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문화예술 입문 (책소개)/4.영화세계

대화로서의 영화 - 기생충 티탄을 넘어 (2023)

동방박사님 2023. 12. 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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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자극적인 감각과 이미지의 과잉 시대를 가로지르며 독백마저 대화로 감싸 안는 영화가 있을까? 저자는 ‘한국의 아네스 바르다’가 되겠노라는 다짐으로 이런 영화를 찾아나선다. 세상과 대화하기를 열렬히 응원하는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이론을 경유해 이야기 장치로서 뇌의 구조로 나아간다. 이는 마크 한센의 감응에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으로 이어진다. 이는 또다시 맑스의 유물론에서 데이비드 하비의 시공간 매트릭스로 이어지고, 에리히 얀치의 복잡계 과학에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역사철학으로 나아간다. 이어 아비 바르부르크의 파토스 포멜에서 디디-위베르만의 징후 개념으로 다가간다.

다양한 이론적 경로들을 종횡무진 연결하며 대화로서의 영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유는 뭘까? 관객의 감응과 미메시스 역량의 활성화가 그 답이다. 이런 이론적 탐색은 영화에 관한 또 하나의 이론서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대화로서의 삶과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이미지로 감응을 고취하는 영화를 하나로 묶어내기 위함이다. [대화들을 위한 전제]를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이렇게 도출된 개념적 도구들을 사용해 본문의 중심 내용이 이루어진다. 2019년 세계 영화계를 들썩이게 했던 [기생충]과 [티탄]. 두 편의 영화를 다층적으로 분석하여 비교 평가하기.

그 결과 [기생충]의 대화들은 명성과 영향력에 비해 놀라우리만큼 독백적이음을 밝혀낸다. 반면 [티탄]의 대화들은 호평과 혹평의 극단적인 분열에 비해 지극히 대화적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기생충]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티탄]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저자는 파토스 포멜과 반성적 사고의 이중주로 그 윤곽을 제안한다. 파토스 포멜의 에너지가 영화적 시공간에 감응을 촉발하고, 그 감응에 대한 반성적 사고에 새로운 파토스 포멜의 에너지를 불어넣기! 영화적 시공간과 관객의 현실적 시공간을 보다 확장된 시공간으로 몽타주하는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1. 대화를 위한 전제들

1-1. 미메시스 역량
1-2. 대화와 이야기
1-3. 영화와 감응

2. 프레이밍 :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

2-1. 프레이밍의 매트릭스
2-2. [기생충]의 프레이밍
2-3. [티탄]의 프레이밍

3. 감응 체계 : 영화와 관객의 대화

3-1. 감응 체계와 감응의 순간
3-2. [기생충]의 감응 체계
3-3. [티탄]의 감응 체계

4. 파토스 포멜 : 관객과 세계의 대화

4-1. 파토스 포멜과 징후적 영화
4-2. 완벽한 그물망 속 액체
4-3. 금발과 스킨헤드를 가로질러

5. 대화로서의 영화

나가며
부록 : 에피쿠로스적 전환

참고 문헌
미주
 

저자 소개

저 : 김준희
제도권 밖에서 학업과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흩어진 것들의 모양새를 잃지 않고 엮어 내거나 경계 밖으로 밀려난 것들을 재조명하기 위해 읽고 보고 쓰고 만든다. 작은 단편영화와 연극 프로덕션에 참여했고, 대안대학 지순협(지식순환협동조합)을 졸업했다. 아직까지 영화를 보거나 무언가 써내는 일만큼 흥미로운 일은 찾지 못했다. 귀신보다 괴물을 좋아하고, 서늘하기보다 따뜻한 공포 영화를 만드는 날을 꿈꾼다.

책 속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이 아니고 세계감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이다.”(이문재) 영화는 시인이 말한 세계감을 회복시켜 주는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이고 연인이었다. 결핍을 마주하게 하고, 욕망을 들끓게 하고, 그러다가도 찰나의 깨달음으로 삶을 뒤집고, 그러나 결국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현실과의 괴리에 앓고, 마침내 울분을 토하며 지난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화해하게 하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늘 나를 충만하게 했다. 이 책은 영화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영화가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상상하며 보다 더 좋은 영화가 되기를 바라며 건네는 편지다.
--- p.7

