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문화예술 입문 (책소개)/1.건축문화

건축의 경험 (2017)

동방박사님 2024. 1. 24. 07:12
728x90

책소개

이 책은 우리에게 ‘건축을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 건축 없이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이 질문은 사뭇 도전적으로 들린다. 모든 건물에는 공간을 누비며 움직이는 인간의 자발적 능력을 부추기거나 위축시키는 힘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힘을 감지하지 못하고 지나칠 뿐이다. 저자는 이 같은 힘을 경험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며 건축의 경험이야말로 인간의 시원적 자유에 속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현대건축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목차

서문: 가능성의 장소
1 민첩성을 자극하는 지면
우리를 길들이는 평탄한 지면
토속 마을의 계단과 골목길
중력의 흐름
곡예하는 계단
생기 넘치는 일본의 지면
아찔한 가장자리
하늘 도시와 인간의 둥지
우아하게 비상하는 램프
에펠탑에서 아르네 야콥센의 계단까지

2 변화의 메커니즘
상호작용과 자아의 발견
기계화된 건축의 눈속임
일본의 소박한 미닫이문
깨달음을 주는 토속적인 요소
현대 키네틱 건축의 계보
메종 드 베르의 기계적인 경이로움
카를로 스카르파의 시적 변이
톰 쿤딕의 ‘기즈모’와 스티븐 홀의 ‘여닫이 공간’

3 공간의 융통성
다의성
20세기 시와 회화의 이중적 관점
숨 쉴 공간의 자유
혼합식 계단
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광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개인의 주권’
헤르만 헤르츠베르거의 다의적 형식
모리스 스미스의 공간적 콜라주
쟌카를로 데카를로의 참여유도형 건축
알도 반아이크의 이원적 가치

4 발견의 중요성
잔여 공간의 비밀
일본의 창살과 발
숲속의 모험을 환기하는 경험
그늘의 신비
반투명한 벽의 안개 이미지
복잡함과 그윽함
작은 무한성
존 손 경의 유연한 공간
카를로 스카르파의 수수께끼 같은 디테일
시원으로 가는 여행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
방들의 병렬 배치와 멀어지는 한계

5 행동을 부추기는 장
스며들 수 있는 세계의 회화적 이미지
건설과 해체의 이행기
과학과 예술에서의 힘의 장
열린 형식의 도시
돌로 이루어진 숲
철과 유리로 빚은 그물망
맞물리는 공간, 라이트에서 카프까지
다공성 구조의 건축
모리스 스미스의 주거 가능한 3차원적 장
일본의 공간 격자

저자 소개 

 
건축의 경험의 저자이다.

책 속으로

인간의 몸은 현대 세계와 같은 황량한 땅 위에서라면 결코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지형은 대단히 안전하고 안락하지만, 또한 단조롭고 상투적이고 평온무사한 까닭에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박탈하고 우리에게 해로움을 끼친다. 단조로운 지형은 유연한 생물학적 재능이 발현될 기회를 차단한다. 공간을 누비는 사람이 발밑의 까다로운 지면에 민활하게 반응하는, 작지만 기적과도 같은 민첩성을 둔화하는 것이다.
(/ p.13)

나의 제안은 자발적 행위의 관점에서 건축을 재고하자는 것이다. 이 작업은 다섯 갈래로 나뉜다. 지면의 형태에 따른 기민한 움직임, 움직이는 건축요소의 처리 ,복합적 차원의 해석, 미지의 공간의 발견, 행동의 장이 갖는 포괄적 자유다. 이 주제들이 이 책의 다섯 장을 구성한다. 겉으로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개인과 세계 내에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 각 장은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다섯 종류의 인간 행위를 탐구한다.
(/ p.18)

축조된 환경의 지면은 움직이는 몸을 창의력의 주체로 일깨우는 일차적 원천이다. 그 위에서 우리는 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균형 감각과 민첩성을 발휘한다. 오늘날에는 평평한 바닥과 반복되는 계단처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균일한 지면이 모든 곳을 점령하고 있다. 필요성을 넘어 과도해질 때 그런 지면은 우리의 몸에서 힘을 떼어내 우리를 단조롭고 기계적인 운동에 복속시킨다.
(/ p.21)

건물의 동적 요소란 우리가 손과 손가락으로, 때론 온몸으로 직접 제어하고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것들인 창과 문, 덧문, 출입문 등을 말한다. 이 요소들은 주변의 공간을 의미 있고 바람직하게 즉시 바꿀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나 변화의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과정에 참여하는 우리의 행위다.
(/ p.67)

