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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 이동진 영화 평론집 (2019)

동방박사님 2023. 12. 17.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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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처음 한 번은 극장 안에서, 그다음 한 번은 극장 밖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지난 20년간 평론을 모은 책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가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되었다. 1999년 개봉한 「벨벳 골드마인」부터 2019년 개봉한 「기생충」까지, 지난 20년간 발표해온 평론과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쓴 평론을 합해 총 208편을 모아 엮었다. 2019년부터 1999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세 가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①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20년, ② 영화계의 20년, 그리고 ③ 관객 저마다의 20년. 그야말로 21세기 영화계의 첫 20년이 총결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각자의 인생을, 또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말하는 세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된다.

목차

1. 「기생충」 봉준호
2.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3. 「언브레이커블」 M. 나이트 샤말란
「23 아이덴티티」 M. 나이트 샤말란
「글래스」 M. 나이트 샤말란
4. 「버닝」 이창동
5.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6. 「팬텀 스레드」 폴 토머스 앤더슨
7. 「더 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8.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기예르모 델 토로
9. 「코코」 리 언크리치
10. 「1987」 장준환
11. 「신과함께-죄와 벌」 김용화
12. 「강철비」 양우석
13. 「세 번째 살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14.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일디코 에네디
15.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밸러리 패리스, 조너선 데이턴
16.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마이클 알메레이다
17. 「마더!」 대런 애러노프스키
18. 「어 퍼펙트 데이」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19. 「몬스터 콜」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20.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정윤석
21. 「혹성탈출: 종의 전쟁」 맷 리브스
22. 「레이디 맥베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23. 「덩케르크」 크리스토퍼 놀런
24. 「옥자」 봉준호
25. 「엘르」 폴 버호벤
26. 「네루다」 파블로 라라인
27. 「목소리의 형태」 야마다 나오코
28.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 제임스 건
29. 「파운더」 존 리 행콕
30. 「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31. 「토니 에드만」 마렌 아데
32.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33.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케네스 로너건
34. 「컨택트」 드니 빌뇌브
35. 「녹터널 애니멀스」 톰 포드
36. 「너의 이름은.」 신카이 마코토
37. 「라라랜드」 데이미언 셔젤
38.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홍상수
39. 「로스트 인 더스트」 데이비드 매켄지
40. 「닥터 스트레인지」 스콧 데릭슨
41.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42. 「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 뢰베
43. 「밀정」 김지운
44. 「최악의 하루」 김종관
45. 「히치콕 트뤼포」 켄트 존스
46. 「태풍이 지나가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47. 「부산행」 연상호
48. 「우리들」 윤가은
49. 「본 투 비 블루」 로버트 뷔드로
50. 「아가씨」 박찬욱
51. 「곡성」 나홍진
52.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조 루소, 앤서니 루소
53. 「아노말리사」 찰리 코프먼, 듀크 존슨
54.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55.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매슈 본
56. 「나를 찾아줘」 데이비드 핀처
57. 「자유의 언덕」 홍상수
58. 「그레이트 뷰티」 파올로 소렌티노
59. 「그녀」 스파이크 존즈
60.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61. 「사이비」 연상호
62. 「스토커」 박찬욱
63. 「안티크라이스트」 라스 폰 트리에
64. 「아이 엠 러브」 루카 과다니노
65. 「불청객」 이응일
66. 「옥희의 영화」 홍상수
67.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장철수
68.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
69.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런
70. 「하얀 리본」 미하엘 하네케
71. 「포화속으로」 이재한
72. 「시」 이창동
73. 「클래스」 로랑 캉테
74. 「시리어스 맨」 이선 코언, 조엘 코언
75. 「경계도시 2」 홍형숙
76. 「예언자」 자크 오디아르
77. 「인 디 에어」 제이슨 라이트먼
78.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클린트 이스트우드
