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5.대한민국대통령

김영삼(金泳三) 재평가 (2021)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한 문민정부 최장수 장관의 김영삼 평전(評傳)

동방박사님 2023. 6. 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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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영삼 재평가』의 저자 오인환(吳隣煥)은 김영삼과 임기를 함께 한 ‘한국 정치사상 최장수 각료’이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김영삼의 정치 인생을 몇 가지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IMF 금융위기의 역사적 책임론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민주화 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기여도가 높은 민주 인사가 누구였나?”라는 해묵은 궁금증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는 문민정부가 끝난 지 23년, YS가 서거한 지 6년 만에 이 책을 펴내는 이유를 이렇게 썼다. “함박눈이 온천지에 쏟아지고 있는데 빗자루를 들고 앞마당을 쓸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격동의 시대인 만큼 세월이 10년쯤 지난 다음 나서는 것이 적절한 타이밍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빠른 템포가 미덕(美德)인 한국적 현실에서는 걸맞지 않은 발상이었으나, 때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연유로 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 저자는 또 “사실(史實)을 사실(事實)대로 원용하여 김영삼의 발자취와 장단점, 그리고 공과(功過)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서 차분하게 분석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느라 노력했다”고 집필에 즈음한 심경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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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내면서 | 불굴의 민주투사, 23년 만에 재평가를 시도했다 21

[제1부] 사상 첫 트리플 ‘최연소 기록’

1장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뒤집힌 개헌안 38
이승만의 군부(軍部) 분할 통치 / 부정선거로 생애 유일 낙선(落選)
신민당 부총무 시절에 일어난 5·16
2장 연거푸 세운 최연소 기록 49
‘진산(珍山) 파동’ / 윤보선에 반격 가한 유진산
한일협정 비준으로 탄생한 최연소 원내총무 / 탁월한 정치 감각
3장 초산 테러와 3선 개헌 저지 공방 60
박정희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 / 3선 개헌 뒤 ‘팽’ 당한 이후락과 김형욱
공화당 JP파를 포섭해 개헌 저지 시도 / 뒤통수 맞은 신민당
4장 ‘40대 기수론’의 정치학 68
야당에 활력 안긴 40대 기수론 / “박정희의 적수(敵手)는 김영삼이다!”
방심(放心)의 허(虛) 찔려 역전패 당하다 / 좋은 인상 남긴 김영삼의 승복 연설
5장 김대중 도와 지원 유세 80
선동적인 연설로 선거판 달군 DJ / 야당 선거 사상 최대 인파 몰려
재기를 향한 발판, 한국문제연구소 개설
6장 유신(維新) 체제와 ‘김대중 납치사건’ 87
허를 찔린 반(反)유신 세력 / DJ를 거물 정치인으로 만든 세 사람
7장 최연소 당 총재 탄생 93
신상(身上) 발언 통해 선거 분위기 압도 / 당 총재 YS의 달라진 면모(面貌)
8장 타격 받은 김영삼 리더십 99
박정희의 눈물에… / 그는 정말 김영삼을 속인 것일까?
사면초가(四面楚歌)의 YS
9장 이철승에게 빼앗긴 당권(黨權) 109
심판대에 오른 중도 노선 / 야당이 득표율서 여당 이긴 10대 총선
10장 총재직을 되찾다 117
전직 야당 총재 자택마저 압수 수색 / DJ에게 손을 내밀다
강경 투쟁 선언한 총재직 수락 연설