생은 주고받음의 연속이다. 무엇도 주고받지 않는 생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이 주고받음으로서의 생을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영화가 내게 건넨 것과 내가 영화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아무 것도 아닌 영화는 열병을 앓게 할 뿐 침묵했다. 그때 나에게 실마리가 되어준 것은 대안대학 지식순환협동조합에서 만난 맑스와 에피쿠로스였다. 맑스와 루크레티우스를 거쳐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만나면서 세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못지않은 이 인식론적 전환은 나에게 ‘에피쿠로스적 전환’이 되었고, 영화와 생을 주고받는 여정 또한 변했다.
--- p.8

미메시스 능력은 아이들의 놀이Spiel에서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난다. (…) 아이들은 자신이 경험한?보고 겪은?엄마, 아빠, 의사, 환자, 영웅과 악당을 따라 하며 즐긴다. 그리고 이 놀이를 수행적 연기와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행한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 연인의 표정과 몸짓만으로 연인의 상태를 알아챌 수 있는 건 미메시스 능력 덕분이다. 우리의 뇌는 타인의 표정과 몸짓을 가상적으로 흉내 내고, 이미 알고 있던 기분 혹은 상태와 연결 짓는다. 이 과정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경험을 통해 알 것이다. 당신이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는 미메시스를 통한 앎의 순간들로부터 만들어지고, 이 앎은 미메시스 과정이 축적될수록 점점 더 정교해진다. 미메시스 능력은 타인 혹은 타자라는 외부 세계와 ‘나’라는 내부 세계를 연결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 p.18~19

미메시스 능력은 결국 세상과 나를 화해시키는 힘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어포던스에 짓눌리지 않고 오토포이에시스를 과잉시키지 않으면서, 긍정적인 어포던스를 취해 보다 긍정적인 어포던스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 부정적인 어포던스조차 긍정적인 어포던스로 변형할 수 있다면? 나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을 ‘미메시스 역량’이라고 칭하고자 한다. 미메시스 역량은 바로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어포던스에 맞춰 오토포이에시스의 자율성을 발휘해 긍정적인 어포던스로 변형해내는 힘이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에 숨어있는 서브텍스트를 몸으로써 읽어내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공감과 연대의 언어를 발화할 수 있는 힘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 p.23

대화의 사슬을 이루는 발화의 운동은 미메시스 능력과 유사하다. 미메시스 역량이 보다 더 나은 세계(어포던스)와 나(오토포이에시스)의 만남 자체를 지향하는 것처럼 발화의 운동성은 발화를 통한 끊임없는 발화, 즉 대화의 지속을 향해 있다. 미메시스 능력이 외부 세계의 어포던스를 내부 세계의 오토포이에시스로 하여금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것처럼, 발화는 이미 선행한 발화에 대한 응답으로 존재한다. 미메시스 능력이 결과적으로 새로운 어포던스를 생산해내려는 것처럼, 발화는 다음 발화를 지향한다.
--- p.24~25

미메시스 역량과 감응은 대화를 위한 전제다. 앞으로 우리의 대화는 [기생충]과 [티탄]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은 반지하에서 백수로 살아가던 네 식구가 저택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블랙코미디다.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2020)은 교통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주인공이 용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10년 전 실종된 소년을 연기하는 SF·스릴러·드라마다. 두 영화 모두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지만 흥행 성적은 상이했다. [기생충]은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동시에 한국영화로써 대단한 흥행성적을 거두었지만 [티탄]은 걸작과 괴작 사이를 오가며 대중으로부터 점차 사라졌다. 두 영화를 둘러싼 대화를 복기하는 일은 어쩌면 지금 여기에 필요한 대화로서의 영화의 윤곽을 그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 p.45~46

다송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저택 사람들과 기택의 가족을 보여주며 특별한 감응을 일으키지 않던 영화가 새로운 장면을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 기택과 동익이 인디언 가발 장식을 하고 수풀 뒤에 숨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미묘한 긴장감에 휩싸여 ‘연장 근무’의 이름 아래 묶인 기택의 가족은 기택을 제외하고 지하실 사람들을 신경쓰기 시작한다. 기우는 급기야 수석을 들고 지하실에 내려간다. 그 바람에 근세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때, 근세의 냄새에 코를 틀어막는 동익을 본 기택의 얼굴 클로즈업과 이어지는 기택의 살인은 영화에 이제껏 없던 ‘찰나의 순간’으로 틈입한다. 기택의 얼굴 클로즈업에서는 변화만이 감지될 뿐, 무엇도 쉽사리 읽히지 않는다. 아니, 읽힐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동익을 찌르는 기택의 모습에서 생명력이 감지되지 않는다. 무언가에 쓰인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죽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새로운 ‘찰나의 순간’은 미지로 남아버리고, 영화는 길을 잃는다. 결국 영화는 이 순간을 감당하지 못하고 평형으로 향해 간다. 체계 안에서 기택의 살인은 블랙홀과 같이 미지의 상태로 굳어버리고, 그 파급력을 감당하지 못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후의 잔해를 더듬는 것뿐이다.
--- p.146