79. 「꼬마 니콜라」 로랑 티라르
80. 「500일의 썸머」 마크 웨브
81. 「더 로드」 존 힐코트
82. 「아바타」 제임스 캐머런
83. 「더 문」 덩컨 존스
84. 「바람」 이성한
85. 「브로큰 임브레이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86. 「2012」 롤란트 에머리히
87. 「여행자」 우니 르콩트
88.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쿠엔틴 타란티노
89. 「파주」 박찬옥
90. 「호우시절」 허진호
91. 「나무없는 산」 김소영
92. 「디스 이즈 잉글랜드」 셰인 메도스
93. 「불신지옥」 이용주
94. 「업」 피트 닥터(Pete Docter), 밥 피터슨
95.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마이클 베이
96.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97. 「드래그 미 투 헬」 샘 레이미
98. 「로나의 침묵」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99. 「마더」 봉준호
100.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
101. 「박쥐」 박찬욱
102. 「똥파리」 양익준
103.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티븐 달드리
104. 「번 애프터 리딩」 이선 코언, 조엘 코언
105. 「그랜 토리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106. 「도쿄 소나타」 구로사와 기요시
107. 「레볼루셔너리 로드」 샘 멘데스
108. 「다우트」 존 패트릭 셰인리
109.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비드 핀처
110. 「낮술」 노영석
111. 「24 시티」 지아장커
112. 「비 카인드 리와인드」 미셸 공드리
113. 「이스턴 프라미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114.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타셈 싱
115. 「로큰롤 인생」 스티븐 워커
116. 「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폴만
117. 「렛 미 인」 토마스 알프레드손
118. 「미쓰 홍당무」 이경미
119. 「사과」 강이관
120. 「고고 70」 최호
121. 「멋진 하루」 이윤기
122. 「다크 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런
123. 「님은 먼 곳에」 이준익
124. 「아임 낫 데어」 토드 헤인스
125. 「밴드 비지트-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 에란 콜리린
126.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토머스 앤더슨
12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선 코언, 조엘 코언
128. 「미스트」 프랭크 대러본트
129.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임순례
130. 「아메리칸 갱스터」 리들리 스콧
131. 「마이클 클레이튼」 토니 길로이
132. 「파라노이드 파크」 거스 밴 샌트
133. 「베오울프」 로버트 저메키스
134. 「데드 걸」 카렌 몬크리프
135. 「색, 계」 리안
136. 「M」 이명세
137. 「행복」 허진호
138. 「원스」 존 카니
139. 「본 얼티메이텀」 폴 그린그래스
140. 「데쓰 프루프」 쿠엔틴 타란티노
141. 「마이 파더」 황동혁
142. 「미스터 브룩스」 브루스 A. 에번스
143. 「조디악」 데이비드 핀처
144. 「기담」 정범식, 정식
145. 「디워」 심형래
146. 「라따뚜이」 브래드 버드
147. 「화려한 휴가」 김지훈
148. 「레이디 채털리」 파스칼 페랑
149. 「디센트」 닐 마셜
150. 「익사일」 두기봉
151. 「트랜스포머」 마이클 베이
152. 「뜨거운 녀석들」 에드거 라이트
153. 「스틸 라이프」 지아장커
154. 「시간을 달리는 소녀」 호소다 마모루
155. 「팩토리 걸」 조지 하이켄루퍼
156. 「밀양」 이창동
157. 「내일의 기억」 쓰쓰미 유키히코
158. 「날아라 허동구」 박규태
159.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김태식
160. 「굿 셰퍼드」 로버트 드니로
161. 「천년학」 임권택
162. 「타인의 삶」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163. 「라디오 스타」 이준익
164. 「타짜」 최동훈
165. 「해변의 여인」 홍상수
166. 「괴물」 봉준호
167. 「짝패」 류승완
168. 「가족의 탄생」 김태용
169. 「미션 임파서블 3」 J.J. 에이브럼스
170. 「사생결단」 최호
171. 「피터팬의 공식」 조창호
172. 「뮌헨」 스티븐 스필버그
173. 「메종 드 히미코」 이누도 잇신
174. 「킹콩」 피터 잭슨
175.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176. 「사랑해, 말순씨」 박흥식
177. 「사랑니」 정지우
178. 「형사 Duelist」 이명세
179. 「극장전」 홍상수
180. 「아는 여자」 장진
181. 「트로이」 볼프강 페터젠
182. 「송환」 김동원
183. 「빅 피쉬」 팀 버튼
184. 「친구」 곽경택
「품행제로」 조근식
「말죽거리 잔혹사」 유하
185.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피터 잭슨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피터 잭슨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피터 잭슨
186. 「올드보이」 박찬욱
187. 「목격자」 대니얼 앨그란트
188. 「황산벌」 이준익
189. 「바람난 가족」 임상수
190. 「브루스 올마이티」 톰 셰디악
191. 「밀레니엄 맘보」 허우샤오셴
192. 「살인의 추억」 봉준호
193. 「질투는 나의 힘」 박찬옥
194.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195. 「태양의 눈물」 앙투안 퓨쿠아
196. 「엠퍼러스 클럽」 마이클 호프먼
197. 「갱스 오브 뉴욕」 마틴 스콜세지
198. 「검은 물 밑에서」 나카타 히데오
199. 「죽어도 좋아」 박진표
200.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1. 「와이키키 브라더스」 임순례
202. 「소름」 윤종찬
203. 「순애보」 이재용
204.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류승완
205.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206. 「라이브 플래쉬」 페드로 알모도바르
207.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에밀 쿠스투리차
208. 「벨벳 골드마인」 토드 헤인스