[제2부] 반정부(反政府) 정치인, 대통령이 되다

1장 YS 탄압과 부마(釜馬) 사태 128
인권 문제 놓고 맞선 박정희와 카터 / 총재 제명으로 이어진 YH 여공 사건
총재단 직무 집행 가처분 신청 / YS, 공개적으로 정권 타도 선언
[뉴욕타임스] 인터뷰 기사를 꼬투리로 잡다 / 의정 사상 첫 국회의원 제명
“박정희, 먼지라도 만들어 터는 사람이다.”
2장 김영삼 제명(除名), 박정희 운명(殞命) 139
통치 시스템 깨트린 차지철의 독주(獨走) / 김재규의 잇단 헛발질
‘김영삼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박정희 / 김재규의 진심은 어디에 있었나?
유신 체제 붕괴의 동인(動因)이었던 YS
3장 12·12는 하극상(下剋上)의 군사 반란 150
군부 내 구(舊)·신(新) 대결은 언젠가 터질 화약고
합수부(合搜部)의 우세승으로 결판나다 / 도망치기 바빴던 4성 장군 출신 국방장관
군사 반란을 합법화해준 두 사람
4장 물 건너 간 양김(兩金)의 야권 단일화 161
대권 도전 나선 JP / ‘만년 2인자’를 면할 기회 놓치다
최규하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 구상 / DJ 구속으로 터진 광주 항쟁
군부(軍部)에 대해 무지(無知)했던 정치권
5장 국민의 잠을 깨운 YS 단식(斷食) 172
신군부의 이상한 쿠데타 / ‘민주산악회’ 만들어 평화적 투쟁 시도
광주 항쟁 3주년에 단식 돌입 / 죽은 반달곰은 톱기사, 단식은 1단 기사
민추협의 모태는 민주산악회
6장 예상을 뒤엎은 신당 돌풍 185
민추협 참여 갈등으로 결별한 DJ와 김상현 / ‘이민우 바람’의 희생자가 된 정대철
7장 1000만 개헌 투쟁 주도하다 194
DJ의 느닷없는 대선 불출마 선언 / ‘삼양동 할아버지’ 이민우의 변심(變心)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 YS의 신당 창당
상도동이 먼저 터트릴 뻔한 ‘박종철 사건’ / ‘6·29 선언’ 이끌어낸 6월 봉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넥타이 부대’ / 전두환 기획, 노태우 연출의 정치 드라마
독배(毒杯)가 된 양김(兩金) 출마 / 평화민주당 창당한 DJ / “내가 평생 처음 야당 당수한다!”
치밀했던 전두환의 ‘4자 필승 전략’
8장 YS, 제2야당으로 밀려나다 217
DJ의 합당 약속을 믿다 / 황병태 스카우트로 당내 반발 직면한 YS
은퇴 선언서 발표한 뒤 설악산으로 / 김광일, 노무현 두 변호사 영입
거물급 신인의 맹추격에 발 묶인 YS /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노무현 / 황금 분할 아닌 망국 분할
첫 소련 방문으로 북방 외교 길 터
9장 3당 합당 선언과 민주화 운동 232
신현확이 3당 합당 권유 / 김영삼은 ‘큰 돌’, 최형우는 ‘작은 돌’
동지애조차 없던 ‘한 지붕 세 가족’ / 외톨이 신세의 박철언과 내각제 각서 파동
잇단 정치 공작에 반발한 민주계 / 노태우, 김종필, 박태준의 생존법 차이
YS 특유의 정면 돌파 방식 / 경선(競選) 트라우마의 김영삼, 후보 추대 원해
노심(盧心) 앞세워 YS 견제 /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10장 대통령과 대선 후보의 불협화음(不協和音) 258
탈당 선언으로 YS에 타격 준 노태우 /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 탈당 도미노
몰래 정주영 지원했다가 찍힌 박태준 / “한국병(病) 고쳐 신(新)한국 건설하자!”
지지 세력 결집시킨 ‘부산 복집 사건’ / “반정부 인사가 대통령이 되다!”

[제3부] ‘민주화의 완성’을 향하여

1장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274
군부 독재가 하나회를 키웠다 / 법치주의에 반했던 소급 입법
돈 안드는 선거제도 정착, 역사적 업적 / 참패로 막 내린 지자체 선거
2장 금융실명제를 뿌리내리다 292
역대 정권이 손대지 못했던 ‘괴물’ / 철통 보안으로 아들도 눈치채지 못해
한 달 만에 반대로 돌아선 지지 여론 / ‘정보화 시대 선언’과 금융실명제
YS 때 부동산 투기 열풍 없었다
3장 김영삼과 이회창의 애증극(愛憎劇) 303
대쪽 이미지의 이회창 / 국무총리가 명목상 2인자가 된 이유
해임(解任)인가 사임(辭任)인가? / 진한 아쉬움 남긴 두 사람의 결별
4장 새로운 ‘코리안 드림’을 찾아라! 316
왜 재벌 개혁 이루지 못했나? / 사법 개혁 물꼬를 튼 것만도 큰 업적
OECD 가입은 길게 봤을 때 ‘잘한 일’ / 힘과 추진력이 딸린 세계화 추진
5장 개혁 동력 소진시킨 대형 인재(人災)들 328
DJ에게 정계 복귀 찬스 제공 / ‘YS의 불운(不運)’이랄 수밖에…
6장 외교의 지평을 넓히다 334
결혼 비화도 털어놓은 힐러리 클린턴 /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
북한에 뒤통수 맞고 실망한 YS

