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일본학 연구 (책소개)/3.일본근대사

일본인의 선택

동방박사님 2021. 11. 2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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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 하면 늘 떠오르는 말, 가깝고도 먼 나라. 역사 속에서, 지금도 우리는 일본과 숙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지리적인 영향으로는 일본과 한없이 가깝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굴육과 질곡의 시간들은 일본을 우리와 먼 나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우리와는 다른 일본인들의 태도. 기회가 닥치면 놓치지 않고 챙기는 철저함과 임기응변에 가까워 보여도 치밀하고 계산된 행동을 보이는 일본의 모습은 우리에게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무엇이 일본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일본인의 역사 속에 응축된 삶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 매순간 일본인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동적이고 다이내믹한 역사와 삶을 꾸려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그들의 실체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역사적 코드를 통해, 우리와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것은 일본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목차

Ⅰ장 일본인은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얻었는가
1. 새로운 문물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2. 서민들의 양학에 대한 깊은 열의는 왜 생겨났을까
3. 문서행정은 왜 일찍 시작되었고 일본인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4. 생존과 죽음을 화두로 하는 무사도가 현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5. 일본인에게 바다는 지금까지 어떤 의미로 존재해왔는가
6. 화승총의 위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총 제작에 힘쓴 까닭은 무엇인가
7. 혈연보다 집단을 우선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8. 일본적 특성이 보이기 시작한 교토시대의 국풍문화는 어떤 것인가

Ⅱ장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인은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
1. 200년 이상 문을 잠갔던 일본은 어떻게 개국을 하게 되었나
2. 가장 오랫동안 일본을 지배했던 에도 막부는 왜 사라졌는가
3. 한여름 무더위와 함께 정한론이 대두한 이유는 무엇인가
4. 완고한 태도를 견지한 일본 사법부의 독립성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5. 청일전쟁으로 국내갈등과 국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나
6. 한국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이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나
7. 히비야 공원의 민중폭동이 일본 역사에 남긴 의의는 무엇이었나
8. 정당정치를 이끈 하라가 정치가로서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9. 파멸을 향한 선택, 진주만기습은 세계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10. 6 · 25사변이 어떻게 일본 자위대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는가

Ⅲ장 일본인 특유의 정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 1,300년간 지속된 일본 왕조가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2. 일본인의 성은 왜 우리와 다르고 천황은 성이 없는 걸까
3. 일본의 근로관에 인격수양 관념이 내재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4. 전통무대예술이 지금까지 일반인과 조화를 이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5. 스모에 대한 일본인의 미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6. 일년 내내 열리는 마츠리가 일본인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인가
7. 무수히 남아있는 이혼장에서 일본여성의 어떤 모습을 볼 수 있는가
8. 일본인이 무덤을 만드는 대신 화장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9.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10. 섬나라라는 특성이 일본인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을까
 

저자 소개

저자 : 조명철 외
조명철 :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 부교수로 있으며, 저서로『일본근세현대사』(공저) 등이 있다.

김보한 : 단국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 교토대학교 연수원을 지냈고, 현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김문자 : 상명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챠노미즈여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상명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강의 중이다.

이재석 :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 방송통신대학교 등에서 강의 중이다.
 
 
책 속으로
사실 1873년 정한론이 처음 거론되었을 때는 정치권의 가벼운 화두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의견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정치권은 정한파와 반정한파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개인과 파벌들은 어느 쪽으론가 줄을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정한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이 걸린 심각한 싸움터가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일본을 무시한 조선을 징벌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다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주도권을 누가 장악할 것인가라는 한판 승부였다.

구체적으로 유신정권이 권력을 집중화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중심부에 눌러붙느냐 아니면 권력의 주변부로 떨어져나가느냐의 처절한 권력투쟁이었다. 이처럼 정한론은 바로 외교문제와 국내정치가 묘하게 뒤엉켜 돌아가는 정치의 복잡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정한파의 중심인물은 메이지유신의 영웅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훗날 자유민권운동의 대표주자인 이타가키 다이스케였다. 엄청난 추진력의 소유자인 사이고와 정치적 협상에 능한 이타가키에 의해 정한론은 정한을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기에는 서구화에 반대하는 사족(무사층)들의 폭넓은 지지도 한몫을 하였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무색케 하는 정쟁 속에서 결국 1873년 8월 17일, 메이지정부는 사이고를 일본 대표로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사이고는 단순한 외교사절이 아니었다. 사이고는 본인의 주장대로 자존심 강한 조선정부가 자신을 살해하도록 유도하여 조선을 칠 명분을 일본에 제공하기 위한 자폭사절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정계의 일인자가 될 수 있었던 사이고가 왜 스스로 죽음을 자원하였는가.

사이고는 메이지유신으로 몰락한 무사들에 대해 늘 동정적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정한론이야말로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시켜주는 동시에 그들의 지위를 다시 상승시켜 줄 수 있는 해결책으로 보였다. 정말 정한론이 정부내의 갈등을 해소시켜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한 목숨은 아깝지 않다는 감상주의가 사이고의 내면에 흐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이고는 자신이 무사들에게 보여 준 동정보다도 더 큰 애정과 존경을 지금까지 일본국민으로부터 받고 있다.
--- p.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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