저자 소개 

저 : 이동진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 자체가 복이었는지 혹은 액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일을 지난 20여 년간 한국에서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내가 디디고 선 땅 위에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내가 호흡하는 공기를 다룬 영화들이 서서히 끓기 시작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코앞에서 목도하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영화들처럼 나의 세계도 정점에...

책 속으로

영화가 멈춘 그 발코니의 자리에 서서 이제부터 관객은 곰곰이 생각에 잠길 것이다.
--- p.67, 「아사코」 중에서

인물들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격랑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지 않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종결법은 그 자체로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 각자의 마음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되게 하려는 제언처럼 여겨진다. 단 하나의 정답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영화는 이렇다.
--- p.155, 「세 번째 살인」 중에서

그러니까, 들은 자는 말해야 한다. 말해야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 이야기가 생명을 갖는 것은 오직 이야기될 때뿐이다.
--- p.187, 「몬스터 콜」 중에서

여기서 기억은 결국 불쑥불쑥 틈입해 들어오는 경험의 편린이 아니다. 부서지고 쪼개지는 망각에 힘을 다해 맞서는 저항의 결실이다. 이 이야기에서 갈라지는 것들은 파괴력을 가졌지만 이어지는 것들은 치유력을 지녔다. 이름을 묻고 또 물으며 잊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쓴 흔적이 결국 매듭이 되어 둘을 연결하고 비극의 구멍을 메운다. 이 영화에 담긴 감동의 태반(太半)은 안간힘이다.
--- pp.278~279, 「너의 이름은.」 중에서

그러니까 삶의 모든 시절에는 그 시절만의 치열한 문제가 있다. 세월이 흐른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저 문제가 달라질 뿐이다. 그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아무리 절실하고 간절해도 아이들은, 그들은, 우리들은, 자꾸 미끄러진다. 다만 「우리들」은 손톱 끝에 겨우 남은 봉숭아 꽃물을 바라보며,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다짐하고 있을 뿐이다.
--- p.329, 「우리들」 중에서