[제4부] 우여곡절, 파란만장의 남북 관계

1장 이인모 북송하자 뒤통수 친 북한 342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 / NSC(통일안보조정회의)를 신설하다
2장 영변 폭격 계획 저지시킨 YS 347
클린턴은 YS의 대북 정책을 불신 / 북의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고전(苦戰)하다
미국에 ‘No’라고 말한 한국 대통령
3장 무산된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 355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김일성 / 노벨평화상 수상 가능성도 있었건만…
4장 주체사상 설계자 황장엽의 망명 361
대로(大怒)한 김정일, “시체라도 끌고 오라!” / 필리핀 거쳐 전세기 편으로 서울 도착
5장 북핵 문제로 불거진 미국과의 불협화음 367
미 대통령에 직통 전화, 마찰의 원인? / 북한 반발 물리치고 한국형 경수로(輕水爐) 밀어붙여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공식 출범
6장 클린턴의 제주도 깜짝 방문과 4자 회담 374
잠수정 침투 사건으로 북한 첫 공식 사과 / 재선(再選) 염려해 한국 기피한 클린턴
7장 완전히 빗나간 ‘북한 조기 붕괴론’ 380
북의 이중적 태도는 동족애(同族愛)에 대한 배신 / 여론의 추이에 따라 변한 대북 정책

[제5부] 거산(巨山) 김영삼, 소산(小山) 김현철

1장 「동숭동 프로젝트」 388
수학적 재능 가졌던 박정희 / 몸싸움에는 익숙했으나…
김현철의 비선(秘線) 조직에 대한 비난
2장 ‘소통령(小統領)’으로 불리다 396
YS 지시로 설립한 민주사회연구소 / 권력 핵심에 들어선 ‘K2 라인’
반(反) YS 세력이 만든 희생양(犧牲羊)? / 두 차례 국회의원 출마 시도한 김현철
자신과 닮은 둘째 아들 편애하다 / YS를 아버지보다 존경한 정무수석 이원종
김광일 비서실장 등장과 궁정 권력 투쟁 / 베일 속의 인물 김윤도 변호사
3장 ‘신(新) 3김 시대’ 416
정계 은퇴했다가 슬그머니 복귀한 DJ / 이회창의 정계 데뷔 / 기병(騎兵)대장 역할을 하다
YS와의 애증(愛憎) 2막 열리다 / DJ와 JP를 압도한 흥행거리 / 박정희의 용인술에서 영향받다
이인제를 대안(代案)으로 제시 / 경선 승리 뒤처리 미숙했던 이회창
선거판 구도 바꾼 아들 병역 의혹 / “이인제의 출마를 막아 달라!”
‘김대중 비자금’을 폭로하다 / 필사적인 대응 나선 DJ 진영 / ‘03 인형’을 몽둥이로 내리치고…
이회창의 진짜 패인(敗因)은? / 극명하게 대비된 DJ 캠프와 이회창 캠프
JP는 어떻게 ‘트로이의 목마’가 됐을까? / 좌파 세력 교두보 된 DJ의 ‘지역 등권론’
지역 대결은 조선왕조 당쟁(黨爭)에 그 뿌리가…
4장 DJ 타계(他界)로 막 내린 ‘30년 극적 드라마’ 457
진심으로 손잡을 첫 기회 맞은 YS와 DJ / 소선거구제 받아들인 YS, 제2야당으로 전락
3당 합당 뒤에도 필요하면 공조한 양김(兩金) / “대통령의 하야(下野)는 원치 않는다.”
DJ 급소 찌른 YS의 독설(毒舌) / 민주화 투쟁의 ‘쌍끌이’ 지도자
5장 YS 특유의 현장 중심주의 474
23일의 단식 투쟁 / 공리공론(空理空論) 배척하고 속전속결(速戰速決)