하나의 감응 체계로서 [티탄]은 요동의 패턴을 변형해 반복하면서 불안정을 유지한 채로 자신만의 질서를 세워나간다. 그 에너지는 여진처럼 남아 관객에게 고스란히 흡수될 것이며, 관객은 [티탄]의 패턴을 자신의 힘으로 마무리 지을 힘을 이어받게 된다. 하나의 감응 체계로서 [티탄]은 이미 응답에 대한 기대를 품은 발화로서 관객이 응답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 p.162

하지만 알렉시아는 결코 여성으로 굳지 않는다. 감응의 순간③에서 욕조 앞에 쓰러진 뱅상을 안아든 알렉시아를 비추는 풀 숏은 뱅상과 알렉시아의 관계성을 모두 응축하고 있다. 이 관계성에 따라 알렉시아는 아들이자 연인이면서 동시에 딸이자 어머니가 된다. 감응의 순간④에서 알렉시아는 임신한 여성이면서 동시에 뱅상의 아들인 아드리앵이자 아드리앵 엄마의 원피스를 입은 뱅상의 연인이다. 감응의 순간⑦에서도 마찬가지다. 뱅상을 보필하는 연인이면서 수염이 나지 않는 아들 아드리앵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넘나들며 정체성이 빚는 혼란을 감응하게 하는 이 감응의 순간들은 마침내 감응의 순간⑩에서 뱅상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는다. 뱅상은 더 이상 아드리앵의 아버지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그는 알렉시아의 아버지이자 연인이자 알렉시아를 대신할 아이의 엄마가 된다. 여기서 관객은 감응의 순간②의 잔상을 불러와 감응한다. 감응의 순간②에서 뱅상의 앞에 나타났던 아이는 아드리앵을 잃은 과거의 슬픔과 알렉시아의 아이의 미래가 동시에 빚어낸 형상이 아닐까?
--- p.163~164

두 체계의 ‘공생’은 두 체계가 자신의 자율성의 일부를 희생해 하나의 공동 질서를 구축하고 그 공동 질서와 더불어 두 체계가 모두 자기갱신을 이룰 때를 말한다. 만일 관객이 자기갱신을 이루는 자기조직계, 즉 자신의 외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내부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며 감응하는 존재라면, [티탄]은 기꺼이 관객과 공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티탄]의 감응의 순간들은 모두 이 세계에 아직까지 타자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존재와 그 존재의 물질성-몸, 성질-젠더와 섹슈얼리티, 작용-관계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티탄]이 건네는 질문에 동참할 때, 관객은 [티탄]과 공생할 수밖에 없다.
--- p.165

스크린을 향해 쏘아지던 빛이 거둬지고, 두어 시간을 함께한 자리를 벗어나며 관객은 영화가 맺은 감응의 여운을 품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중단은 관객에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꿈을 기억할 때와 같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나서 이야기의 줄기보다 몽타주된 이미지를 기억한다. 특정한 장면이나, 인물의 액션 혹은 인물의 감정이나 말, 그리고 그 이미지를 보는 순간의 신체적 반응을 기억한다. 영화의 관객은 영화가 펼쳐 보인 이야기를 선형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관객은 영화의 모든 찰나의 순간들을 스스로 몽타주해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경험한 느낌이나 인상으로써 영화를 받아들인다. 쉴 새 없이 눈앞에서 흐르던 움직임은 관객이 스스로 몽타주해낸 이미지 안에 그 에너지를 전달하고서 멈춘다. 이제 영화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되어 온전히 관객의 것으로 탈바꿈된다. 이때 몽타주된 이미지와 그 안에 응축되는 신체적 감응은 아비 바르부르크의 ‘파토스 포멜Pathosformel’을 떠올리게 한다.
--- p.170~171