‘오직 그대만이’라는 고유성은 결국 세월 속에서 ‘다른 누구라도’라는 익명성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마는 것일까. 아픔을 남기며 끝났다고 해서 그 경험 전체가 부정되어야 하는 걸까. 「아노말리사」에서 유일하게 마이클의 시점을 벗어난 종반부 리사의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곱씹어보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p.348~349, 「아노말리사」 중에서

수많은 영화들이 마음의 궤적과 파장을 스크린에 담아내기 위해 애쓴다. 새로 찾아온 감정이 삶의 행로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전까지 누적된 기나긴 시간 전체와 겨뤄서 이겨야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영화들은 순간이 세월을 삼키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가정하고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루카 과다니노의 「아이 엠 러브」는 그 순간의 에너지와 방향성을 창의적이고도 폭발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 묘사함으로써 관객을 납득시킨다. 이 영화의 숏과 신은 종종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이 고전적이고 우아하면서 야단스러울 정도로 감각적인 영화를 보면서 무시로 일렁거렸던 내 마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 pp.406~407, 「아이 엠 러브」 중에서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 나면 당신은 새삼 이 영화 주인공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나의 계절이 끝난다고 시간까지 멈추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계절에는 그 계절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계절은 흘러간다. 그렇게 흐르는 계절을 따라 사랑도 삶도 끊임없이 흘러간다. 어쩌면 계절이나 사랑 혹은 삶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흐름 자체인지도 모른다.
--- pp.481~482, 「500일의 썸머」 중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러티브를 격렬하게 뒤흔드는 대신 조용히 마음의 골짜기를 판다. 이 영화의 대사는 거의 대부분 간접 화법으로 에둘러 가지만, 어김없이 과녁에 적중한다. 인물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모든 대사들은 언제나 들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한다. (미소를 지으면서 상대의 아픈 구석을 매섭게 찌르는 말들이 종종 비수처럼 느껴진다.)

여기서는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프레임 밖에 있다. 흔하디흔한 플래시백 한 번 쓰지 않지만, 오래전에 이야기 밖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삶 전체를 덮는 진원이 되어 세월을 넘어도 쇠하지 않는 흔들림으로 끊임없이 반복 회귀한다. 어떤 사건은 영원한 여진으로 남는다.
--- pp.535~536, 「걸어도 걸어도」 중에서

그리고 노래가 멈추고 여자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 관객은 깨닫는다. 설령 영화에서 구원의 사다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어떤 영화는 깊은 우물 같은 위로를 건넨다는 것을. 극 중에서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는 드라마틱한 굴곡이 없다. 영화 속에서 남자나 여자가 혼자 노래하는 순간의 쓸쓸함은 둘이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도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노래할 때 빈 하늘을 외로이 떠돌았던 영혼들은, 둘이 함께 노래할 때 지친 나래를 접고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음표 위에서 잠시 쉰다. 그걸로 족하다. 그게 이 생에 허락된 휴식이라면.
--- pp.682~683, 「원스」 중에서

「타인의 삶」의 동력은 시선의 감응력이다. 한 사람을 세심하게 지켜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을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 언뜻 도청 전문가의 딜레마를 다룬 프랜시스 코폴라의 「컨버세이션」과 비슷해 보이는 이 영화는 사실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Krotki film o milosci)」이나 폴 슬레탄느의 「정크 메일(Budbringeren)」 같은 작품에 맥이 닿아 있다.

