 위한 ‘벼랑끝 외교’
(3) 이승만을 달래려는 제네바 정치회의

30. 휴전 후 국가의 안정과 발전

(1) 자유민주주의 제도들의 정착
(2) 미국문명과 기독교의 영향

31. 국민교육과 인재양성

(1) 전쟁으로 높아진 고등교육 열기
(2) 전쟁으로 형성된 전문가 집단

32. 해양문명권 편입에 따르는 진통

(1) 미국과의 군사적·문명적 결합
(2) 1954년의 미국 국빈 방문

33. 시련의 ‘건국 대통령’

(1) 자유당의 인질이 된 이승만
(2) 물러날 때를 놓친 지도자
(3) 4·19혁명 이후의 이승만 지우기

34. 마지막 5년의 하와이 생활

(1) 국내체류를 어렵게 만든 상황
(2) 잊혀져 가는 ‘건국 대통령’

35. 이승만의 유산

(1) 인간적 면모
(2) ‘문명전환’의 시대적 역할

이승만 연보: 독립·건국·호국을 위한 투쟁 일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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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서양사 전공, 1942년생
역사학회·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서울대 사학과 문학 학사 및 석사
하와이대 사학과 역사학 석사
서강대 사학과 문학박사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객원연구원
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살림출판사, 2003)*
미국사(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9)
경험으로 본 서양의 역사(삼지원, 2004) 외 다수

책 속으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양문명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값진 것은 정치적 자유(自由)의 개념이었다고 그는 나중에 회고했다. 그것은 모든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自由主義) 사상, 그리고 인민이 자유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뽑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제도를 의미했다. 그 같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개념은 군주제와 신분제밖에 모르던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그는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선왕국을 미국, 영국과 같은 근대적인 국가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6

박용만과는 달리 이승만은 독립운동이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외교와 홍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외교독립론자(外交獨立論者)였다. 한인들은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은 강대국 미국이 일본을 전쟁에서 패배시킬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군사훈련을 하는 한인들이 미국인들에게 ‘테러리스트’로 비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1822년의 중립법이 미국 안에서 사적인 군사훈련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그 법은 미국 안의 소수민족들이 독립자금을 모으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설사 한인들이 군사력을 갖추게 되어 일본에 대항하게 된다하더라도, 미국과 영국은 일본 편을 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도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pp.107~108

제네바에서 이승만 개인에게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장차 헌신적인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을 만난 것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 근처의 인처스도르프에서 철물 무역과 소다수 공장을 경영하는 중소기업가의 셋째 딸이었다. 그때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제네바로 와서 빈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이승만이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저녁 식사 때 사람들로 붐비고 있던 호텔 드뤼씨 식당이었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던 이승만이 종업원의 안내로 프란체스카 모녀와 합석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 이승만은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의 나이였다.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지만, 며칠 뒤 프란체스카가 제네바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빈에 들르면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모스크바에서 추방된 다음에도 빈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 pp.151~152

중국대표 유어만이 이승만을 돕기 위해 나섰다. 당시 중국의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모택동의 공산당과 내전(內戰) 상태였기 때문에 남한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反共)정부가 들어서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어만은 음력설인 1948년 2월 10일 이승만, 김규, 김규식 세 지도자가 만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끝내 남한만의 선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날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해 남한만의 선거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메논이 뉴욕으로 출발한 지 이틀이 지난 2월 12일에는 하지 중장도 세 지도자가 남한만의 총선거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려고 했다. 그래서 하지는 세 지도자를 자신의 공관으로 초청했다. 그때까지 하지 중장은 남한만의 선거에 줄곧 반대해 왔지만, 1948년 1월 13일 서울에 온 미 국무부의 앨리슨을 이승만과 함께 만난 다음부터는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은 남한만의 총선거에 동의하지 않았다.
--- pp.290~291

이승만의 경축사는 북한 대표들이 건국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으로 시작했다. 북한이 유엔의 총선거 결의를 따랐다면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한 유감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목표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가 어떤 것임을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개인(個人)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그는 대한민국이 미국 등 선진국들의 ‘권리장전’에서 밝힌 자유(自由)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한 자유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이념과 결합된 자유민주주의였다.
둘째,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자유선거(自由選擧) 제도를 통해 공직자를 선출하게 되는 나라였다. 그 때문에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 자기네 나라가 5·10총선거를 통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같은 자유선거는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는 실시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양반계급만을 위하던 조선왕국과는 다르게 될 것이라고 이승만은 강조했다. 왜냐하면 민주적인 제도들을 통해 평민의 자유가 보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양반과 상놈,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이 꼭 같이 대우받는 평등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은 모든 개인이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가지는 나라, 개인의 신분을 존중하는 나라,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나라, 그리고 노동을 우대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pp.323~324