[제6부] 소용돌이 몰아친 정치판

1장 박정희에게 배운 1인자 리더십 480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 양김(兩金) / 2인자를 키우지 않았다
‘정치 9단’은 민주화 투쟁의 훈장(勳章)? / ‘민주화의 심벌’ DJ의 비민주적 정치 공작
각료는 동지 아닌 장기판의 졸(卒)
2장 박정희의 실용주의적 리더십 490
유방(劉邦) 스타일이 맞았을 YS / 안기부장의 정보 보고를 귓등으로 흘려
성공적이었던 이원종 정무수석 발탁 / 신임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의 권력 투쟁
3장 김영삼 ‘민주화 리더십’의 재조명 499
YS와 DJ의 민주화 공로는 반반(半半)? /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DJ의 접근 방식
4장 한류(韓流)의 공로자 YS 506
후임 정권이 가로챈 정보화 관련 업적 / 휴대폰 왕국의 길을 트다
5장 아들 구속하라고 검찰을 압박하다 514
별건(別件) 수사로 체면치레한 검찰 / DJ도 세 아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6장 잦은 개각(改閣), 한국의 역사적 전통인가? 519
차가운 정치 현실이 안겨준 시행착오 / 고위직 라이프 사이클이 짧은 건 민족적 DNA
잦은 개각이 던지는 정치적 함의(含意)

[제7부] 세계 최강 노조(勞組)와 문민정부

1장 복수(複數) 노총 시대의 개막 528
“노조 지도부가 빨갱이다. 일망타진해야 한다!” / 긴 잠에 빠져든 노동계
‘노동자는 용감, 기업가는 무대책, 정부는 무책임’ / 노동법 파동이 준 역사의 교훈
2장 ‘신(新) 경제’ 계획의 허(虛)와 실(實) 538
구호는 ‘신(新)경제’, 실제는 ‘구(舊)경제’? /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재정경제원

[제8부] IMF, 국가적 재앙의 시작과 끝

1장 위기의 시작 546
「부도유예 협약」이라는 정치적 절충안 / 외채(外債)와 리볼빙(Revolving) 제도
경제부총리의 ‘펀더멘털 튼튼론(論)’ / “한국을 탈출하라, 즉시”(Get out of Korea, right now)
2장 서울에 온 미셸 캉드쉬 IMF 총재 557
IMF 책임론에 대한 언론 플레이 / 법원의 무죄 판결 이끈 ‘김영삼 증언’
3장 IMF 사태는 ‘미국의 한국 길들이기’였나? 564
종금(綜金)은 ‘트로이의 목마(木馬)’ / ‘통한의 한수(恨手)’가 된 클린턴의 외면
4장 IMF 위기의 큰 변수는 대통령 선거 571
국제 신인도(信認度) 회복 날려버린 DJ / 후유증 계속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대량 해고와 동의어가 된 IMF
5장 대기업 도산(倒産)을 막아준 대마불사(大馬不死) 정책 576
경제정책 놓고 대통령과 부총리가 대결? / 저유가, 저환율, 저금리의 ‘3저(低) 호황’
국민의 다이내믹한 애국심으로 IMF 조기(早期) 극복

[제9부] “아시아에 이런 대통령도 있다니…”

1장 여백(餘白)의 정치학 584
경제 과목 과외수업 받은 YS / “YS가 머리는 안 좋아도 덕망이 있다.”
‘의리(義理)의 정치’에서 나온 상도동 결속력
2장 독단(獨斷)의 뿌리는 민주화 투쟁 593
“나는 한 푼의 정치 자금도 받지 않겠다.” / 키가 작은 게 콤플렉스였던 YS
YS, 등산에 이어 조깅 유행에도 앞장서 / 유명했던 아버지 어장(漁場) 멸치 선물
3장 ‘정치의 민주화’ 다음은 ‘풍자(諷刺)의 민주화’ 600
덕장(德將)에서 용장(勇將)으로 변하다 / YS를 ‘아니키(=형님)’라 부른 일본 총리
권력과 명예를 얻는 데 만족한 정치인
 

저자 소개

저 : 오인환 (吳隣煥)
 
1939년생으로 서울 출신. 경기고, 한국외국어대학 졸업(1964년), 파리대학 연수(1978년). 한국일보사 입사(1964년) 후 사회부장(1983년), 정치부장(1986년), 부국장, 국(局)차장(1987년), 편집국장(1988년), 주필(1990년) 역임. 김영삼 민자당 대표 정치특보(1992년), 문민정부 공보처 장관(1993~1998년). 이후 저작 활동을 펴고 있음. 저서에 『파리의 지붕 밑』(...