바르부르크는 르네상스 회화를 분석하면서 흩날리는 머리카락이나 나부끼는 나뭇가지와 옷자락 같은 디테일에 주목한다. 이미지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러한 “동적 부속물Bewegtes Beiwerk”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 가지 역량을 발휘하도록 한다. 정지한 그림에서 움직임을 상상해내는 ‘감정이입Einfuhlung’과 움직임의 원인을 파악해내는 ‘반성적 사고’의 길항작용을 통해서 보는 이는 정지한 이미지 속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감각한다. 바르부르크는 이 길항작용을 중요시하면서 감정이입과 반성적 사고의 변증법적 긴장이야말로 인간이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는 미메시스와 궤를 같이한다. 이미지에 감정이입하여 움직임을 지각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는, 즉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는 일은 외부 세계의 어포던스를 포획해 자신의 오토포이에시스를 증진시키는 미메시스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르부르크에 의하면 이미지의 역동성 역시 두 요소의 길항작용을 통해 생산된다. 두 요소는 바로 “파토스 포멜Pathosformeln”과 “소프로지네Sophrosyne”다.
--- p.171~172

그러나 파토스 포멜의 격정적 에너지는 관객을 영화적 시공간에 붙들고 현실과 만날 수 없게 해서는 안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이미지에 깃든 소프로지네다. 소프로지네는 창작자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와 나눈 대화에서 쓰인다. 영화의 프레이밍에서 소프로지네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관객이 스스로 합성해낸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이끈다. 파토스 포멜이 감응의 문제라면, 소프로지네는 프레이밍의 문제다. 관객이 스크린에서 빠져나오면서 자신만의 영화를 품고 세계와 나누게 될 대화는 앞선 두 대화, 스크린에 이르기 전까지 창작자가 세계와 나눈 대화와 스크린에 비친 영화와 관객이 나눈 대화의 변증법적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즉 관객의 영화가 세계와 나누게 되는 대화는 프레이밍과 감응의 변증법적 작용을 따른다.
--- p.175

[기생충]은 위아래의 높낮이로 파악되는 공간의 구성을 인물의 정치경제적 위상과 동일시하면서 계급적 역학 관계의 틀에 따라 세계를 재구성한다. 관객은 인물과의 동일시 내지 영화적 시공간에의 감정이입을 통해 영화가 재구성한 세계의 위계 안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욱여넣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하는 공통 감각을 형성하지 않고, 영화의 전반부에서부터 관객의 정치경제적 위상에 따라 영화의 감흥을 분열시킨다. [기생충]은 어쩌면 자본주의적 현상을 진단하는 영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그에 따른 무기력과 우울을 답습하는 영화로 평가되어야 마땅한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의 틀로 세계를 재구성할 때, 그 목적은 자본주의의 극복이지 자본주의에 예속된 존재로의 소급이 아니다. 그러나 [기생충]은 그 세계가 지닌 위계적 구조 안으로 관객의 삶을 반지하와 저택, 지하벙커의 이름으로 축약시키고, 그로부터 세계를 돌이켜볼 것을 요청한다. 이는 명백한 예속화다. 그 반증으로 서울시는 [기생충]의 촬영지를 관광코스로 상품화시켰다. 반지하를 관광할 수 있는 자와 반지하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자로 나뉘는 사회. 위계적 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와 그 소외를 극복하고 능동적 존재로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을 꿈꾸고자 한 맑스의 바람과 달리, [기생충]은 자본주의적 소외와 그에 따른 절망과 분노를 은폐시키고 도리어 가난을 상품화할 수 있는 자본의 욕망으로 연결된다.
--- p.187

기택은 왜 바퀴벌레가 되었을까? 기택은 기생충이다. 이 명제를 거실을 빠져나가는 기택의 다리를 비추는 클로즈업으로 목도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서 한참 동안 그 잔상에 머물러야 했다. 누가 이 사회에 기생하고 있는가? [기생충]은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터전을 앗아간 유럽인을 모티프로 삼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제 삶의 터전을 잃은 기택이 결과적으로 동익을 살해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적 잔상이 관객에게 남기는 에너지는 동익이 아닌 기택을 기생충으로 간주하도록 한다. [기생충]의 질문이 관객에게 발화되기 위해서는 영화적 이미지와 현실 세계의 거리가 보다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리얼리티에 기반한 이미지에서 서사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우화적인 이미지로 장르적인 서사를 구축해야 했다. 아니, 애초에 극장을 벗어나면서 사실 저택의 사람들이 기생충이었다고 느낄 수 있을 만한 파토스 포멜이 필요했다. 조용히 거실을 빠져나가는 기택의 다리에서 감응할 수밖에 없는 애처로움을 품은 이미지가 아니라.
--- p.189~190