이 영화는 타인의 삶이 내 삶의 일부로 삼투되어 오는 순간에 번지는 휴머니즘의 기운을 따스하게 포착한다. 공감할 때 바뀌는 것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다. 공감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상태에 이입하기 위해서 기꺼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태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극 중 철저한 악인으로 묘사되는 헴프 장관(토마스 티메)이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아”라고 외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pp.759~760, 「타인의 삶」 중에서

성장은 이루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노력의 보상이라기보다는 고통의 대가에 더 가까울 성장은 폭압적인 시간의 속성을 반복적으로 학습시킨 끝에 불현듯 찾아온다. 많은 성장영화가 성장을 거부하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p.785~786, 「피터팬의 공식」 중에서

「브루스 올마이티」엔 이 온화하고 속 깊은 코미디의 수준을 짐작케 하는 장면이 나온다. 브루스가 처음 찾아갔을 때 작업복을 입은 신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온갖 소동 끝에 다시 신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도 브루스는 약속대로 신과 함께 나란히 서서 청소를 한다. 남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란 사실 뭔가를 만들어내고 강제할 수 있는 앞자리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뒤치다꺼리하고 세상의 오점을 닦아내는 뒷자리일 게다. 심지어 하나님도 대걸레를 들고 직접 바닥을 닦으신다는데.
--- p.859, 「브루스 올마이티」 중에서
 

출판사 리뷰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처음 한 번은 극장 안에서, 그다음 한 번은 극장 밖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지난 20년간 평론을 모은 책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가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되었다. 1999년 개봉한 「벨벳 골드마인」부터 2019년 개봉한 「기생충」까지, 지난 20년간 발표해온 평론과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쓴 평론을 합해 총 208편을 모아 엮었다. 2019년부터 1999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세 가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①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20년, ② 영화계의 20년, 그리고 ③ 관객 저마다의 20년. 그야말로 21세기 영화계의 첫 20년이 총결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각자의 인생을, 또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말하는 세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된다.

20년 시간의 결을 담은 대작 영화평론집 드디어 출간!

214편의 영화를 다룬 208편의 평론, ‘찾아보기’에 정리한 영화명과 영화인명만 모두 1,700여 개, 그리고 총 페이지 수 944쪽. 오랜 시간 성실하고 탁월하게 활동해온 이동진 평론가의 기록이자,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가 갖고 있는 숫자의 무게이다. 지난 20년의 시간이 켜켜이 담겨 있는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은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와 함께 걸어온 21세기 초반부를 동행하게 될 것이다.

각 평론을 2019년부터 1999년까지 영화 개봉 시점의 역순으로 배치한 이 책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 자체를 그대로 녹여내고 있다. 분절된 시간 속에 떨어져 있던 208편의 평론을 한 편의 연대기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앞뒤로 자연스레 그 시기의 영화가 따라오고, 독자는 영화 한 편에 대한 평론과 더불어 시간의 결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어떤 영화들은 엔딩크레디트가 흐를 때 진정으로 시작된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책의 서문에서 영화평론가를 “경험을 사유하며 다시 시작하는 자”(4쪽)이며, 동시에 “영화의 신비를 손에 쥐어보려고 다시 시작하다가 아득해지는 자”(4쪽)라고 말한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는 제 감정의 근거를 찾아 영화 안팎을 가리지 않고 탐구해온 이동진 평론가의 치열한 산물이자, 극장 안에서 비춰진 또렷한 이미지의 영화를 극장 밖에서 아득한 문자로 짚어내고자 끊임없이 부딪쳐온 기록이다. 그리고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추천사에서 “그가 종이 위에 펼친 영화 이야기는 때때로 영화 자체보다 더 또렷하게 작품 안팎의 정경과 심경, 그리고 색상과 냄새를 자아낸다”라고 표현했듯, 그 기록은 때로 영화 자체보다 선명했다.