출판사 리뷰

김영삼(金泳三) 일대기를 다룬 본격 평전(評傳)

1993년 2월25일, 제14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김영삼은 취임사에서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면서 문민시대 개막을 선언했다. 평생을 ‘정치인’이라는 직업 하나로 일관한 김영삼이 그 천직(天職)의 최고위에 등극한 순간이었다.

그는 1954년 약관 26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이래, 지금까지 깨어지지 않는 ‘트리플 최연소 기록’을 수립했다. 1965년에는 37세로 의정 사상 최연소 제1야당 원내총무, 1974년에는 46세 나이로 당 총재가 된 것이 바로 그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불멸의 기록이다.

참고로 김영삼이 당 총재에 오를 때까지 한국 야당에서는 60대가 되어야 그 자리에 앉는 게 상식이자 관례였다. 신익희 61, 조병옥 62, 장면 60, 박순천 66, 윤보선 66, 유진오 63, 유진산이 66세에 각각 당 총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화려한 정치 커리어를 쌓은 끝에 마침내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다시는 정치적 밤이 없을 것이다”는 말로 취임사를 마무리했다.

금융실명제와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폭등’

『김영삼 재평가』(612쪽, 2만원, 조갑제닷컴)의 저자 오인환(吳隣煥)은 김삼과 임기를 함께 한 ‘한국 정치사상 최장수 각료’이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김영삼의 정치 인생을 몇 가지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IMF 금융위기의 역사적 책임론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민주화 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기여도가 높은 민주 인사가 누구였나?”라는 해묵은 궁금증에 관한 것이었다. 이어서 김영삼이 시행한 금융실명제가 헌정사상 이승만(李承晩)의 토지개혁에 이어 가장 성공한 개혁의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중 금융실명제는 모든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으로 저자는 분석한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점진적으로 연쇄적 파급효과를 냈고, 전산화(電算化) 시스템이 발전하는 것과 맞물려 국민의 모든 금융 거래와 부동산 거래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즈음 문재인 정권의 최대 실정(失政)으로 꼽히는 부동산 가격 폭등과 연관된 화제 하나를 소개해보자. 즉 YS가 단행한 금융실명제에서 등장하는 부동산실명제와 역대 정권의 ‘땅값’ 통계이다. 저자는 1953년부터 2007년까지 54년 동안 한국의 지가(地價) 총액이 1만 배 넘게 폭등하여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정권 별로 보면 박정희 집권 기간에 55%로 가장 많이 올랐고, 이승만 14.7%, 전두환과 노태우 시절 7~8% 수준이었다. 그런 반면 김영삼 정권은 지가(地價) 앙등과 무관했다.” 이 또한 YS에 의한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값, 땅값 폭등으로 온 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현재의 문재인 정권은?

‘YS의 불운(不運)’과 ‘사고 공화국’이란 오명(汚名)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 달(3월)에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노선 침하 사고로 전복, 78명이 죽고 198명이 부상했다. 6월에는 경기도 연천의 예비군 훈련장에서 장약통과 폭발물이 부주의로 터지는 바람에 현역병과 예비군 병사 19명이 폭사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7월에는 아시아나 항공기가 전남 해남군 산속에 추락, 승객 68명이 사망했다. 10월에는 전북 부안 앞바다에서 여객선 서해페리호가 침몰, 무려 273명이 익사하는 대형 해난사고가 났다. 또 이듬해 10월의 성수대교 붕괴로 32명의 사망자가 나오더니, 그 이듬해인 1995년 6월에는 서울 강남의 삼풍백화점 5층 건물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아 쇼핑객과 직원을 포함하여 501명이 매몰돼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문민정부 중반기에만 모두 14개의 대형사고가 잇달면서 1천400여 명의 희생자를 기록, ‘사고 공화국’이란 오명을 남겼다. YS 시대에만 유난히 약속이나 한 듯 집중적으로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므로 한마디로 그것은 ‘YS의 불운(不運)’이었다. 이런 촌평(寸評)이 뒤따랐다. “YS는 참으로 운이 없는 대통령이다. 집권 이후 대형사고 때문에 8번이나 대(對)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헌정사상 그런 전례가 없었다. 물론 후에도 없었다.”