[티탄]은 스스로 비체가 되기로 선택했다. 보는 이를 더없이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지만, 관객에게 그 불쾌를 디디고 흔들릴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이는 [기생충]이 관객을 분열시키는 지점과는 명백히 다르다. [기생충]의 영화적 시공간은 자신이 재구성한 위계 안으로 관객을 끼워 넣지만, [티탄]의 영화적 시공간은 이미 세계가 지정해 놓은 자리의 바깥에서 관객이 한 걸음 더 나설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저 관객을 끌어당기기만 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시퀀스들은 관객의 한 걸음을 위한 [티탄]의 한 걸음이다.
--- p.198

응급 환자를 구조하는 장면에서 뱅상은 알렉시아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대장이지만, 아들의 성장에 기뻐하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소방서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함께 춤을 추며 교감하는 알렉시아의 연인이기도 하다. 수염이 나지 않는 아들에게 직접 면도를 해주는 아버지로서 뱅상은 알렉시아의 유목적 여성성을 이성적으로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알렉시아라는 비체적이고 유목적인 존재와의 시간을 통해서 뱅상은 더 이상 아버지의 이름만을 고집할 수 없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알렉시아와 뱅상이 교차되는 장면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고 보인다. 알렉시아의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두 비참한 신세”의 공존과 연대의 가능성.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연대가 가능한 세계를 위해 관객을 전율하도록 한다.
--- p.200~201

[기생충]의 대화들은 그 명성과 영향력에 비해 놀라우리만큼 독백적이었다. 프레이밍에서 드러나는 대화는 맑스가 비판한 철학자들처럼 세계의 모양새를 읽어내는 데에 급급하다. 그 해석을 변혁의 토대로 삼으려고 애쓰지만, 영화가 스스로 자신이 재구성한 세계의 굴레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영화와 나눈 대화를 돌이켜보면, 헤어지고 싶다며 연애 상담을 시작한 친구에게 온갖 질문을 던져 해결책을 찾으려 시도하지만 울기만 하다가 당장 다음날 다시 잘 만난다고 웃으며 통보하는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스크린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현실로 돌아온 관객은 허탈하다. 그 허무함을 메우기 위해 퀴즈쇼의 참여자가 된다. 온갖 이미지에 대한 해석과 그에 대한 논쟁으로 [기생충]의 불쾌는 지워진다. 애초에 [기생충]이 불쾌를 통해 자극하려 했던 것은 퀴즈쇼에서 맛보는 짜릿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독백 역시 마찬가지다. 시작은 대화를 위한 발화였을 것이다. 발화에 대한 응답을 미리 상정해 고정시킨 자리를 범람하는 생을 간과한 탓이 아닐까?
--- p.210

[티탄]의 대화들은 호평과 혹평의 극단적인 분열에 비해 지극히 대화적이었다. 프레이밍에서 드러나는 대화는 단일한 주체로서 규명되지 않는 여성적 삶을 억압의 그물망 바깥으로 옮겨놓기 위한 바람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티탄]은 알렉시아의 몸을 그로테스크로 이미지화하면서도 그로테스크가 지닌 이질적인 생명력으로 하여금 여성의 창조성을 긍정할 수 있게 한다. 영화와 나눈 대화의 양상은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여행이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가고자 만들게 할 때 가장 의미 있는 것처럼, 영화는 혐오와 차별의 독백을 끌어안고서 그 독백을 대화의 연쇄 고리로 삼고 있다. [티탄]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계속해서 세상과 대화하기를 열렬히 응원하는, 대화로서의 영화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 p.211
 

출판사 리뷰

죽은 게 아니라면 주고받는 삶을 꿈꿔야 한다.
혐오와 차별의 독백이 아닌
공생하는 대화로서의 영화를 탐색하는
MZ세대 저자의 특별한 여정!

일상적 통찰에서 시작, 철학·과학을 경유해
[기생충]의 한계를 인식하며
[티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대화로서의 영화의 열린 구조를 해명하는
치열하고 탁월한 구성!