문제는 농지개혁의 방법이었다.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좌익들이 주장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른 분배였다. 그 방법에는 중도파 정당들과 김구의 한독당도 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농지개혁안은 그들의 것과는 달랐다. 이승만도 경자유전의 원칙에서 부재지주와 대지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유재산을 무상으로 국유화해서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는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의 농지개혁에는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농민의 직접경작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 p.338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이승만이 우려하던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잘 훈련된 20만의 북한군은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했다. 북한군은 한국군이 갖지 못한 탱크, 중포, 전투기 같은 공격용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처음에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침이 전면전의 시작인지 아니면 항상 있던 국지전의 하나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이 전면전의 시작이라는 것은 오전 9시나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승만에게 그날 새벽의 남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린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 기습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폴란드보다 더 비참했다. 왜냐하면 공격 당시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동맹 관계였지만, 한국은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p.354

이승만은 한미동맹이 앞으로 한국인들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그 같은 전망은 그가,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우리의 후손들은 이 조약으로 누대(累代)에 걸쳐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고 말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후 한국인들은 이승만의 예상대로 미국의 군사적 보호막 안에서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분쟁에서도 미국을 중재자로 활용함으로써 한국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일이 없게 되었다.
--- p.404

대한민국은 6·25전쟁 직후에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음으로써 중국대륙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문명사(文明史)의 측면에서 그것은 아주 드문 결과를 가져 왔다. 대한민국은 중국의 ‘대륙문명권’에서 벗어나 미국의 ‘해양문명권(海洋文明圈)’으로 옮겨 가는 ‘문명의 전환’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어제의 적국(敵國)인 일본과 같은 해양문명권에 속하게 되는 특이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보조를 맞추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소련,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 자유중국(타이완), 한국 등의 자유주의(自由主義) 국가들을 하나의 지역공동방위체로 통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일동맹의 체결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과거의 일본인들의 지배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도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1949년 1월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 pp.439~440

이승만이 없었다면 남한도 북한에 흡수되어 중국의 ‘대륙문명권’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남한도 집단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체제 밑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양문명권’에서만 나타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체제는 개인(個人)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자유선거(自由選擧)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유지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밑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될 수 있게 된 것은 그것을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키고 지켜낸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한국에서 이승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찬성과 반대의 논쟁은 대한민국을 해양문명권에 남게 하려는 세력과 대륙문명권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세력 사이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본질적으로는 문화전쟁(文化戰爭) 또는 문명전쟁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것은 이 나라를 어떤 문명권(文明圈)에 두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구한말의 갈등과 같은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은 구한말 개화파의 문명개화 전통을 계승한 ‘현대판 개화파’와 그것에 맞서는 ‘현대판 위정척사파’의 대립인 것이다.
--- pp.495~496
 

출판사 리뷰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인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Syngman Rhee, 1875-1960)의 생애를 그가 살았던 시대(時代) 상황에 비추어 서술한 전기(傳記)이다. 필자는 그의 생애에서 우리 국민이 참조해야 할 귀중한 경험(經驗)과 유산(遺産)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조선왕조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는 드물게 90년의 긴 세월을 살면서 1890년대 말의 애국계몽운동,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해방 후의 건국운동, 6·25전쟁 수행, 1950년대의 국가경영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여러 역사적 인물들의 일생을 합친 것만큼 많아 보인다. 게다가 그의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냉전 등 세계현대사의 거대한 사건들과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승만은 조선왕국의 가난한 백성으로 태어나 청년기에 나라까지 잃었던 “불쌍한” 조선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국적 없는 망명객 신분으로 나라를 찾는다며 낯설은 외국 땅을 헤매며 갖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얻은 교훈은 간단했다. 약소민족의 운명은 강대국(强大國)들의 국제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따라서 군사력이 없는 한(韓)민족이 독립을 찾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독립운동은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으로 나타났고, 독립 후의 국가수호 전략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는 한미동맹론(韓美同盟論)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 같은 이승만의 교훈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의 상당수는 민족의 자주성과 통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민족주의(民族主義)와 엘리트에 대항한 민중을 예찬하는 민중주의(民衆主義)의 감정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들이 약소민족의 지도자 이승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명분론(名分論)에서 벗어나 강대국들의 냉혹한 현실정치(現實政治)에 비추어 역사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약소국의 현실을 무시한 채 지도자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다는 당위(當爲)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태도는 삶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추상적인 해석(解釋)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역사해석이 그처럼 비현실적이 되는 것을 우려해 역사학계에는 오래전부터 사용되는 경구(警句)가 있다. 그것은 역사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보라는 말이다. 저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 출신 지역, 신분, 종교, 이념에서 오는 편견 때문에 “있었던 그대로” 써야 한다는 객관성(客觀性)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