브리온 가족묘지에 숨어 있는 비밀스러운 조작행위는 명상을 위해 마련된 공간인 연못으로 가는 복도에서 정점에 달한다(109쪽 위).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닥에서 신기한 메아리가 울리고, 그 끝 즈음에서 그늘진 곳에 두꺼운 유리문이 발길을 막아 방문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 문은 여닫이가 아니고 위로 열리지도 않는다. 잠시 서투르게 실험을 한 뒤에야 방문객은 상단을 잡고 체중을 전부 실어 아래로 내리면 바닥에 있는 홈 속으로 문이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
(/ p.108)

이탈리아의 상징적인 광장들에 가면 바닥과 주변부의 느슨함에서 광장의 가장 큰 특징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인상적으로 둘러싸인 광장의 정밀한 기하학이 아니라 뒤틀리고 주름지고 구부러진 면들이다. 주위의 벽들은 들쑥날쑥하며 느긋함을 보이기도 하고, 변두리를 따라 구석진 자리들을 만들어내며 다양한 선택의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잠시 몸을 감추거나, 군중으로부터 물러나거나, 기둥에 기대 쉴 수 있는 주랑 현관과 아케이드도 활동의 장소가 되어준다.
(/ p.135)

세계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은 인간의 타고난 특성이다. 호기심은 매혹적이고 희망적이면서도 신비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탐구하려는 충동에서 발현된다. 건물이 사람의 발견을 기다리는 흥미로운 측면,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없는 공간, 수수께끼 같은 디테일, 칸막이나 가림막이 안개처럼 감싸는 공간, 유혹적인 시선 끌기, 전망을 향해 가는 매력적인 길 등을 갖고 있을 때, 그 건물은 환경을 세밀히 살피고 탐험하는 소중한 힘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건축은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사라질 때까지 온갖 경험이 건축물 안에서 이루어진다. 건축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가우디나 라이트, 르코르뷔지에 같은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을 떠올리지만 이들의 기념비적인 건축도 우리가 느끼고 행동하는 삶의 공간이다. 이 책의 저자인 헨리 플러머Henry Plummer는 이처럼 가까운 듯 멀게 느껴지는 건축이야말로 ‘경험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건축이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건축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시각적 대상도 아니고, 일상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실용적인 사물도 아니다. 저자는 어려운 단어를 동원해 설명하는 대신 자신이 경험한 건축물로 우리를 안내한다. 손으로 파낸 그리스 마을의 계단에서 긴장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이탈리아의 광장까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빼어난 공간구성에서 카를로 스카르파의 시적인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공간 경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풍부한 장면과 맞닥뜨리게 해준다. 그리스 이아Oia 마을의 아슬아슬한 계단을 오르고 나서는 ‘실제로 살아있다고 느끼기 위해선 살아있음이 위태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탄성을 지른다.

자발적 행위가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그간 주로 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정치의 관점에서 활발하게 다뤄졌지만, 안타깝게도 물리적인 환경의 측면, 특히 건축의 관점에서 논의된 적은 거의 없었다. 건축이야말로 인간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첫 번째 원천이라면, 건축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지 따져보는 일은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문제와 직접 이어지는 핫 이슈가 된다. 이 책에서 존 듀이가 언급한 대로 ‘자유를 얻기 위한 진짜 전쟁터는 우리 자신과 우리 제도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의 개념이 왜 건축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한나 아렌트가 ‘우리는 행위를 함으로써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는지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지도 모른다. 막연히 생각에 그치지 않고 건축을 경험함으로써 몸에 새기게 될 테니 말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자유는 우리가 물려받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고 경험하는 순간에만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축의 경험은 철학적인 영역에 머물렀던 개념과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를 잇는 다리와도 같은 셈이다.

저자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맞댄다. 매일 마주하는 계단, 바닥면, 움직이는 문과 벽, 창문 그리고 주위 환경과 건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주문한다. 시인, 철학자, 심리학자와 건축가의 특별한 만남을 주선하며 건축의 역사와 배경을 새롭게 보도록 부추긴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현대건축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이 책은 새로운 공간을 꿈꾸는 건축가뿐만 아니라 그동안 어렵고 공허한 내용 탓에 건축 관련 책에 거리감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 ‘과연 무엇이 핵심인가?’ 되물으며 건축이라는 존재를 피부에 닿을 만큼 가까이 느끼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