민주화 투쟁의 쌍끌이 지도자, YS와 DJ

YS와 DJ는 서로 한참 결(結)이 달랐다. YS는 현장주의, 라이벌인 DJ는 치밀한 계산을 앞세운 신중 노선으로 대조적이었다. 한국 현대사가 상황이 불안정하고 급변하기 쉬운 난세(亂世=격변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가 쉽지 않은 심사숙고형인 DJ의 신중 노선보다, 순발력(=결정력)과 돌파력(=추진력)이 뛰어난 YS의 현장 중심 노선이 성과를 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실제로 YS의 민주화 투쟁 업적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고, 먼저 집권에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YS가 큰 승부에 강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결정적인 순간 몇 수 앞을 바라보는 뛰어난 동물적 감각에다 직관력과 예지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YS의 현장주의는 그의 실용주의적 정치 철학에서 나왔다. 그는 비현실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배척해왔고,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는 실용주의자였다.

바닷가 출신인 그는 거친 기질, 배짱과 용기로 수많은 위기에 대처해왔다. 순발력이 뛰어나 판단이나 결정, 행동이 빨랐다. 한번 결심이 서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나가니까 매사 템포가 빠르기 마련인 난세에서 성과를 쟁취할 기회가 많았다. “DJ의 인내와 집념, 끈기를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는 YS, “YS의 용기와 포용력을 높이 산다”고 했다는 DJ…. 두 라이벌이 내린 상대 평가를 한번 곰곰 음미해볼 만하다.

소급(遡及) 입법의 공과(功過)

헌정사상 소급 입법의 첫 사례는 민주당 장면(張勉) 정권이었다.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를 엄벌해야 한다는 성난 여론이 소급 입법을 압박했다. 하지만 장면은 “소급 입법은 나치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도 하지 않았다”면서 형사 불소급의 원칙을 내세워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랬지만 악화된 여론의 중압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처벌이 가능하게끔 헌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구파의 소장파 의원이던 김영삼은 “그때 장면 정권은 소급 입법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논평을 남겼다.

그랬는데 30여 년이 지난 뒤, 자신도 성난 여론에 밀려 역사상 두 번째 소급 입법을 하는 당사자가 되고 말았다. 기연(奇緣)이었다. 문민정부는 12·12에 대한 공소 시효를 정지시켜 군사 반란, 내란죄로 처벌할 수 있게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 입법했고, 그에 따라 검찰 수사가 진행되었다. 이로써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판례를 얻어 군의 정치 개입을 원천적으로 막는 차단막을 칠 수 있었다는데….

YS의 정치 인생이 곧 한국의 야당사(野黨史)

저자는 문민정부가 끝난 지 23년, YS가 서거한 지 6년 만에 이 책을 펴내는 이유를 이렇게 썼다. “함박눈이 온천지에 쏟아지고 있는데 빗자루를 들고 앞마당을 쓸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격동의 시대인 만큼 세월이 10년쯤 지난 다음 나서는 것이 적절한 타이밍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빠른 템포가 미덕(美德)인 한국적 현실에서는 걸맞지 않은 발상이었으나, 때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연유로 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

저자는 또 “사실(史實)을 사실(事實)대로 원용하여 김영삼의 발자취와 장단점, 그리고 공과(功過)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서 차분하게 분석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느라 노력했다”고 집필에 즈음한 심경을 밝혔다.

YS의 정치 인생이 곧 한국의 야당사(野黨史)이자 현대사(現代史)였던 만큼, 정적(政敵)이나 경쟁자들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데 있어서도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의 이력과 연관된 토픽 한 가지, YS 정권의 평균 장관 재임 기간은 13.3개월이었다고 한다. DJ 정권은 취임 43시간 만에 옷을 벗은 초단명(超短命) 장관을 포함, 평균 11개월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는 각각 18.5개월과 13.3개월로 민주화 정권들보다 다소 길었다.

조선왕조에서는 고위직의 임기가 짧았던 역사적 전통이 있었다. 세종 때 23년간 정승 자리에 있었던 황희(黃喜)와 같은 몇몇 사례를 빼면, 대동소이했다. 태조에서 연산군까지의 초기에는 대사간(大司諫)이 해마다 서너 번씩 교체되었다. 대원군 집정기(執政期)에는 10년 사이에 183번이나 바뀌었다. 대사헌(大司憲)도 193번 교체되었다. 서울시장 격인 한성 판윤 자리는 조선왕조 518년 동안 1천375번이나 바뀌었다. 이 책의 저자 오인환은 공보처장관으로 ‘문민 대통령 YS’와 임기를 함께 했다. 이 또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