어쩌면 영화는 관객에게서 생각보다 멀리 도망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는 독자에게 계속해서 의문점을 던지며 그 멀어진 거리를 체감케 한다. 봉준호의 영화가 변곡점에 이르러 어떻게 전환되었는지(“봉준호의 영화들에는 변곡점이 있다.”(23쪽, 「기생충」 中)),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진정 바라봐온 것은 무엇이었는지(“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들의 핵심 테마를 ‘죽음과 기억’으로 요약해온 숱한 평문들은 시선의 방향이 잘못되었다.”(536쪽, 「걸어도 걸어도」 中)), 또 「셰이프 오브 워터」의 ‘물의 모양’은 어떤 형태인지(“사랑의 모양은 이렇다고, 진짜 사랑의 형태는 바로 이래야 된다고 특정해서 규정하는 순간, 사랑의 신비는 휘발되고 그 규정 밖의 사랑들에 대해서 폭력이 시작된다.”(133쪽, 「셰이프 오브 워터」 中))…… 한 편의 영화를 논하기 위해 수많은 영화와 영화 밖 세상을 끌어온다. 그리고 독자와 영화 사이를 교차하며 서로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홀로 영화를 감상할 때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저자와 함께 살피다 보면 그제야 비로소 한 편의 감상이 마무리되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감독 박찬욱의 추천사는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그가 추천하는 영화를 함께 보고 설명을 듣고 대화를 나눠본 관객에게 이동진은 차라리 일종의 영화관이다.”

“그러니, 나의 영화는 이렇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책에 수록된 한 평론에서 이렇게 운을 뗀다. “그러니, 나의 영화는 이렇다.” 같은 영화를 보았더라도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영화가 남는다. 그러니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를 읽는 모두는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를 알아가는 동시에 문득 자신의 영화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의 영화는 어떠했는지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한 번 더 시작된다.

“영화가 멈춘 그 발코니의 자리에 서서 이제부터 관객은 곰곰이 생각에 잠길 것이다.”(67쪽)
 

추천평

20년 동안 쓴 글을 모았다니 이 책에 한 인생이 담겼겠다. 그전에도 이동진은 살았겠지만 그 삶조차 이런 글들을 쓰기 위한 준비에 바쳐지지 않았겠나. 그가 본 영화, 읽은 책, 들은 음악, 만난 사람, 마신 술, 그의 사랑과 투쟁. 이 책은 시네마테크에서 큰맘 먹고 개최한 한 감독의 거대한 회고전 비슷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영화비평가에 비해 문학비평가는 얼마나 안락한 직업인가. 글을 생산하기 위한 재료가 이미 글이니 말이다. 소리와 이미지로 이루어진 창작품을 글 또는 말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이란 고될 뿐 아니라 믿음직해지기가 어렵다. 그러나 긴 세월 언제나 시류에 휘둘리기는커녕 일관되게 소신을 지키고 스스로 정한 높은 기준을 유지해왔기에 이동진은 하나의 매체, 또는 기관이 되었다. 그가 추천하는 영화를 함께 보고 설명을 듣고 대화를 나눠본 관객에게 이동진은 차라리 일종의 영화관이다. 장소가 어디가 됐건 이동진과 관객이 만나면 거기는 그냥 이동식 이동진 시네마테크다.

영화감독이 되어 좋은 점을 말하자면 이런 게 있다, 특정 영화관의 기술력을 평가할 수 있다는. 내 영화로 테스트하면 소리와 영상이 정확하게 재현되는지 정확하게 안다. 내 영화를 다룬 글을 읽으면 그 필자의 실력을 금방 안다. 비판이든 칭찬이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런 의미에서 독자/관객 여러분, 이동진 극장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 박찬욱 (영화감독)
이 평론집을 손에 든 독자들은 아마 나와 마찬가지로 이동진이 뛰어난 평론가이자 인터뷰어인 동시에 뛰어난 에세이스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종이 위에 펼친 영화 이야기는 때때로 영화 자체보다 더 또렷하게 작품 안팎의 정경과 심경, 그리고 색상과 냄새를 자아낸다. 나는 그가 말하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 나임을 종종 깜박하고 단편소설처럼 흘러가는 그의 문장에 기쁘게 몸을 맡겼다. 이동진이 내 작품을 한국의 수많은 영화 팬에게 이끌어주었듯이 지금 그는 이 책을 통해 나를 영화의 세계로, 그 풍요로움 속으로 이끌어주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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