책을 시작하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영화에게 바치는 헌사지만, 생에 바치는 찬양가이기도 하다”고. 영화의 생명이 관객의 감응을 촉발해 생의 고양을 촉진하는 성찰적 대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와 세계의 무한한 마주침을 통한 주고받음으로 열려 있는 대화적인 삶이 생의 의미를 재충전해주는 영화의 원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과 생의 열린 대화의 이 무한한 연쇄 고리로 우리를 감싸 안는 영화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다. 대화로서의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촉진하는 영화보다 대화의 외양을 띠지만 정작 독백으로 그치는 영화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탓이다. 저자는 갑갑한 독백의 벽들을 돌파할 생산적 활로를 찾기 위해 일상의 통찰, 철학과 뇌과학, 복잡계 과학과 영화 이론 등을 횡단한다. ‘시공간적 프레이밍’과 ‘감응과 미메시스 역량’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벼려내기 위해서다. 이로써 세계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기생충](2019)과 [티탄](2020)을 - 100 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할애해 - 시퀀스별로 촘촘히 비교 분석한다. 그 결과 기존의 세평과는 판이한 새로운 평가를 끌어낸다.

[기생충]은 이미 정해진 길로 이끌기 위해 관객을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자극적으로 흔들어댄다. 그러나 스크린으로부터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관객은 그저 멍한 상태가 되어 그 의미를 이리저리 찾아보기 위한 퀴즈쇼의 참여자가 된다는 점에서 철저히 독백적인 영화다. 반면 [티탄]의 프레이밍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상징계적 질서에 의해 억압된 타자의 문제로 풀어낸다. 상징계에 예속된 주체를 넘어서 상징계적 질서 자체의 거듭남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알렉시아의 시도와 좌절은 뱅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갈수록 커다란 파동을 그리며 알렉시아와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 파동은 끝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뱅상을 주체화하는 힘이 된다는 점에서 대화적이다.

감독의 명성, 새로운 배우들의 등장, 소재와 스토리의 시사성, 자극적인 대사 등 겉으로 드러난 장면들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유명 평론가들의 해석에 끌려가는 영화 읽기 대신 저자는 문제들과 씨름하는 가운데 미메시스 역량의 생성을 보여주는 시공간적 프레이밍의 역동적 흐름을 짚어내고 있다. 영화와 관객 간의 감응을 촉진하는 “찰나의 순간”들을 찾아내 양자를 겹쳐 보면서 열린 대화의 가능성 여부를 타진한 입체적인 분석의 결과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기생충]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티탄]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화는 어떤 윤곽을 지닐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격정(파토스 포멜)의 에너지로 하여금 영화적 시공간에 감응하고, 그 감응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이끌어내 다시 새로운 파토스 포멜의 에너지가 불어넣어지는 영화. 그리하여 영화적 시공간을 나의 현실적 시공간과 연결시켜 보다 확장된 영화적 시공간으로 몽타주하는 영화가 그것이라며 이 흐름을 다이어그램으로 압축해 보인다.

미메시스 역량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몸의 무게 중심과 같다. 어포던스를 취득하기 위한 한쪽 발에 무게중심을 둘수록, 오토포이에시스를 발휘하는 다른 쪽 발의 무게중심은 약해진다. 한쪽 발에 두었던 무게중심을 다른 쪽 발로 이동하지 않으면,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전거와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어포던스와 오토포이에시스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힘으로서의 미메시스 역량은 위의 그림처럼 경로를 계속해서 이동시켜 유동적으로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 흐름은 M1-M2-M3-M4-M1-M5-M6-M7-M1과 같다. M1에서 M3으로 넘어갈수록 미메시스 역량은 어포던스를 취득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려고 할 것이며, M1에서 M6으로 넘어갈수록 미메시스 역량은 오토포이에시스를 발휘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길 것이다. 미메시스 역량이 균형점을 지날 때마다 미메시스 역량을 지닌 이의 상태는 이전과 다른 상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발을 구를수록, 자전거가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사람에게 내재한 다중지능적 네트워크를 촉발해 자전거를 타고 나아가듯이 관객의 미메시스 역량을 활성화하는 것이 [대화로서의 영화]를 찾아 먼 여정을 돌아온 저자의 독창적인 답변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 난해한 영화 언어들의 체계를 제시하면서 정작 구체적인 작품 분석에 적용하기 힘든 영화이론서들이나 개별 작품이 주는 감동을 세세히 기술하면서 그 타당한 근거를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일반적인 비평서들과는 근본적으로 결을 달리한다. 이론적 탐색이 실제적인 영화의 창작 및 수용과 분리되지 않고, [현실→영화→관객의 감응→새로운 현실]로 나아가는 복합적인 과정의 생산적인 징검다리로 이어지기 있기 때문이다. 분리되어 있는 이론과 창작과 비평과 관객의 수용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려는 이런 치열한 노력을 통해 현실에서 빚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에 속박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또 다른 현실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하는 대화적인 영화의 윤곽이 그려진다.

책의 구성

살아있는 대화로서의 영화를 꿈꾸는 저자의 열정은 [1. 대화를 위한 전제들]에서 시작해, [2. 프레이밍 :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와 [3. 감응 체계 : 영화와 관객의 대화], 그리고 [4. 파토스 포멜 : 관객과 세계의 대화]를 거쳐 [5. 대화로서의 영화]로 나아가는 이 책의 다층적인 여정 자체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화로서의 영화의 윤곽을 그리기 위한 여정의 첫 번째 관문은 대화와 영화에 대한 고찰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있다. [1. 대화를 위한 전제들]에서 대화와 영화의 접착제로서 ‘미메시스 역량’과 ‘감응’ 개념을 제시한다. [1-1. 미메시스 역량]은 벤야민의 미메시스를 인지생태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심광현의 이론을 경유해 이 시대에 필요한 역량으로서의 미메시스 능력을 지칭하는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미메시스 역량을 소개한다. [1-2. 대화와 이야기]에서는 바흐친의 대화 이론을 토대로 미메시스 역량이 대화의 사슬을 이어나가도록 하는 과정을 이차적 담화 장르인 이야기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를 영화의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1-3. 영화와 감응]에서는 마크 한센이 뉴미디어를 위한 새로운 철학의 핵심으로 제시한 ‘감응’을 복잡계 과학을 빌려 재해석하면서 미메시스 역량에 의한 대화로서의 영화가 관객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작용에 대해 검토한다.

2부터 4까지는 1에서 구성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기생충]과 [티탄]을 세 개의 대화로 나누어 분석한다. [2. 프레이밍 :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에서는 데이비드 하비가 자연철학적 시공간과 인식론적 시공간을 교차시켜 3×3의 행렬로 표현한 시공간 유형을 토대로 영화의 장면을 시공간 유형에 따라 영화의 프레이밍에 담긴 창작자가 세계와 나눈 대화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3. 감응 체계 : 영화와 관객의 대화]에서는 이미지가 나타내는 정보에 따른 새로움과 확인의 상태의 변증법적 작용으로서의 ‘감응’ 개념을 토대로 장면의 감응을 하나의 감응 그래프로 나타내어 영화의 감응 체계가 관객과 이루는 관계를 다룬다. [4. 파토스 포멜 : 관객과 세계의 대화]에서는 아비 바르부르크의 ‘파토스 포멜’과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징후’ 개념을 경유해 영화의 에너지가 관객이 세계와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지 분석한다. 마지막 [5. 대화로서의 영화]는 2부터 4의 내용을 기반으로 대화로서의 영화의 윤곽을 간략하게 구체화한다.

수평적 대화를 촉진하는 마주침의 중층적 의미

독자들로서는 각 장마다 등장하는 낯선 개념들에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개념들 모두 대화로서의 영화에 다가가기 위한 일종의 ‘디딤돌’로 보아달라고 말한다.

[미메시스 역량과 감응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해 프레이밍의 시공간 유형을 분석해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를 추적하고, 영화가 만들어내는 감응을 엮어 비평형 산일구조로서의 감응 체계인지 검토하는 과정은 모두 대화로서의 영화를 찾기 위해서였다. (…) 우리가 영화를 “단지 ‘객체 또는 관조’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하지 않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파악한다면, 영화는 반드시 관객으로 하여금 관객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대화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는 괴물처럼 몸을 불리는 상품으로써 소비되는 데 그칠 것이다.]

MZ세대는 직업, 외모, 학력, 재력 같은 외적 가치를 비교하기보다 내면을 이해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관계 맺기’를 시도하기 위해 MBTI 성격 유형을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정교하고 복잡하게 발전한 현대 심리학보다 1944년에 개발된 이 낡은 유형론이 잃어버린 관계성과 행복감을 되찾는 데 더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신자유주의 사회가 강제하는 수직적인 사다리 오르기의 경쟁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각자의 실존적 차이를 존중하는 수평적인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에 대한 열망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MZ세대인 저자가 대화의 전제가 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힘겹게 벼려내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를 거쳐 영화와 관객의 대화, 관객과 세계의 대화로 나아가는 치열한 열망도 이런 전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중층적인 대화의 연쇄 고리가 활성화되려면 외향/내향과 같은 정태적인 분류에서 멈춰서는 MBTI의 성격 유형을 역동적인 뇌과학적 상호작용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MBTI 성격유형에서 S(감각)와 T(사고)를 규정하는 좌반구와 N(직관)과 F(감정)에 관여하는 우반구가 뇌량을 매개로 [마주쳐야만] 온전한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화를 단절시키는 독백은 좌반구나 우반구 어느 한쪽의 능력만 부추길 때 발생한다. 맥락을 소거하고 대상에만 집중하거나 대상 없이 맥락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원활한 대화는 누군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거나 쥐려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답하기를 기다릴 때에만, 다시 말해 좌우뇌를 함께 사용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작자와 영화와 관객과 이 모두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대화(마주침)는 각자의 내면에서 감각과 사고, 직관과 감정 사이의 마주침(감응과 대화)이 활성화될 때에 가능해지며, 그 역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것이 지속적인 대화, 즉 마주침의 생성과 연쇄 과정이며, 수평적인 삶으로의 진정한 전환이 일어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저자는 이렇게 중층적으로 연결된 대화, 감응, 마주침, 수평적 삶으로의 전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해 [에피쿠로스적 전환]을 선언한다. 책의 서두에서 긴 여정의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고, 말미의 부록을 통해 다시 그 의미를 반추하는 이 전환이 단순한 수사학적 비유가 아님을 저자는 복잡계 과학과 맑스의 철학을 엮어 체계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원자와 허공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원자는 ‘무게’로 인해 수직 낙하 운동을 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으나, 그 운명을 거스르는 ‘비껴가는 운동’을 통해 다른 원자와 충돌하고 그로부터 사물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된다. 저자는 원자의 비껴남을 마투라나-바렐라가 말한 오토포이에시스(자기-생산) 능력과 같다고 보면서, 이를 다시 복잡계 과학이 말하는 열린 비평형계의 ‘요동을 통한 질서’의 창발과 연결한다.

나아가 저자는 이를 시간에 대한 감각과 연결한다. 엔트로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평형 상태에서는 시간이 무의미하며, 시간이란 원자와 허공의 관계와 원자들의 운동을 통해서만이 지각될 수 있는 “사건의 사건”(맑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어서 다시 사건이 사건화되는 것을 신체적 프레이밍으로서의 감응이 일어나는 순간과 연결한다. 요약하면, 원자들의 비껴가는 자유 운동으로 마주침이 발생하고, 열린 비평형계가 요동을 통한 질서를 형성하는 자기갱신을 이룰 때 감응이 출현하고, 이 감응의 순간이 바로 시간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제시된 해결들의 연쇄 고리들은 모두 “살아있는 영화와 함께 나누는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어 흩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혹여 독백이 되어 흩어진다고 할지라도, 다시 그러모아 대화의 사슬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간절한 열망의 산물이다. 저자는 그 바람이 흩어지지 않도록 [대화로서의 영화]를 세 가지 테제로 요약해 글을 마무리 한다.

첫째, 영화는 세계에 대한 응답이다. 영화의 프레이밍은 늘 이미 선재하는 발화에 대한 응답이며, 스크린에 펼쳐져 관객과 만나는 영화의 프레이밍은 관객의 응답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둘째, 영화에 대한 응답은 감응을 통해 이루어진다. 관객이 영화 속에서 찰나의 순간을 스스로 합성해내면서 비로소 영화는 영화가 된다. 관객이 참여자로서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스크린과 마주할 때, 영화는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 된다.

셋째, 영화는 이미 선재하는 세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발화이기 때문에 관객의 영화에 대한 발화 역시 세계에 대한 응답이다. 그 응답으로서의 발화에는 창작자가 세계와 나눈 대화, 관객으로서 영화와 나눈 대화,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롯해 현존하는 모든 어포던스를 오토포이에시스를 통해 나눈 미메시스적 대화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 미메시스적 대화의 감각을 체현한 몸으로 하여금 독백을 대화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대화로서의 영화가 할 수 있고 또 해내야 하는 것은 결국 독백의 세계를 대화의 세계로 변혁시키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